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경의 인권 돋보기] 스스로 인권 향상을 포기하는 의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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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의사들이 다시 가운을 벗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문을 닫고 진료도 거부하겠다고 합니다. 이유는 전 국민이 아는 바와 같이 의료 인력 증원에 반대하기 때문이죠. 일반 국민들이 선뜻 납득하기 쉽지 않은 논리입니다.

며칠 전부터 코가 맹맹하고 두통이 심하더니 급기야 열이 39도를 넘겼습니다. 밤새 앓다가 9시 30분 진료가 시작되자마자 집 근처 이비인후과로 향했습니다. 9시 40분 도착해 받아 든 대기표 숫자는 23번이었고, 2시간 가까이 기다려 받은 진료는 2~3분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대한민국 의료체제에 불만이 있냐고요? 전혀 없습니다.

외국과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 의료체제는 정말 만족도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바이지만, 오랜 역사에 잘 가다듬어진 의료보장체제와 의료복지제도는 유럽 복지국가 수준에 버금감에도 불구하고 가성비는 훨씬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의료진의 수준은 노벨의학상만 나오지 않았을 뿐, 대한민국 의료인의 기술 역시 세계 수준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들의 서비스는 어떠한가요? 물론 2~3분 번개 진료이긴 하지만, 내가 만나본 의료진 중 ‘저저 인성꼬락서니 하곤’하는 생각이 든 의료진은 1~2명 정도? 특히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피곤에 지치고 잠이 부족해 좀비처럼 밤을 버티며,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을 볼땐 이 늦은 밤 나까지 아파 여기 누워 있으니 죄송한 마음까지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의사 인력 증원을 반대하며 가운을 벗어던지고 피켓을 드는 의료진의 행위가 반복될 때마다 그들의 편을 도저히 들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의료진의 직업적 역할에 대한 의무 문제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의료행위를 해서 돈을 버는 의료 노동자에 그치지 않습니다. 진료라는 행위로 국민에게 전달되는 것은 국민의 건강권 보장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생명권의 보장이 될 수 있겠죠.

물론, 의료종사자라는 직업이 국가공무원도 아니고, 앞서 언급한 헌법 10조를 이행할 의무자에 해당하는지는 굉장히 섬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요. 공공서비스 분야에 직업군이 속해 있는 자들은 한 번 쯤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군가는 ‘의사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데! 당연한 의무가 아닌가!’라고 문제제기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노동에 대한 당연한 대가를 받는 것과 이것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노동의 대가에 숨어 있는 직업적 책임감에 대해 한 번 더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것이죠.

두 번째, 의료진 스스로의 노동권 보장을 위해서입니다. 문과 출신이라, 의약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주변에 많진 않지만, 그들의 노동 환경의 질은 그다지 높아보이지는 않습니다. 2019년 국가인권위가 실시한 ‘의과대학 학생들의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 10명 중 5명이 ‘언어폭력’을 경험했으며, 16%가 ‘단체기합 등 신체적 폭력’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여학생의 37.4%가 ‘성희롱’을, 여학생의 72.8%가 ‘성차별적 발언’을 경험했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인권위는 2016년 ‘보건의료분야 여성종사자 인권 개선방안’을 보건복지부와 노동부에 권고한 바 있고, 2017년 한 대학교 병원 전공의 폭행사건에 대해 직권조사를 실시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수치로 나타나는 것 외에도 의료진에게 필요한 노동과 관련한 권리는 많아보입니다.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 그들의 인간적 존엄권부터 시작해 수련의나 전공의가 된다 해도 그닥 나아지지는 않아 보입니다. 앞서도 언급했듯 하루 종일 환자를 마주해야하든, 종합병원 응급실에 밤새 있는 의료진들에게 휴식권 보장 역시 요원해보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없어 쉬지도 못하고,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면서 노동을 이행해야하는 그들이 의대 정원 증원을 반대한다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사직’을 선언했지만, 이마저도 국민 동의를 구하기란 (롯데의 팬으로서) 롯데자이언츠가 올해 한국시리즈의 우승컵을 거머쥘 수 있다는 믿음 만큼 요원해 보입니다.

1948년에 채택된 <세계인권> 제25조에는 “모든 사람이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복지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와, 실업이나 질병, 장애, 배우자의 사망, 노령 또는 기타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인한 생계 결핍에 대한 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국제협약에서는 ‘건강에 대한 권리’를 명시해두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헌법에서는 의료진의 노동권과 존엄권, 국민들의 건강권을 규정한 조항은 없습니다. 헌법 제35조에서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고, 헌법 10조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두고 있어, 국민 건강권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끌어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헌법 개정논의가 이제 스믈스믈 시작된지 한참 되었습니다. 이제는 국민 건강권 보호가 단순히 포괄적, 지향적, 선언적 명제가 아닌 구체적 명제로 포함되었으면 합니다. 국민 건강과 생명 보호야 말로 국가의 당연한 책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니까요. 더불어 의료진 노동권 역시 철저하게 보장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쉴 수 있도록, 좋은 진료를 할 수 있도록, 파업을 하더라도,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데 일말의 차질이 없도록 말입니다.

교권과 학생인권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이 행복하다고들 합니다. 또, 가정에서도 부모가 행복해야 자녀들이 행복하다는 말을 합니다. 의료진과 환자 관계에서도 의료진이 행복해야 환자 역시 행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건강하게, 노동권이 철저히 보장되는 의료 환경이 환자 건강과 생명을 담보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요? 의료진 수를 늘리는 것 역시 그 방법의 하나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박민경 <사람이 사는 미술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