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말씀으로 다시 짓고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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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흥의 첫 시집『별빛 헤치고 낙타는 걸어서 어디로 가나』(문학예술사,1984)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어찌할 텐가」는 오늘의 세계를 ‘온통 어둠’이라고 말한다. “꽃은 흐득여 지고/ 새들이 숲으로 가버린 후/ 나머지 별 하나도 자취를 감출 때// 밤은 그의 가슴으로 온통/ 어둠을 쏟아 놓아/ 최후의 빛도 스러져 갈 때// 마침내 스러지는 것마저/ 끝났을 때” 최후의 빛마저 쓰러진 이 세계는 두 번째로 수록된「어둠」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한 줌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그대 전체를 사러 버려도/ 어둠은 완료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형상은/ 어둠의 바다 위에 반짝이는/ 물결의 한 찰나일 뿐”

그러나 시인은 이 세계가 온통 어둠이게 된 원인이나 구조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세 번째로 나오는「임종 1」에서 죽비로 치듯이 느닷없이 독자에게 그 원인을 묻는다. “그대 보았는가/ 어둠이 내리는 저녁”, “그대 보았는가/ 도시의 지붕 위로 떠오르는/ 죽은 바다”, “보았는가 그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것”, “그대 보았는가/ 최후의 눈빛을 어둠에 묻고/ 쓸쓸히 거리를 지나가는 것” 시인은 세 번도 아닌 네 번씩이나 ‘너도 보았지 않는가?’라며 독자를 윽박지른다.

시를 해석하는 데 시인의 이력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시가 현실의 구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바이라면 시인에 대한 별도의 정보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반면 시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면 시인에 대한 정보가 해석에 도움이 된다. 이진흥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에, 국문학과에서 김춘수 시인에게 시를 배웠다. 이런 이력은 그의 시가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존재 탐구에 바쳐져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해준다. 실제로 시인은 권두의 자서에 마르틴 하이데거를 인용하고 있으며, “시공부”를 가르쳐주고 있는 “스승 김춘수”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기술 문명에 몰입한 현대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현대인들은 근본(대지)과 동떨어진 채 잡담과 호기심과 부산함으로 삶을 허비한다고 말한다. 또 현대인은 존재(또는 죽음)를 망각하면서까지 행복 추구에 매달리지만, 시시때때로 엄습하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한다.「독감 2」는 죽음을 은폐해온 현대인이 겪는 불안의 전형을 보여준다. “어둠이 깔리는 저녁, 귀가하는 골목 어귀에서 도둑괭이의 발톱으로 나의 뒤를 밟는 그대는 누구인가. 예절도 없이 불시로 나타나서 어깨를 치고 재빨리 잠적한 후, 찬비가 내리는 도회의 저녁은 축축하다. 거리의 불빛은 냉기에 젖어 창들은 두꺼운 커튼을 내리고 그러나 은밀히 귀를 기울인다. 낯익은 거리에 수상한 소문이 퍼덕이고 여기저기 음모의 이빨들이 번쩍인다. 고층의 피뢰침 끝에서 만트자락 날리며 적의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로 지나간 다음. 누구인가 그대, 도시의 지붕에 웅크리고 앉아 호시탐탐 나의 목덜미를 노리는.”

이진흥에게 세계의 어둠은 시가 시작되기도 전에 철학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하므로 그에게 시란 철학이 선취해 놓은 세계의 어둠을 시적 언어로 번안하는 것일 뿐이다. 시인은 철학이 세계에 내린 진단을 시적 언어로 정확하게 옮기지 못하는 것을 절망하고 안달할 뿐, 그 때문에 잘려나가게 된 현실이나 쪼그라든 역사는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정확히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르고 나면/ 잡힌 것은 애매한 그림자다”(「은유의 꽃」) 역사나 현실은 순금 같은 철학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에 그는 한탄하는 것이다.

세계를 부정한 시인은 유서를 쓰고(「4월의 유서」), 고향을 떠난다. “이제,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서 뼈 속 추위를 잠재우나” (「임종 2」), “이제 고향은 어디에 있나/ 이 황량한 들판에서 어디로/ 가나”(「나는 이제」), “별빛을 헤치고/ 낙타는 어디로 가나”(「고향」) 시인은 인류 역사가 막 시작된 여명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렇게 말한다. “어디선가 함성처럼/ 겨자씨가 터지고/ 그대 입술에 문득/ 황금 햇살이 꽂히고 있다”(「피테칸트로프스 3」) 시인은 황금 같은 언어로서 역사를 새로 시작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