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 100호-성, 더듬어 읽기] 트랜스젠더, 혹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루인

19:58

[편집자 주=이 글은 계간 <삶이 보이는 창> 100호(2014.9.24)에 실린 글입니다. 뉴스민은 <삶이 보이는 창>과 컨텐츠 제휴를 맺고, 필자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트랜스젠더, 혹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에서 공부하고 있고,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에서 자료에 파묻혀 지내는 걸 좋아한다.

흔히 외모가 좀 ‘끔찍’하거나 태도와 행실이 사악한 인물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부른다. 프랑켄슈타인은 얼굴에 수술 자국이 선명한 괴력의 악인, 추하고 험한 외모의 인물을 대표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리하여 프랑켄슈타인은 드라큘라, 좀비 등과 함께 사악하고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 기이한 형상이나 기괴한 모습 등을 상징한다. 때때로 마주치기 전에 도망쳐야 할 존재, 외모만으로 공포를 유발하는 존재, 즉 피하고 외면해야 할 존재로도 묘사된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출처인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프랑켄슈타인은 흔히 말하는 ‘악당’이 아니며 괴물이 아니다.

소설을 기준으로 하면 프랑켄슈타인은 당시 맥락에서 과학자며 부유한 집안의 유약하고 선한 사람이다. 지금 널리 알고 있는 프랑켄슈타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럼 왜? 흔히 알고 있는 괴물 프랑켄슈타인은 소설 속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다. 소설 속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우연히 생명을 창조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시체에서 모든 다양한 기관, 피부, 조직을 땜질하고 바느질하며 새로운 생명을 만들었다. 땜질한 흔적, 솔기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모습으로 탄생한 피조물이 지금 흔히 말하는 괴물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럼 그 괴물의 이름을 부르면 될 것을 왜 과학자의 이름 프랑켄슈타인을 괴물의 이름으로 사용할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괴물에겐 이름이 없다. 소설에서 그는 괴물이나 피조물과 같은 명칭으로만 불렸다.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눈을 뜬 순간부터 너무 끔찍해서 그 존재를 거부했고, 그에게서 달아났고, 그를 버렸다. 그 이후로도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괴물이나 피조물로 부를 뿐 별도의 이름을 부여하진 않았다. 샤모니 언덕에서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오랜만에 조우했을 때, 괴물은 과학자가 자신을 버린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 긴 시간에 걸쳐 이야기한다. 그러고 나서 괴물은 평생 함께 할 파트너, 외모가 끔찍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거부하지 않도록 자신과 닮은 외모의 동반자를 만들어 달라고 프랑켄슈타인에게 요구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켄슈타인은 단 한 번도 괴물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름을 붙일 시도도 하지 않았고 이름을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는 듯.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직접 읽는다면 사람마다 감정이입하는 인물이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름 없는 존재, 그래서 부를 수도 없는 존재인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부르고 악인의 대명사로 사용하는 현재의 경향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트랜스젠더인 나는 이름 없는 괴물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책을 읽었다. 괴물의 말을 들으며 때때로 울기도 했다. 괴물이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에게 했던 말은 트랜스젠더인 내가 이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괴물의 경험은 트랜스젠더의 경험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트랜스젠더는 어떤 모습일까? 연예인 하리수 씨 같은 트랜스 여성이라면 성전환 수술을 완벽히 해서 겉모습으로는 남성인지 전혀 알 수 없고 ‘여자보다 예쁜’ 사람 정도? 트랜스 남성이라면 남성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는 사람? 이것은 방송에서 재현하는 트랜스젠더의 모습이다. 방송에 등장하거나 방송에서 재현하는 트랜스젠더의 모습은 다양한 트랜스젠더의 모습 중 극히 일부다. 방송에서 재현하는 모습이 트랜스젠더의 삶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방송에 출연한 출연자의 삶이며, 그 사람과 공감하는 다른 트랜스젠더가 있다고 해서 그 삶이 보편적이거나 유일한 삶의 모습은 아니다. 그럼에도 트랜스 여성은 여성스럽고 예쁘며, 트랜스 남성은 상남자일 것이란 상상 혹은 밑절미 삼아 이야기를 해보자. 이것이 현재 거의 유일하게 수용되는 트랜스젠더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현재 예쁘거나 상남자 스타일이라고 해도 트랜스 여성이 처음부터 여성스럽긴 어렵고 트랜스 남성이 처음부터 남성스럽긴 어렵다. 예쁜 트랜스 여성도 남성스러운 트랜스 남성도 그 외모를 갖추는 데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트랜스 여성을 예로 들 경우, 호르몬 투여를 해 외모가 조금씩 변하면 여성의 복장을 조심스럽게 시도한다. 외모가 변한다고 해도 확연하게 변하는 경우보다 미묘하게 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얼굴 성형(혹은 얼굴 성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다소 젠더가 모호한 모습으로만 변한다. 호르몬 투여 기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몸의 형태를 바꾸기 위한 몇 가지 수술을 진행한다. 이 과정, 호르몬 투여를 시작해서 수술을 어느 정도 끝내고 자신이 원하는 성별의 몸을 어느 정도 갖추기까지 최소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몸이 변해가는 긴 시간 동안 트랜스젠더는 타인에게 괴물스런 존재로 인식된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지하철이나 화장실 같은 공공장소에서 성별이 모호한 사람을 만난 경우 말이다. 화장실에서 조우했다면 ‘내가 화장실을 잘못 들어왔나’라며 흠칫 놀라 나갔다가 다시 들어갔을 것이다. 화장실이나 지하철 등 여러 공공장소에서라면 ‘쟨 도대체 뭐냐’란 기분으로 빤히 바라봤을 수도 있다. 성별이 모호한 외모면 모두 트랜스젠더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별이 모호한 외모의 사람을 마주할 때,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마주할 때, 그 사람의 성별을 확인하려 드는 태도가 공공연히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정말이지 괴물이라도 본 듯 무례할 정도로 상대방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남성인지 여성인지 확인하려 든다.

