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조선은 지낼 수 없는 봉선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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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 음력 12월 8일, 하회(현 안동시 풍산면 소재 하회마을)에 사는 류의목은 상주 사람 신국추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기록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신국추에 대해 목숨으로 갚을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왕인 정조가 재가만 하면 그의 목숨은 하루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안이 엄중했다. 다행히 정조는 그를 평안도 벽동에 유배 보내는 것으로 정리했지만, 이 역시 녹록지 않은 반대를 물리쳐야 했다.

상주 사람 신국추가 다른 사료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벼슬이 없었던 지방 선비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그가 왕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문제가 된 것은 상소 내용이었다. 상소를 받아 든 정조마저 황당하게 생각할 정도였고, 이를 확인했던 간언을 전문으로 하는 대간臺諫들은 사약을 내려도 모자란다며 정조를 압박했다. 아무리 조정의 정세를 모르는 지방 선비라 해도, 조선에서는 상소에 언급할 수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신국추의 상소 내용은 현대 관점에서 볼 때, 특별한 내용도 아니었다. 당시 영남 남인들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면서 영남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하고 있는 정조의 은덕을 칭송하면서, 왕이 삼각산에 올라 봉선제封禪祭를 지내는 게 좋겠다고 청했던 게 전부였다. 그러나 이 봉선제라는 세 글자가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되었고,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신국추가 금도를 어겨도 크게 어겼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왕이나 황제의 권위는 다양한 의례와 복식 등을 통해 구분된다. 또한 만백성을 대표하는 황제나 제왕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그 권위를 드러내기도 했다. 적어도 황제나 제왕은 자신들의 조상이나 공동체 단위를 넘어, 자신이 다스리는 모든 지경과 권위를 부여한 하늘이나 땅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자신에게 그러한 권위와 당위가 있음을 표명했다.

특히 황제는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자신이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임을 드러냈다. 당연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은 하늘의 아들인 천자를 제외하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고, 황제가 아닌 누군가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그 자체로 황제가 될 의도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연히 반역으로 처벌되거나 정벌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의 상황에서 보면 하늘에 대한 제사는 명나라 황제나, 이를 이은 청나라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수도 주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단을 만들고, 거기에서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방법이었다. 지금도 중국의 북경 근교에 남아 있는 천단天壇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을 둥글다고 생각했던 동아시아 사람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을 둥글게 만듦으로써, 황제만이 지내는 제사에 대한 권위를 부여했다. 조선의 왕이 땅을 상징하는 방형方形, 즉 네모난 재단을 지어 땅에게 제사 지냈던 것과 차이가 있는 대목이다.

이와 더불어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또 다른 방법이 바로 봉선제이다. 봉선제는 신성한 산의 정상에서 하늘인 옥황상제를 향해 황제가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하늘과 소통하는 황제의 위엄을 상징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중국의 대표적인 산, 즉 오악五岳 가운데 으뜸으로 인식된 태산에서 봉선제를 지냈다. 당연히 이 행사는 국가적 행사로 진행되었고, 당대 최고 권력자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행사로 계획되었다.

이처럼 황제의 제사인 봉선제를 조선의 왕에게 지내자고 청했으니, 조정 입장에서는 펄쩍 뛸 일이었다. 만약 조선 왕이 정말 봉선제를 지냈다면, 청나라와 심각한 외교 문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황권을 침범한 것으로 여겨 정벌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당연히 이러한 청을 올린 사람을 강하게 처벌함으로써, 조선 조정은 그 상소를 올린 사람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대간들이 사약을 내려야 한다고 청했던 이유였다.

아무리 시골 선비라 해도, 신국추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선제라는 위험한 발언을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이 상황을 기록한 류의목의 일기에 “아무리 만주족의 황제라고 해도……”라는 말에서 우리는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20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신국추를 비롯한 영남 사람들은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소중화小中華의 발로일 수도 있고,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호기로움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조정의 처사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부끄럽지 않은 것도 아니다. 자기 백성이 외교에 미칠 위험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자기 백성을 죽이려는 처사가 국가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대’가 명분이 되어 가치적으로 ‘옮음’으로 자리 잡은 사회에서 신국추의 주장은 그 자체로 명분을 거부하는 악이었다. ‘잘 모르는 시골 선비라서’라는 말로 유배형 정도로 정리한 정조의 생각이 어쩌면 당시 가치에서 벗어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모든 지식인들이나 위정자들은 그들 스스로 제후국으로서의 위치를 ‘상태’가 아닌 ‘당위’로 받아들였고, 이러한 당위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악으로 판단했다. 마치 현재 몇몇 지식인들이나 위정자들이 여전히 미국의 패권과 우월을 가치론적 ‘당위’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