[무비053] 펄프 필름 단편 영화선 Weird Tales

수면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무정형의 덩어리 같은 작업

12:23
Voiced by Amazon Polly

◆ ‘펄프 픽션’에서 한 세기가 지나 ‘펄프 필름’이 도래하다

언젠가부터 지역 상영회에서 어떤 계보나 전통과도 무관한 무정형의 낯선 작업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만큼 과거에 비해 영화를 만들기 위한 물리적 환경이 개방되었다. 그리고 예전이라면 문학 소년소녀가 되었음직한 청춘들이 21세기에는 텍스트 대신 이미지에 도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다수의 작업은 그저 이런 게 있구나 하고 넘어가게 마련이다. 워낙 많은 영화가 소리소문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종종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하곤 하지만 만듦새가 거칠거나 기존 작품의 습작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 초보 작품들을 숱하게 접하던 중에 일관성을 갖고 지속적으로 결과물을 선보이는 창작자 혹은 창작집단을 만난다면 대체 정체가 뭘까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개별 단품이라면 1년에 수천 편씩 쏟아져 나오는 그저 그런 도전으로 치부하면 끝이지만, 개인도 아니고 소그룹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등장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것도 하필 대구에서 연작 형태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면 일단 호오를 떠나 관찰하고 볼 일이다.

이들에 대해선 전혀 면식이 없는 관계다. 상영회 자리에서 객석의 관객 포지션으로 몇 번 마주치긴 했겠지만, 특별히 관계를 맺거나 상호 각인될 정도의 인상은 주고받은 바 없다. 그저 파편처럼 확인되는 몇 가지 정보만 있을 뿐이다. 이 집단은 스스로를 ‘펄프 필름 프로덕션’이라 칭하고 있다. 아마 몇몇 마음 맞는 이들이 함께 협업으로 영상을 제작하는 모임일 테다. 자신들의 몇 편 작업을 묶어 {펄프 필름 단편 영화선}으로 소개하는 중인데 이 라인업 중 몇 편은 개별적으로 보긴 했지만 사실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 지역의 모 상영회에서 전 편을 한 번에 다시 보고 나니 단품을 볼 때와 꽤 상이한 감상이 발생했다.

이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펄프 필름’이라 지칭하고 있다. 게다가 단편 연작선의 영문명은 심지어 ‘위어드 테일즈’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이 추구하는 작업의 지향점이 오롯이 설명된다. 1923년에 탄생해 세계 대공황 시기인 193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이제는 전설이 된 미국의 잡지명이다. 이 잡지에 연재되던 주 부류는 대개 통속적인 장르소설들이었다. 주로 판타지와 SF, 호러, 이전 전통과는 상이한 추리물들이다. 이런 일단의 작품 경향을 훗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유명한 작품 제목으로 쓰이기도 한) ‘펄프 픽션’이라 통칭하게 된다. 순수문학과는 차별화된 형태의 ‘장르문학’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는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마침 할리우드는 <킹콩> 같은 판타지 장르를, 신문에선 ‘코믹스’로 불리는 연재만화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즉 ‘마블’이나 ‘DC’의 출발점이기도 한 셈이다)

이 시절에 위어드 테일즈 잡지에서 데뷔하거나, 생계를 위해 싸구려 원고료에도 기꺼이 연재하던 이들의 면면은 후대가 보면 어마어마한 이름값을 자랑한다. ‘크툴루 신화’를 창시한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야만인 코난’으로 유명한 로버트 하워드,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로버트 블로흐, <화씨 451>과 <화성 연대기>의 레이 브래드버리 등등 훗날 장르문학의 거장 칭호를 얻은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의 장르문학 공식은 스티븐 킹과 딘 쿤츠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계보를 구축하고 지금도 영향력을 나날이 확장하는 중이다. 연재 당시에는 그저 저급한 대중 취향에만 맞춘, 오늘날 라이트노벨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이들은 21세기 대중문화에 어마 무시한 영향력을 드리운 셈이다.

◆ 단편선 1. <피자의 여행>이 던지는 당혹스러운 경쾌함

그런 웅대한 이름을 차용한 연작에 수록된 단편들은 충실히 이름값에 부응하는 구성이다. 농담처럼 툭 튀어나오다 후다닥 정리되는 식이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제작 과정에서 스태프들끼리 서로 마주보며 키득거리던 광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독립영화라면 응당 작가가 온갖 세상고민 다해가며 스스로를 갈아 넣다시피 주제와 표현에 매달리는 풍경을 상상하게 되지만, 이 단편 연작은 그런 고뇌 대신에 동료들이 대신 재미있겠다고 합의만 이뤄진다면, 가벼운 엉덩이로 즉시 작업이 가능하다는 태도일 것이다. 왜 마음 내키는 대로 영화를 찍으면 안 되냐는 발상의 전환과 욕망의 분출이다.