그리고 어떻게든 결론을 내리면 그제야 신경을 끈다. 이것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상대방의 성별을 확정하면 그 사람과 관련한 어떤 정보를 알 수 있을까. 여성인지 남성인지 확정하고자 하는 태도는 그것이 한 사람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보가 알려주는 실질적 내용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남자는 이러이러할 것이고 여자는 저러저러할 것이며 남자는 이러이러해야 하고 여자는 저러저러해야 한다는 자신의 통념만 확인시켜줄 뿐이다. 성별을 확인하는 행위가 그 사람의 성격, 취미, 생활양식 등의 정보를 알려주진 않는다.

아울러 어떻게든 성별을 확정해야 안심이 들 때, 그 안심은 어떤 걸까? 다르게 말해서 성별이 모호한 외모인 사람은 어떤 불안을 야기할까? 방송에서 주로 재현하는 트랜스젠더가 예쁜 트랜스 여성이거나 상남자 트랜스 남성인 이유는 어쩌면 성별이 모호한 상태가 야기하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불안을 자극하는 외모는 트랜스젠더를 사회적 괴물로 만든다. 사실 트랜스 여성이 예쁘거나 트랜스 남성이 상남자 외모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트랜스 여성을 예로 들면, 나처럼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말하는데 겉모습은 남자 같거나 성별은 뭔가 모호한데 예쁘지도 않고 어깨도 넓고 덩치도 큰 경우라면 이때부터는 정말 괴물이 된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느냐고? 몇몇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외모가 ‘험한’ 여성을 ‘프랑켄슈타인녀’란 별칭으로 부르곤 했다.

예쁘지 않은 트랜스 여성은 언제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로 취급된다. 소설 속 괴물은 자신의 외모만으로 많은 사람이 자신을 기피하고 달아났다고 했다. 이것은 적잖은 트랜스젠더가 일상에서 겪는 일이다. 특히 연애 관계를 시작하는 초기에, 스스로를 트랜스젠더라고 밝히면 일부는 개의치 않지만 또 일부는 파트너가 단지 트랜스젠더란 이유만으로 관계를 끝낸다. 그러니 괴물의 삶은 소설의 이야기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다. 그냥 지금을 살아가며 일상에서 빈번하게 겪는 일이다.

모호한 성별이 야기하는 불안은, 다시 그 불안의 토대를 탐문하지 않도록 만든다. 그것은 많은 경우 자신의 삶을 유지한 근본 토대를 무너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불안의 피상적 원인을 추방하고 비난하는 태도를 취한다. 불안을 야기하는 존재만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끔찍한’ 외모로 사회에서 추방되었다. 그 괴물의 성별 역시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음을 감안하면 사람들의 두려움은 단순히 겉모습의 문제는 아니었다. 트랜스젠더의 ‘모호한’ 외모나 성별은 그 자체로 불안을 야기하고 또 트랜스젠더를 괴물로 만든다. 성별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 간 위계적 권력 관계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를 괴물로 둔갑시키거나 사회의 적절한 구성원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장치다. 따지고 보면 성별이 모호하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키겠는가. 물론 사회 구조적으로는 문제를 일으키지만 트랜스젠더와 우연히 잠깐 조우하는 개개인의 삶에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별을 확인하려 든다. 성별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장치란 뜻이다. 이것을 평소에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 하든 실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괴물인 존재는 없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가 괴물을 만들 뿐이다. 그러니 내가 성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타인의 외모를 통해 성별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인식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