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고을 규약이 만드는 공동체

11:01
Voiced by Amazon Polly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 말대로면 문제가 많은 사람도 떡잎부터 표시가 나기 마련이다. 김만갑이 그랬다. 이제 겨우 약관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옻골(현 대구 동구 둔산동 지역) 최고의 문제아로 부상했다. 이웃에 대한 패악질은 당연했고, 그런 패악질이 간혹 부모를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부모나 옆집 사람이나 자기 성질에 걸리적거리면 패악질부터 부리고 보는 성격이었다. 불효에 포악한 행동까지 일삼았으니, 고을 차원의 해결이 필요했다. 1750년 음력 10월 17일, 옻골에서 동회가 열린 이유였다.

김만갑의 행동에 문제는 있었지만, 이렇듯 갑자기 동회까지 열어 징계하기로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김만갑에게는 같은 마을에 사는 임봉래라는 숙부가 있었다. 성이 다른 것으로 보아 이종이나 고종일 듯한데, 임봉래의 아내, 즉 김만갑의 숙모가 더 이상의 그의 행동을 용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만갑의 행동을 소상하게 적어 그의 불효와 불순을 관아에 알린 이유였다. 가족이 가족을 고변하는 일이어서, 관아 입장에서는 그 사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조선에서 살인과 같은 형사사건만큼 엄하게 처벌하는 죄가 ‘강상을 범한 죄’였기 때문이었다.

강상을 범한 죄는 유학적 윤리의 핵심인 충이나 효, 우애 등을 저버린 죄로, 유학적 도덕 사회 구현을 목표로 했던 조선에서 이러한 범죄는 사회의 근본 질서를 해치는 일이었다.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불효와 불손은 그 정도를 따질 필요도 없을 정도로 확실한 ‘강상을 범한 죄’였다. 이렇게 되자 관아에서는 동회에 사실 자체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며, 더불어 동회 규약인 동규洞規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함께 내려졌다. 임봉래의 아내가 한 고변에 대해 사실 자체를 파악하는 일이야 당연하지만, 독자들 입장에서 동규를 보내라는 요구는 좀 의아할 수 있겠다.

관아에서 동규를 보내달라는 의미는 동회에서 이를 처벌하게 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동네의 풍속과 관계된 문제이니만큼, 동회에서 그에 대한 적절한 규약이 있으면 그 처벌권을 동회에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고을 자치 규약인 동규에 따라 향원들이 모였다. 김만갑의 행동에 대한 사실 여부를 좀 더 세밀하게 판단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는 한편, 김만갑에 대한 처벌 여부도 결정해야 했다. 경주 최씨들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룬 옻골의 동회 규약은 엄했고, 관아는 이를 그대로 인정했던 터였다.

동회가 있기 하루 전인 음력 10월 16일 관아에서는 동규에 따라 불효에 관한 죄를 엄하게 물라는 명이 내려왔다. 당연히 관아에서 집행해야 하는 사법권이었지만, 그 일부를 동회에 이양함으로써 동회 차원에서 그 고을의 풍습을 잡게 하려는 의도였다. 관아의 허가도 있었고, 고을 내 분위기 역시 고을의 명예를 떨어뜨린 김만갑에 대해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컸다. 그렇게 김만갑 처벌을 위한 동회가 열렸다.

마을 장로인 최흥원의 주재로 심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막상 심리가 시작되자, 비로소 김만갑은 어린 티를 냈다. 자기 행동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엄중한지 그제야 깨닫기 시작한 터였다. 그러자 이를 본 숙부 마음도 달라졌다. 동회를 대상으로 임봉래가 직접 나서 울면서 선처를 요청했다. 자신이 제대로 김만갑을 가르치지 못한 죄도 있다면서, 이번에 선처해 주면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동회는 동회였다. 오랫동안 임봉래와 김만갑을 봐 왔던 고을 사람들은 임봉래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졌다. 게다가 김만갑의 나이가 어려, 만약 엄한 벌을 받게 되면 그의 장래가 어찌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일반적으로 불효에 대한 동회의 강한 처벌은 태형과 추방이었으니, 만약 어린 나이에 자신이 살았던 삶의 터전을 잃게 되면 그가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고을 사람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동회는 김만갑의 행동을 고변한 임봉래의 아내로 하여금 그를 다스리게 하고, 이번에 한해 엄한 벌을 면해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관아가 아니어서 내려진 결론이었다.

21세기 현재 우리는 국가의 권력과 서비스가 개인에게 직접 미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국가가 직접 개인으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국가 권력은 범죄자 개인 한 사람만을 겨냥할 뿐이다. 특히 사법권은 국가 이름으로만 행해지며, 공동체 또는 가문 등과 같은 국가가 아닌 집단의 처벌은 용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을 포함한 전근대 시기는 국가 권력이나 서비스가 직접 개인에게 미칠 수 없는 사회였다. 이 때문에 국가 권력이나 서비스, 보호 등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에는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공동체가 일정 정도 그 역할을 해야 했다. 혈연 공동체를 비롯하여, 마을이나 고을 단위의 자치 조직 역시 그래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공동체는 국가 권력의 보호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작동하면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나누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만큼 필요하면 사법권을 이양받기도 했고, 필요에 따라 공동체 내 구성원에 대한 기본권을 제약하기도 했다. 동회나 동규, 동계 등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들이었다. 물론 이것이 이후 신분 질서를 보호하고 양반들의 사적 이익 추구 수단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근원에는 공동체를 통해 개인을 보호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지금처럼 공동체라는 말이 걸리적거리는 용어로 기생하는 사회에서는 알 수 없는 의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