▲영화 <피자의 여행> [사진=펄프 필름 프로덕션]

<피자의 여행>은 제목 그대로 피자박스가 거리를 누비는 짧은 이야기다. 어딘가의 주문을 받기라도 한 건지 피자박스는 도시를 누비기 시작한다. 몇몇 장소에서는 자신이 해당 장소를 거쳐 갔음을 증명하려는 듯 의인화되어 인증 샷을 남긴다. 장난감 자동차에 실려 신속하게 이동하기도, 물리법칙 따위 상관하지 않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한다. 배달의 소임을 마친 후에는 무정한 고객에게 버림받았는지 또는 수거 과정 중 빠뜨렸는지 천변에 그저 흘러간다. 피자박스는 그렇게 하염없이 떠내려간다.

이 불과 3분 분량의 초-단편에는 어떠한 풍자나 은유의 의도도 엿보이지 않는다. 그저 피자박스가 여행을 한다! 라는 목표치에만 철저히 충실하다. 단지 그뿐이다. 이 기이한 장난을 보게 될 누군가가 각자의 해석을 덧붙여 작품에다 의미를 부여하건 말건 제작자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을 테다. 그저 만들고 나서 한바탕 웃으며 수고했다는 격려면 충분하다는 태도다.

◆ 단편선 2. <귤을 까먹는 다는 것은>이 전하는 애잔함

연작의 두 번째 작업은 <귤을 까먹는 다는 것은>이다. <피자의 여행>에서 러닝타임이 1분 더 늘었다. (즉 4분짜리다) 고작 1분 증량인데 제작진은 2배로 늘었다. 게다가 본 작품의 장르는 심지어 로맨스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세계가 흔히 요즘 청년세대가 작업하는 단편영화에서 예상될법한 청춘의 풋풋한 풍경…일 리 없다. 능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영화 <귤을 까먹는 다는 것은> [사진=펄프 필름 프로덕션]

4분이라는 시간은 제대로 기승전결을 갖춘 서사를 전개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다. 제작진은 그 한계를 직시하고 전형적인 서술 대신에 과감한 실험에 도전한다.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남녀는 같은 공간에 위치하지 않는다. 남자는 방에서 아마 퇴근길에 동네 시장통이나 좌판에서 샀음직한 검정 비닐에 담긴 귤을 그저 까먹는다. 엉뚱해 보이지만 작품의 제목과 직접 연결되는 행동양태다. 그는 묵묵히 집요하게 귤을 먹고 자신의 행위결과를 입증하려는 듯 수북하게 귤껍질을 쌓아올린다. 그저 그 패턴을 거듭 반복할 뿐이다. 마치 동물원에 감금되어 야생의 습성은 잃어버린 채 포로가 된 환경에 부적응해 앞뒤로 오가며 정형행동만 이어가는 대형 동물을 보는 느낌이다.

그런 남자의 머릿속 집착을 이미지화하는 것처럼, 남자가 있는 방을 캔버스 혹은 스크린으로 삼아 물질적 실체가 아닌 여자의 흔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기를 반복한다. 이미지 속 여자는 입술을 굳게 물고 어디론가 향한다. 아마 남자가 기억하는 여자의 마지막 모습일 법하다. 여자는 남자의 점점 신기루처럼 희미해져가는 기억의 더미 속에서 과거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돌아서 떠나고 만다. 이미 현실에서 그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 남자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테지만 덧없는 집착과 미련만 남았을 법하다. 그런 감정의 편린은 귤껍질 마냥 쌓여만 간다. 아니, 하나의 퇴적된 지층을 쌓아올리듯 작은 산을 이룰 기세다. 그렇게 유예된 채 결실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시간이 부질없이 흐른다.

영화는 남자의 뇌 내 망상을 시각화해 화면에 중첩시킨다. 기술적으로 전혀 새롭지 않은 특수 효과만으로 거칠고 투박하지만 참신한 접근법을 취한다. 그 결과로 마치 행성 솔라리스의 바다가 감히 무례함을 저지르며 자신에게 근접한 지구인들의 뇌를 스캔한 것 마냥 구현된다. 남자 캐릭터를 무언의 화자로, 그의 기억 속에만 이제 과거의 잔해로 존재하는 여자를 객체로, 수북한 귤껍질을 미장센으로 삼아 형상을 갖춘 (난해해 보여도 알맹이는 사려 깊은) 신파적 로맨스다.

