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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광장을 뜨겁게 채웠다. 함께 ‘일상의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들에게, 윤석열 파면은 위로와 안도를 줬다. 광장에서의 조우를 계기로 만남을 이어오던 사람들에게도 일상은 찾아왔다. 머리를 질끈 묶었던 이는 헤어스타일을 새롭게 가꾸었다. 편한 옷을 입고 광장을 찾던 이들도 일상의 옷매무새를 갖추었다. 일상을 찾은 대구의 광장, 사람들이 스쳐 간다. 그 거리를 지나가다 문득, 지난겨울의 그 많은 사람의 모습, 그 많은 외침이 현기증처럼 짧게 뇌리를 스친다. 어떻게든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 그리고 광장의 아우성이 사그라든 고요한 거리가 주는 왠지 모를 헛헛한 마음이 뒤섞였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장에 올라갔을 때, 그 헛헛한 마음의 출처를 깨달았다. 지난 21일, 박정혜 한국옵티칼 해고노동자가 499일째 고공농성을 이어온 그 옥상에 크레인을 타고 올라갔다. 2024년 1월 박정혜 씨가 공장에 오르던 그날부터 줄곧 지상에서 바라만 봤었다. 처음 발 디딘 옥상, 하루 종일 뜨거운 햇볕을 빨아들인 우레탄 재질의 바닥이 저녁 늦게까지 열을 뿜어냈다. 그 열기는 인근 아파트 빌딩과 하천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섞여, 정혜 씨 이마에 땀방울로 맺혔다.
정혜 씨가 말했다. 다시 찾아올 여름의 옥상이 까마득하다고,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가 일상으로 빠져나가면 고요하고 적막하다고,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작은 광장이 비어 있는 것을 볼 때 헛헛함을 느낀다고 했다. 123일 동안의 필사적인 몸짓이 있었다. 여전히 변한 것 없는 이 옥상에서 세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 그 몸짓조차도 혹시 신기루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광장에 나선 사람들이 윤석열을 파면하고 조기 대선을 이끌어냈지만, 정작 대선에서 이들의 요구는 끊임없이 ‘다음에’란 말 뒤로 밀려나고 있다. 광장에서 나온 사회 개혁의 목소리가 차지해야 할 대선 토론회에서는 ‘원조 보수’ 경쟁만 치열하다. 저 자리에서 작지만 또렷하게 광장의 목소리를 이어오는 한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도 헛헛한 마음이 숨 막힐 듯한 답답함으로, 그리고 비참함으로 바뀌었으리라.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를 찾은 유일한 후보다. 한국옵티칼 고공농성 499일, 그는 물망초 화분을 양손에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온몸으로 정혜 씨를 위로했다. 그렇게 권영국은 이번 대선 선거 운동 내내 광장의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앞장서서 까마득한 고난의 길로 나서는 그가 참 한결같다고 느꼈다.

2016년 용산참사 진압 책임자 김석기 국회의원이 경주에서 후보자로 출마했을 당시, 권영국의 선거운동을 밀착취재 했다. 권영국은 2016년, 2020년 총선에 출마하면서 끈질기게 김석기의 책임을 물었다. 그러는 동안 아예 경주에 터를 잡은 권영국은 경주를 기반으로 경북노동인권센터를 설립해 지역 문제와 노동 문제에 두 팔 걷고 나섰다. 권영국은 “사회운동과 제도 정치가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며, 지역에서 누구도 나서지 않은 어려운 길에 앞장섰다.
그 후로도 권영국은 지역에서, 그리고 노동자의 곁에서, 또 차별받고 배제되는 여러 소수자 옆에서 ‘꼿꼿하게’ 자리를 지켰다. <뉴스민>에는 그가 함께한 아픔의 현장 일부가 기록돼 있다. 포스코 산재 피해자들과 함께하며 포스코를 비판하다가 포스코로부터 2억 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받았다. 동국제강 산재 사망사고 문제 해결 지원에 나섰고, 코로나19 의료공백 속에서 사망한 정유엽 씨의 유가족과 함께했다. 아사히글라스 부당해고 투쟁에 꾸준히 힘을 보탰고, 삼평리 송전탑 공사 강행 현장에서, 사드 반대 투쟁 현장에서 주민들을 위로했다.
매사 어려운 길에 앞장선 권영국은 혼자 앞장선만큼 고독하지 않을까. 하지만 23일 TV토론회로 향하는 모습에서 그가 항상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왔다고 생각하게 됐다. 토론회 규칙상 토론장에 나서는 후보 수행원은 10명을 편성할 수 있었다. 그 10명 중 한 자리를 한국옵티칼 해고자 최현환 지회장이 차지했다. 남은 자리는 SPC 노조파괴에 맞선 임종린, 0.3평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유최안, 혜화동 성당 종탑에 올라 탈시설 권리를 외친 민푸름의 자리였다.
권영국의 도전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한강 작가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고 물었고, 지난 광장에서 한 농민은 “죽은 자가 산 자의 길을 열었다고 믿었다”고 답했다. 과거 우리는 광장에서 윤석열 퇴진 이후 우리의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그 목소리가 흩어진 듯 보이겠지만, 과거가 현재를 구했듯, 또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과 함께할 것이라 믿는다. 여전히 우리 목소리를 기억하고 행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거리에서 고립돼 손을 내미는 이들에게, 그때 광장에서 함께 한 우리가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걸 보여주자.
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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