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탐관오리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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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음력 12월 말, 병자호란의 혼란을 이용해 예안현(지금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에 도망치듯 부임했던 예안현감 김경후가 부임 후 7개월여 만인 1637년 6월 말 파직되었다. 탄핵 전문 부서인 사간원의 탄핵 때문이었다.

김경후는 이미 1636년 12월 초 예안현감으로 낙점되었을 때부터 무능하고 옹졸하다는 소문이 예안고을에까지 퍼진 터였다. 그렇지만 이미 확정된 인사였고, 그래서 그는 부임을 준비하면서 ‘서경’을 받는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비록 5품 이하지만, 관원이 임명될 때 사간원으로부터 인사 검증의 일종인 ‘서경’을 받아야 했다. 사람됨과 평판 등을 조사하여 그 임명에 동의한다는 의미를 담아 왕이 내리는 임명장인 고신에 서명하는 제도로, 서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임명도 어려웠다. 그런데 병자호란으로 인해 이 프로세스가 중지되었고, 엄밀하게 말해 그는 아직 임명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부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경후는 이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우연이기는 하지만, 김경후 입장에서 지방관 발령은 그에게 피난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고, 한쪽 다리와 팔을 쓸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인의 등에 업혀 한양을 탈출하다시피 빠져나왔다. 그러나 막상 예안에 도착하니, 지방관 행차는 그럴듯하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격 없는 현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 중에 나팔을 불면서 행차를 해서 백성들의 빈축을 산 이유였다. 게다가 그는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50여 명이나 되는 식솔을 거느리고 내려왔다. 관직 부임인지 가족들의 피난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부임 이후였다. 김경후의 자격 없는 부임은 그로하여금 조정만 바라보게 했다. 서경이 없어도 현감으로 인정받을 일들을 해야만 했다. 부임하자마자 예안현 백성들을 대상으로 편전통과 거마창, 능철을 거두기 시작했던 이유였다. 편전통은 화살을 넣는 통이었고, 거마창은 말의 행진을 막기 위한 긴 창이었으며, 능철은 뾰족한 못처럼 만들어 말들이 달리지 못하도록 길에 뿌려두는 무기였다. 당연히 당시 필요한 물건들이었지만, 시골 조그마한 현에서 이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쇠를 모아 이를 만들거나 비싼 돈을 주고 사서 납부해야 했으니, 예안현민들 입장에서는 닥칠 청나라 군대보다 닥친 현감이 더 문제였다.

그의 기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부임했을 때는 병자호란이 한참 진행 중인 터라, 그는 군사들과 함께 문경에 주둔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군관을 예안현에 보내 이미 적병이 괴산에까지 이르렀으니, 관아에 속한 모든 것을 산으로 옮기라 명했다. 그러고는 지방 양반들의 자치 기구인 향소에도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라”는 말을 전달하게 했다. 예안현은 이틀 만에 텅텅 비었고, 그 역시 문경에서 밤새 말을 달려 예안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당시 적병은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농성 중이었기 때문에 김경후의 경고는 결국 가짜 뉴스로 밝혀졌다. 김경후는 자신의 옹졸함만 드러낸 채, 가짜 뉴스의 진원지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수습 과정도 문제였다. 전쟁은 그것이 비록 짧았다고 해도 민심은 이반되고 국가 경제는 요동을 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예안현은 전년도 흉년으로 인해 전쟁과 상관없이 이미 어려운 보릿고개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당연히 현감 입장에서는 민심을 잡고 굶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현의 창고를 열어야 했다. 특히 환곡을 폭넓게 시행해서 이 시기를 함께 넘길 방법들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그는 피난 온 친척들을 위해서만 창고를 사사로이 열었고, 환곡을 시행할 곡식까지 그들에게 퍼주었다. 흉년과 전란으로 인해 곤궁하기 이를 데 없는 예안현의 백성들 눈에는 이게 어떻게 보였을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소식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탄핵 전문 부서인 사간원에 전해졌다. 사간원 입장에서는 임명 동의도 받지 않은 예안현감의 무자격도 문제였지만, 이후 기행은 무능에 비도덕적이기까지 했다. 사간원에서 “현감 김경후는 사람됨이 어리석고 용렬할 뿐만 아니라, 흑백 구별도 못하여 크고 작은 모든 관의 명령이나 부역을 모두 아전들 손에 맡기니, 온 경내가 원망하면서 욕하고 경상도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하루도 관직에 두어서는 안 되니, 파직을 명하고 그 대신 명망 있는 문관을 특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라고 간언한 이유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간원 상소에 따르면 당시까지 예안은 영남에서 가장 쇠잔한 고을 가운데 하나여서 문관들은 부임을 꺼렸고, 그러다 보니 관원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 역시 적절한 사람을 고르는 데 힘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이 있었던 1623년부터 예안현감의 경우 부적당한 인사로 체직된 사람만 14명이었다. 벼슬이 없는 사람에게야 현감 자리 자체가 중요했지만, 관직에 자리 잡은 사람치고 예안 현감을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때문에 예안 현감 자리는 검증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 자리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자리가 되었고, 이게 김경후 같은 인사가 낙점된 이유였다.

조선에서 관료가 되는 자격은 엄했고, 검증 역시 그랬다. 그러나 지방관 자리를 부의 축재 과정으로만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로 인해, 한미한 예안 현감 자리는 김경후 같은 자격 없는 사람들이 차지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이처럼 자격 없는 사람이 관료가 되면, 그의 시선은 당연히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했던 사람에게 맞추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만 치부되었다. 검증되지 않고 자격 없는 관료는 무능하기 마련이며, 무능한 관료는 최소한의 윤리적 소양마저 잃어버릴 공산이 크다. 탐관오리는 이렇게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