◆ 단편선 3. <코끼리와 같이 춤을>이 펼치는 부조리의 향연

세 번째 연작, <코끼리와 같이 춤을>은 펄프 필름 프로덕션의 단편 연작들 중에서 가장 (1930년대 펄프픽션의 본산이던 잡지 위어드 테일즈의 주력 장르에 속하던) ‘코즈믹 호러’에 근접하는 구조를 취한다. 다만 코즈믹 호러 장르가 과학기술문명을 이룩한 인간이 자신들을 벌레처럼 상대하는 권능을 가진 존재들에 의해 운이 나쁘거나 각자의 죄악 때문에 징벌당하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그에 비해 범용한 인간에 불과한 주인공을 끝내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마는 게 인간이 측량할 수도, 대적할 수도 없는 우주적 권능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지배질서인 자본주의 시스템이 대체했다는 점에서 본 작품의 차별화가 드러난다.

▲영화 <코끼리와 같이 춤을> [사진=펄프 필름 프로덕션]

남자는 도심의 빌딩 주변을 청소기를 들고 열심히 정리하는 중이다. 그런 남자의 시선에 문득 구깃구깃 메모지가 들어온다. 공원에서 코끼리 똥을 치우는 일자리에 시급 오만 원을 제공한단 것이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원으로 달려간다. 정말 공원엔 군데군데 코끼리 똥이 흩어져 있다. 어마어마한 똥 덩어리들로 청소기 내부는 금방 묵직해진다.

남자는 일에 몰두하느라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남자의 주변에선 코끼리(탈을 쓴 존재)가 속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덩실덩실 춤을 추듯 뱅뱅 돌고 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이 기괴한 존재를 알아차린다. 메모지가 사실이냐며 확인차 코끼리에게 내밀지만 갑자기 종이를 낚아채 진공청소기 호스에 빨려들게 만들어버린다. 남자는 사색이 되어 코끼리 똥 더미 속에 섞여 들어가 버린 메모지를 찾고자 노력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만다. 똥을 헤집으며 손을 더럽힐 만큼 필사적인 시도가 헛되어 남자는 자신의 노동이 보상받을 근거를 상실하고 만다. 하필 바로 그런 상황에서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는 급박하게 요의를 느끼고 만다. 하지만 주변엔 화장실이 없다. 남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고 만다.

영화는 부조리극과 화장실 유머를 뒤섞고 나서, 근래 한국사회에서 주변부 불안정노동이 겪는 천대와 차별을 질료로 삼아 완성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빌딩 청소를 하다 발견한 메모지는 그 진위가 모호하지만 남자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상황이다.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나 심신의 보람은 그와는 별세계 이야기처럼 동떨어져 있다. 남자에게 노동은 그저 생존을 위해 억지로 수행하는, 언제고 때려치울 수 있는 ‘죽은 노동’, 무채색의 폐허에 불과할 뿐이다.

▲영화 <코끼리와 같이 춤을> [사진=펄프 필름 프로덕션]

그런 남자를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처럼 자유자재로 통제하며 마치 조롱하듯 주위를 춤추며 돌아다니는 코끼리는 현실의 동물이라기보다는 크립티드, 즉 환상 종의 실제 잔존 개체이거나 혹은 신비동물의 표상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영물이 아닌 악신에 더 근접한 존재감이다. 남자로 하여금 똥을 치우고 그 똥 더미를 헤집게 만들고 최후의 일격까지 자비나 동정이라곤 추호도 드러내지 않는 이 괴이한 존재는 한 인간의 존엄성이 바닥을 치며 추락하는 과정을 그저 재밋거리로 소비하며 희희낙락할 뿐이다.

영화는 그렇게 기괴하고 찜찜한 우화로 마무리된다. 그저 유희 차원으로 만들어지던 초-단편과는 상이하게 현실에 대한 발언, 그리고 풍자와 해학의 시선이 확연히 관측된다. 얼핏 의미를 알 수 없어 보이더라도 사전/사후 배경정보와 기획의도를 접할 수 있다면 작가의 주제의식이 무엇인지 간파하게 될 테다. 현대 개념미술에서 결과물보다는 그 결과가 나오게끔 결정적 작용을 수행하는 배경이나 동기를 확인하는 게 핵심인데 그런 방식의 영화적 도전을 목격한 기분이다.

