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규 칼럼] 소대장의 내복, 통신병의 속옷

19:02
Voiced by Amazon Polly

1987년 2월, 필자는 강원도 인제군 원통에 주둔한 부대에서 장교로 임관하기 전 지휘 실습을 했다. 이 고지, 저 고지에서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을 맞으니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유행어가 진짜임을 실감했다. 요즘은 “인제 와서 원통합니다”라고 할 정도로 확 바뀐 지역이지만, 그때는 오지 중 오지였다.

당시를 돌아보면 필자는 겉멋에 취해 있었다. 강추위에도 날렵해 보이려고 내복을 입지 않았었다. 겉모습은 폼이 났을지라도 맘속에서 “추워 죽겠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사회는 추울 때 “옷을 더 입어라”하는데 군대는 “뛰어라”고 한다. 정말 소대원들과 함께 많이 뛰었고, 함께 샤워하며 전우애를 쌓았다. 어느 날 온몸으로 열기를 뿜어내는 샤워장 탈의실에서 소대 통신병이 속옷 없이 바로 내복만 입는 모습이 의아했다.

취침 나팔이 울리기 전에 통신병에게 속옷을 챙겨 주려고 준비하는데 통신병이 찾아왔다. 그는 “소대장이 추위에 떨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내복을 입지 않으셨군요. 이 내복을 입으십시오”라며 자기가 입던 내복을 주었다. 필자는 열악했던 보급품을 탓하며 통신병에게 속옷을 입지 않은 이유를 묻지 않고 건넸다. 돌아보니 통신병은 속옷마저도 누구에게 주었을 것 같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36년 전, 그때 그 시절은 지금에 비하면 사회나 군대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궁핍했다. 그럼에도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는 속담이 자연스러웠다. 필자의 삶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눔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중요하고 계속 진행해야 한다. 요즘 누군가와 무엇을 나누려다가도 이것저것 재다 보니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소장하는 책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려다가 귀한 책이라고 다시 책장에 넣고 말았다. 각종 기념품을 나누려니 추억이 담겨 있어 안된다고 마음 한쪽에서 잡아챈다. 복지단체에 성금을 내려다가 어떤 곳에 어떻게 쓰는지 의심에 발목이 잡혔다. 단 하나도 나누지도 않으면서 이래저래 이유만 늘어놓았다.

어쩌면 나눔도 스포츠처럼 훈련과정을 거쳐야 하겠다. 운동을 재미있게 하려면 우선 체력을 기르고 기술을 익혀야 한다. 최소 3개월 이상 꾸준히 연습해야 즐겁게 운동하듯이 나눔도 연습이 필요하다. 누군가와 무엇이든 나누어 본 사람은 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행복을.

그래서 “나눔은 행복이다”고 흔히 말한다. 마틴 셀리그만 등 긍정심리학자들은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좋았던 일을 떠 올리거나 보람된 일을 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36년 전에 통신병과 옷가지를 주고받은 때를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2023년을 보내며 이것저것 재지 말고 그저 나누어 보자. 나눔은 행복이자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받는 것임을 확신한다. 누군가와 꿈도 나누어 보자. 자신은 더 확고한 꿈을 가지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재능을 기부해 보자. 뜻밖에 자신의 또 다른 재능도 발견할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누군가를 기꺼이 돕자. 서로 소통하면서 떠오른 아이디어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36년 전 속옷을 건넨 통신병과 같은 겨울을 보내고자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