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반정 15년의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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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3번 무릎 꿇고 9번 절하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당시 인조가 조선의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부 개혁이었다. 전쟁에서 진 것은 진 것이고, 이로 인해 바뀌는 것은 바뀌는 것이지만, 그래도 왕으로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15년 전 광해군을 축출하고 반정에 성공했을 때만 해도, 새로운 국가에 대한 이상이 있었지만, 15년 성적표를 보면 참담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내부 개혁의 핵심은 인사였다. 반정 이후 서인 중심의 인사가 만든 문제들을 개혁할 필요는 있었다. 인사 개혁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인사 담당자의 교체였다. 이를 위해 인조는 가장 신뢰했던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을 받아 남이공(南以恭)을 인사 부서 수장인 이조 판서로 삼았다. 1638년 3월의 일이었다. 남이공은 서인인 최명길과 다른 소북파 출신이었지만, 반정 이후 최명길 편에 섰던 인물이었다. 다행히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과 함께 국정을 전횡했던 북인들에 대한 숙청이 대북파 중심이어서, 그는 잠시 파직되었다가 다시 관직이 회복되었던 터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모든 문관 인사를 총괄하는 수장 자리에 앉았다.

조선에서도 인사 부서인 이조의 권한은 컸다. 물론 조선의 인사는 전적으로 왕의 권한이었다. 모든 관직은 왕명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왕의 최측근 인사에 대해서는 왕의 복심이 작용할 수 있지만, 그 외 인사까지 왕이 일일이 관여하기는 힘들었다. 물론 형식적으로 이조는 인사 실무와 추천 전담 부서이기는 했다. 이조에서 대상 관직에 3명의 인사 대상자를 추천하면 그중 한 명을 왕이 낙점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는 실제 엄청난 권한이었다. 인사 대상자 3명을 추천할 수 있다는 말은, 3명의 추천 권한과 더불어 인사 대상에 제외할 수 있는 권한이 함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조의 권한은 여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등위까지 정해서 추천할 수 있었다. 물론 대상자 및 순위 선정은 도목정사라고 하는 인사 관련 회의를 통해 결정되지만, 그 회의 자체가 인사 담당부서인 이조 내에서 이루어졌다. 이조에서는 도목정사를 통해 3명을 무작위로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순위를 정해 추천했다. 그러면 왕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이들 가운데 한 명, 그것도 대체로 1순위로 천거된 사람을 임명했다. 3명에 포함시키는 권한, 그리고 그 가운데 1순위로 천거하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으니, 하급 관료 전체에 대한 인사는 실제 이조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이공에게 고위 관료를 제외한 인사 전권이 주어졌다는 의미였다. 반정 이후 최초 소북 출신 이조 판서이니, 인조로서는 인사에서 개혁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이공의 이조 3달을 평가 해 보면, 사람만 바뀌었을 뿐, 행태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깜짝 발탁이라면 깜짝 발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현의 승지 임용이나 박수문에 대한 대간직 제수는 말 그대로 의외였다. 남이공과 잘 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들이 임용되어야 할 이유를 모두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승지나 대간직 임용이 이러했으니, 지방관을 비롯한 그 아래 하급직들의 임용이 어떠했을지는 거론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원래 예민한 게 인사 문제이니만큼, 이게 전횡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이렇게 되자 인조는 결국 경연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인사 문제를 질책했다. 당시 인조는 반정 이후 지속된 서인 중심의 인사에서 벗어나, 소북 출신의 이조 판서를 통해 인사 전체를 흔들어 보려 했던 의도를 밝혔다. 그만큼 기대도 컸다는 말인데, 3개월을 기다려도 바뀌는 게 없었으니 그 연유를 남이공에게 직접 따져 물었던 터였다. 비록 소북파 출신이라고는 해도 이미 서인의 거두인 최명길의 라인에 서 있었던 남이공이었으니, 사실 바뀔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인조로서는 질책을 겸해 이 문제를 따져 물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남이공의 대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5품 정도에 불과한 낭관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남이공은 인사 실무자들인 이조 낭관들이 말을 듣지 않아 자신의 인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댔다. 물론 이조 낭관들은 ‘전랑銓郞’이라 해서 그 권한이 적지 않았고, 엘리트 관료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이조 수장의 외풍 없이 스스로 사람을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자신의 후임을 스스로 정하는 자대권도 있었다. 상관에게 휘둘림 없이 공정하게 인사를 하라는 주문에 따라 주어진 권한이었다. 이 때문에 이조 판서 역시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담당 부서 수장의 대답치고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말의 불똥은 결국 현직 전랑들에게 튀었다. 당시 이조 정랑 홍명일은 홍문관 응교로 자리를 옮겼고, 화가 나서 제출한 정치화의 사직서마저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되자 남이공은 다시금 자기 사람들을 인사 핵심 부서 담당자들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최명길의 사람이었던 이도와 과거 소북의 영수였던 류영경의 증손자 류심이 천거된 이유였다. 이조는 남이공의 사람들로 채워졌고, 이들은 순수하게 능력만 보고 인사를 해야 하는 의무를 무시한 채 남이공과 인사를 전횡하기 시작했다. 최명길의 입김은 컸고, 하급 관료들은 그들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결국 조정의 인사는 남이공이 이조 판서가 되기 전보다 못해졌다.

반정은 그 당위를 위해 강한 명분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인조반정 15년의 성적표는 명분과 비교할 때 너무나 초라했다. 청나라와의 두 번 전쟁에서 모두 패했고, 두 번째 패배인 병자호란의 결과는 왕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치욕으로 끝났다. 이러한 상황이야 외침의 결과라고 핑계 댈 수나 있지만, 내부적인 도덕적 해이와 인사의 전횡은 수습하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이를 기록한 김령은 조정을 가리켜 광해군 그늘에 있었던 소북인들과 벼슬을 찾아 이리저리 붙는 남인 무리, 그리고 화의를 주장했던 서인들이 기웃거리는 저잣거리가 되었다고 했을까! 김령이 평가한 인조반정 15년의 성적표지만, 이 성적표는 어쩌면 정권이 목표를 상실하거나 도덕성을 잃을 경우 지금도 나타나는 성적표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