◆ 단편선 4.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방황하는 청춘의 동시성

본 작품은 펄프 필름 단편 영화 연작으로 묶인 작업들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그야말로 대작(?!)이다. 다른 작업들이 초-단편에 가깝다면, 이 작업은 무려 30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으로 다른 단편영화와 비교해보더라도 중량급에 속한다. 제목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란 이름은 우리가 익히 아는 원시인류를 지칭한다. 하지만 본 작품이 엄밀한 고증이나 학구적인 접근법으로 고생물학 탐구를 소재로 삼지는 않는다. 그저 이 원시인류로부터 비롯된 현재 인간계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풀어내는데 상징적 코드로 차용하는 식이다.

▲영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사진=펄프 필름 프로덕션]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혼자 방 안에 있다. 양은냄비와 수험서 외양의 책들, 그 이외엔 전형적인 특색이랄 게 없는 20대 남자의 자취방 풍경이다. 라디오에선 뜬금없이 시조새의 화석이 국내에서 최초로 발굴되었다며 요란하게 이 쾌거(!)를 언급하는 중이다. 화석을 가져온다면 상당한 보상이 제공될 것이라는 뉴스 보도에 남자는 단호한 표정으로 바깥을 향한다. 쌀쌀한 겨울철 날씨인데도 남자는 얇은 옷에 맨발로 대구에 사는 이들이라면 쉽게 예측가능한 동네를 지나면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아 헤맨다. 의도적으로 구현된 기괴한 남자의 도보 자세는 아직 온전히 허리와 등을 곧추세우지는 못한 채 어설픈 직립보행을 경험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자연스럽게 연상하도록 만든다. 그는 느릿느릿하게 움직이지만 계속 무엇인가를 애타게 탐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고대의 원시인류가 그날그날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이동하며 수렵과 채집을 병행하던 행태 그대로, 어쩌면 맹수들이 어슬렁거리며 자기 영역 내를 순시하는 것처럼 남자는 범어네거리와 인근 지역을 거듭 오간다. 하지만 단순한 배회는 아니다. 그는 분명히 어떤 판단 하에서 동선에 따라 목적지로 향하는 도상에 있다. 남자는 자신의 정체되어 도무지 인생역전 실마리라곤 찾기 힘들어 뵈는 처지에서 뉴스에 소개된 시조새 화석을 발굴하면 얻어낼 보상을 마치 동아줄 마냥 매달리는 중이다.

▲영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사진=펄프 필름 프로덕션]

남자는 어느 아파트 단지 놀이터의 모래사장에서 손에 꾹 쥐고 있던 호미로 땅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공들여 땅을 파던 그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쾌재를 부른다. 그리고 그가 방송에서 들었던 보상금을 받기 위해 모처로 향한다. 하지만 그가 만난 관계자는 심드렁하고 지친 표정으로 엉뚱한 것을 괜히 가져왔다며 무관심하기 그지없다. 남자는 푸대접에 잔뜩 화가 난 상태라 관계자와 대치하며 소란을 피운다.

본 작품을 만든 이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기본전제인 차갑고 냉소적인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표방하고 있다. 남자는 영화 내내 외톨이에 외골수로 그려진다. 주인공에겐 친밀한 대인관계나 통상적인 사회성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도시라는 아스팔트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맹목성이 번득인다. 하지만 그것이 뚜렷한 목표와 미래를 향한 전망은 아니다. 착실하게 진로를 설정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태도 대신 동물적 집착이 두드러진다. 제작진은 자신들이 속한 세대의 부정적인 면모를 여과 없이 형상화해가며 출구 없는 분노를 막판에 폭발시킨다.

▲영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사진=펄프 필름 프로덕션]

노력하는 모습이 딱히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안내를 받을 기회도 얻지 못하는 작중 주인공의 초상은 불투명한 미래를 대비할 궁리도 없이 직면한 세대의 공황과 불안을 신경증적으로 묘사한다. 금붕어, 닭 뼈다귀, 생간 같은 간단한 소품들의 사용법도 꽤 효율적이고 선연한 인상을 남긴다. 그렇게 추상화된 이미지의 형상화를 통해 초지일관 자신들이 표현하고픈 주제를 밀어붙이는 태도는 (아직 이들이 의욕에 비해 뛰어넘기엔 버거운 완성도를 쉽게 지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번에는 대체 뭘 갖고 등장할지 제법 궁금해지게 만든다.

