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OUT’ 현수막 아래 책방 향하는 혐오···“그래도 이해와 아량”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는 '항의' 유형
직접적 항의보단 익명적으로
서부지법 사태처럼, 물리적 폭력 경향도 증가
"소송부터 하는 것도 극단적 사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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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북성로 주변은 역사와 오늘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대구근대역사관,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이 있고, 오래된 공구 골목이 있다. 관광객의 관심을 끌어오는 팬시숍도 있다. 어르신들이 문화를 소비하는 향촌동이 있고, 힙한 카페와 술집도 즐비하다. 다양한 세대와 역사가 만나는 이 교차로에 공간7549 건물이 서 있다. 공간7549에는 이 공간에 긴장감을 걸어주는 현수막 하나가 걸려 있다. “내란세력 OUT! 박정희 동상 OUT!”

이 현수막은 윤석열 12.3 내란 사태 직후 붙은 것이다. 그 이전까지 걸려있던 현수막에는 ‘독재자 박정희 동상 철거하라! 홍준표 사퇴하라!’라고 쓰여 있었다. 현수막 문구는 꾸준히 바뀌지만, 공통적인 키워드는 ‘박정희’다. 공간7549는 왜 꾸준히 이 거리에 ‘박정희’라는 화두를 던지는 것일까.

7549. 박정희 정권이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해 사법살인을 자행한 날인 1975년 4월 9일을 의미한다. 인혁당 사건 피해 유족들이 기금을 마련해 건물을 매입했고, 이곳의 이름을 공간7549로 지었다. 공간7549에는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를 비롯해, 대구참여연대, 동네책방 모디 등이 입주해 있다.

동네책방 모디는 ‘박정희 현수막’이 걸리고부터 뜻밖의 일을 겪게 됐다. 공간7549 1층에 있어서인지, 현수막 내용에 항의하는 행인이나 지역민들이 화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례가 이어진 것이다. 김채원(57) 동네책방 모디 책방지기는 항의를 받으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과 꾸준히 대화했다. 어느 한쪽이 설득되는 일은 없었지만, 대화 그 자체는 적어도 상대방의 의사는 인정하는 힘이 있었다.

시비(?)는 줄곧 있었지만, 최근 동네책방 모디는 다소 위협적인 상황을 겪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난달 26일 밤 9시경에는 웬 중년 남성이 책방에 들어서더니 욕설을 속사포처럼 내뱉고 급히 사라졌다. 최근 들어 책방 앞 화분을 누군가가 부숴 놓거나, 입간판을 누군가가 밟아 쓰러트린 적도 있었다.

▲동네책방 모디 입구에 있던 화분이 파손된 채로 방치돼 있다. (사진 제공=김채원)

과거의 항의는 입씨름 수준의 논쟁이었는데 이제는 점차 일방적 욕설이나 적대적이고 물리적 행위로 이어진다고 여겨졌다. 난감한 상황, 채원 씨는 대응을 고민했다. 점차 정도를 더해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민을 거듭하던 채원 씨는 새로운 안내문을 붙이기로 했다. 화가 나시더라도 물건 부수지는 마시고 들어와 시원한 차 한잔하고 가시라는 취지로.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는 ‘항의’ 유형
직접적 항의보단 익명적으로
서부지법 사태처럼, 물리적 폭력 경향도 증가
“소송부터 하는 것도 극단적 사회상”

“비상계엄 선포 이후 12월~1월까지는 문 열면서 ‘민주당 놈들!’이러는 분들이 많았고요. 윤석열 파면 이후에는 조금 잦아들었다가, 대선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이재명 당시 후보 욕을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대선 이후 지금은 점점 직접 항의를 하러 오시는 분들보다는 밖에서 욕하고 가시거나, 소리만 치고 빨리 가는 경우도 있고, 최근처럼 밤에 애꿎은 물건을 파손하는 사례가 늘었죠. 할 말은 없는데 점점 더 혐오만 남아 가는 거 같아요.”

정치와 미디어가 일부 시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탓일까. 채원 씨는 정치 상황에 따라 ‘박정희 현수막’을 향한 항의 반응의 경향도 달라진다고 여겼다. 최근 ‘서부지법 난동 사태’처럼 현수막에 대한 반응도 점차 물리적이고 적대적인 양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점차 대결적인 분위기가 만연해가는 거 같아요. 그건 정치적 진영을 떠나 혐오하고 대척하는 분위기가 짙어가는 거 같아요. 특히 정치적 의제에 대해서는 평소에 좋은 관계였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갑자기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하거나,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늘고 있는 거 같아요. 정치 팬덤화가 심화되면서 보이는 현상 같고요. 그 전형적 사례가 바로 12.3 내란이죠.”

채원 씨는 홍준표 전 시장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박정희를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박정희 동상을 동대구역에 ‘던져놓고’ 관심과 지지를 끌어낸 뒤, 논란과 갈등은 지역사회에 떠넘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동상은 지역사회 갈등을 부추겼다.

박정희 기념사업 조례 폐지를 청원하는 시민들이 1만 명을 넘겼고, 이와 별개로 국가철도공단이 대구시를 상대로 박정희 동상 설치의 위법성을 확인하기 위한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인들이 원하는 ‘갈등’ 말고, 채원 씨는 조금 더 서로 이해하고 혐오하지 않는 일상이 되기를 바란다.

“사소한 인정과 환대, 여기에 우리 사회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서부지법 사태에서 보듯 일부 극우적인 사람들이 곳곳에 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보편적 상식과 도덕감을 갖고 살아가고요. 많은 분들이 신고하라는 조언도 해주셨는데, 분명히 선의로 해주시는 말들이라 감사하죠. 또 한편으로는 ‘그놈의 대구가 문제다’라는 반응도 있어서 고민스러워요. 워낙 대구 혐오가 심각하다 보니까, 대구 관련한 이야기만 나와도 욕하고 보는 경향도 있거든요. 사실이 아니기도 하고,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말이죠.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구에도 문제는 있고, 그런 문제를 낙관적인 태도로 꾸준하게 바꿔가려는 사람도 대구에 있어요. 그런 태도가 중요하죠. 대구에 대한 자조나 혐오에는 아무런 긍정적인 힘이 없는 것 같아요.”

▲동네책방 모디 입구에 박정희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