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교양주의에 저항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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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는 신성과 세속, 초월과 일상을 맞바꾸었다. 이 계보의 한국 시인들은 이 지면을 그 명단으로 다 채워야 할 만큼 풍부하다. 현대시의 세속화 경향은 여러 가지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교양주의(내면의 지적, 정신적 성장을 절대적 가치로 추구하는 태도) 문학이 여태껏 취급하지 않았던 비시적인 소재가 시의 엄연한 주제로 등극한 사실이다.

2018년『시와 반시』로 등단한 박윤우는 첫 시집『저 달, 발꿈치가 없다』(시와반시, 2020)로 이 계보 끄트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가 이 계보의 조직원이라는 것은「똥」이나「빤쓰」 같은 제목만 보고도 알아챌 수 있다. “누가 덜어 논 무게일까요”라고 능청스럽게 시작하는 앞의 시는 구린내가 나니까 생략하자. 대신 “엄마 따라 빤쓰를 사러 갔다”는 변변찮은 첫 구절로 시작해서, “나는 소망한다 엄마 몰래 간절히 소망한다 지구가 하루 한 번씩 자전하듯이 하루 한 장씩 갈아입을 빤스를”이라는 염원으로 끝나는 후자에 집중하자.

‘빤스’는 박윤우가 동명의 시 속에서 “대관절 빤쓰란 무엇인가?”라고 엄숙하게 물을 만큼 고귀한 시적 주제가 될 수 있는가?「이 한국문학사」에서 “지극히 시시한 발견이 나를 즐겁게 하는 야밤이 있다”, “또 내가 ‘시시한’ 발견의 편집광이라는 것도 안다”라고 고백했던 김수영이라면 ‘그렇다’라고 심드렁히 대꾸할 것이다. 시시한 것에서 시가 나온다는 현대시의 발생 원리가 생겨난지도 오래됐기 때문이다. 교양주의 따위는 엿 먹으라고 “좆대강”(「거대한 뿌리」) 같은 비속어를 대차게 썼던 김수영이 같은 제목의 시를 썼다면 명품이 나왔음직하다.

김수영은 쓰지 않았지만, 적어도 두 명의 계보원이 그것에 대해 썼다. 오규원의「죽고 난 뒤의 팬티」와 김영승의「반성 79」가 그것이다. 오규원은 택시가 과속으로 달리자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골똘하게 생각한다. 행여 죽고 난 뒤에 자신이 입고 있던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또 김영승은 “아내가 내 빤스를 입고” 나가는 바람에, 팬티 없이 지내야 하는 백수의 서글픔을 과장되게 묘사하고 있다. 이들이 ‘빤쓰’ 같은 비시적인 소재를 애호하는 것은 신성의 상실이나 초월의 거부와 관련 있다. 그와 반대로 이들은 세속을 껴안기로 했다.

비시적인 소재로 시를 쓰는 세속파는 종종 벼룩시장에서 시간을 보냈다던 초현실주의 예술가 앙드레 브르통의 일화를 떠올려준다. 그는 벼룩시장에서 오늘날 크레이트 디깅(crate digging, 중고가게에서 희귀한 음반을 건지는 일)이라고 불리는 것과 유사한 일을 했다. 자신이 예술가일뿐 아니라 혁명가라고 생각했던 그는 모든 방면에서 사회의 기대를 뒤집어엎고, 무시당하는 것을 끄집어 올려 어둠 속에서 나오게 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데이먼 크루코프스키는 브르통이 벼룩시장을 헤집는 일은 “권력이 거부한 것을 되찾는 행위”와 같다면서, “주변적인 것, 거부당한 것, 억압된 것은 권력을 가진 쪽이 현시점에서 쓸모없다고 판정한 모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예술에, 사회에, 권력 자체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의 열쇠이지 않을까요?”라고 반문한다. 박윤우에게「위대한 농담」이라는 시를 안겨주기도 한 마르셀 뒤샹의 <샘>은, 이 방법론에 따라 출현한 가장 통쾌한 예술작품일 것이다.

『저 달, 발꿈치가 없다』에서 인간은 사물화되어 있거나 동물과 같은 지위로 떨어져 있고(「풍경B」등), 사물이나 동물은 의인화(「어떤 4월」등)되어 있다. 이런 전도는 신성과 초월을 방기하고 세속을 껴안기로 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벌이다. 무엇인가를 껴안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가진 부정성마저 껴안는 것인데, 시인이 그 진정한 의미에 따라 세속의 부정성을 껴안고자 할 때 아이러니와 풍자와 자학이 신음처럼 쏟아진다. 그런 끝에 시인은 소진된다. “잔량이 바닥 난 나”(「발이 시린 날」) 일상적이라고 해서 개인의 문제에만 잡혀 있을 수는 없다. 시인은 세속의 기쁨과 슬픔의 구조를 좀 더 용맹하게 파고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