◆ 작품의 재발견을 가능케 한, 영화와 무용의 콜라보 목격담

‘아무런 시네마’라는 공동체 상영 그룹의 상영회에 참석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펄프 필름 프로덕션의 단편 연작들을 한데 모으고, 여기에 영화를 상영만 하는 게 아닌, 지역 무용창작자와 연계해 퍼포먼스로 변환시키는 시도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라 했다. 그렇게 {아무런 시네마 9: 도시를 누비는 광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2023년 7.22(토) ~ 23(일), 종로 무영당에서 개최된 기획전 중 펄프 필름 컬렉션은 7월 23일에 상영되었다. 차례대로 이들의 연작 단편영화들이 상영되었다. 이런 형태의 기획 상영은 사실 드문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중간에 객석과 무대 주위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바로 ‘무궁무진무용단’ 구성원들이었다.

▲[사진=아무런 시네마]

사전에 구체적인 참여 프로그램을 밝히지 않았기에 이들 무용단의 출현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짧은 단편영화가 해가 저물고 수명을 다한 듯 가라앉기 시작하면 어느새 막간 틈새를 이용해 그들은 영화의 전개와 연결되는 독자적인 창작 무용을 객석과 무대 주변을 오가며 펼치기 시작한다. 현대 영화음악의 거장 故 엔니오 모리코네는 자신의 음악이 영화가 눈앞에 펼쳐지지 않더라도 음악만으로 능히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데, 단 2명이 소화한 무용단의 퍼포먼스를 통해 관객은 마치 내 앞에서 지금 당장 영화가 시작되었다고 느꼈을 법하다.

▲[사진=아무런 시네마]

자신의 신체 윤곽선과 동작, 파트너와의 순도 높은 교감, 치밀한 실사와 준비를 통해 시연된 무궁무진무용단의 퍼포먼스는 개별 단편이 시작되기 전이나 끝난 직후에 불쑥 주위에서 침입해 들어오곤 했다. 너무 짧거나 모호한 연출 때문에 내가 지금 알고 있거나 판단하는 게 맞는지 혼란스러운 이들에게는 영화의 기세를 고스란히 눈앞에 표현한 무용단의 훈련과정은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이 되었을 테다. 무엇보다 타 장르와의 교차를 통해 작품이 원래 지닌 의도나 상태를 한층 더 심화시킬 수 있다는 실용적 판단이 주목을 받았다. 1차적으로는 개별 단품이 아니라 연작 컬렉션 형태로 한데 패키지로 묶어 소개하는 방식, 2차적으로는 타 문화예술 장르와의 교류와 연계 과정을 적극적으로 도전하려는 시도 덕택에 그저 개별 상영이었다면 발견하지 못했던 작품의 특이점과 이색적인 면모가 온전하게 구현될 수 있었다.

▲[사진=아무런 시네마]

그렇게 ‘융ㆍ복합’이란 개념이 다만 수식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감상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과 함께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작품들의 치명적 매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역에서 여러 경로와 기획으로 공동체 상영이 이뤄지고 있는바, ‘아무런 시네마’의 품 많이 들어갔을 크로스오버 교차는 지역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큰 호사가 아닐 수 없다. 기존에 지역 독립영화 경향으로 통용되던 결과는 사뭇 상이한 작업이 조금씩 늘어가는 추세에서, 2023년에도 펄프 필름이 새로운 연작 컬렉션을 선보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상영 및 품평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작품정보>

피자의 여행 Pizza’s Journey
2022|한국|실험영상|3분
감독 권오현
촬영 정면우
편집 권오현
제작 펄프 필름 프로덕션

귤을 까먹는 다는 것은 orgetting tangerines is
2022|한국|로맨스|4분
감독 권오현
출연 정성태, 김강원
촬영 정면우
PD 이상명
편집 권오현
제작 펄프 필름 프로덕션

코끼리와 같이 춤을 Dancing like the elephant
2022|한국|코미디|6분
감독 권오현
출연 이준호, 김학수
촬영 김도완
PD 김태오
편집 정면우, 권오현
제작 펄프 필름 프로덕션

2022 20회 광화문국제단편영화제, 경쟁

오스트랄로피테쿠스 The Australopithecus
2022|한국|호러|28분
감독 권오현
출연 김태오, 권오현
촬영 류상현
편집 권오현, 정면우
제작 펄프 필름 프로덕션

2022 3회 감-동-인 영상제
2022 20회 광화문국제단편영화제, 경쟁
2022 오오극장 대구독립영화 연말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