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5) 대공분실

18:11

[편집자 주=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류동인 씨가 기억하는 1987년의 기억을 매주 수, 목요일 연재합니다.]

차량이 와서 우리들을 대구동부경찰서로 데려갔다. 하지만 동부서는 우리를 조사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우리 집을 담당하던 안기부 조정관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이전에는 아버지를 담당하다가 언제부터인가 나까지 같이 담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형 X됐다.”
“와?”
“안기부로 갈 거 같다. 조정관 새끼 보인다.”

경찰서에서 기다리는 동안 동부서에서는 조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로 가서 조사를 받을 것 같았고, 그곳이 안기부가 아니기를 바랐다.

저녁이 되자 누군가가 와서 우리를 차에 태웠다. 나는 까만색 지프에 태워졌다. 차 안에서 눈이 가려졌다. 차량은 한참을 흔들리며 달려갔고, 어딘가에 도착했다. 눈이 가려져 감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차에서 내려 한 번 꺾어지는 계단을 오르고 문이 열리며 어딘가에 들어서서야 가려진 눈이 풀리면서 앞을 볼 수가 있었다. 들어온 철문을 등진 맞은편으로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길쭉하게 생긴 창문 두 개가 보였다.

▲현재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 중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 [사진=민주열사 박종철 기념사업회]

요즘 서울 대공분실이 소개될 때면 밖에서 보이는 건물의 오층에 길게 난 그런 창문이었다. 침대 하나와 욕조, 그리고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침대와 책상, 의자는 볼트로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방안의 빛이 밖으로 나간다기보다는 어둠이 밖으로부터 창문을 통해 공포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서울 대공분실은 당대의 천재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것이다. 쿵쿵 울리는 철제 나선형 계단, 빠져나갈 수 없는 창문의 구조, 마주 보지 않는 각 방의 배치, 노출된 욕실과 변기, 고정된 기물들, 철제 계단의 울림을 통해 공포를 자아내게 하고 회전식 계단으로 지향점을 상실시키며 노출된 욕조와 변기를 통해 심문받는 이를 벌거벗기는 배치를 만들어 내는 의도였다. 대공분실은 이렇게 설계된 것이었다. 대구 대공분실도 그것을 본뜬 것이었다.

대공분실은 천재와 군사파시즘이 만나며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거기로부터 많은 죽음이 생성됐다. 하지만 또 다른 천재들은 민주화 운동과 만나기도 한다. 이렇듯 어떤 배치가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들이 만들어지고 생성된다. 만물과 사람은 그것들의 배치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뻐꾹 뻐꾹”

긴 조사 끝에 날이 밝자 길쭉한 창으로 뻐꾸기 소리가 들어왔다. 그 소리조차 공포스러웠다.그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조사가 시작됐다. 길고 힘든 시간은 참으로 더디게도 흘렀다. 물은 것을 묻고 또 물었다. 볼펜으로 진술서를 16절지에 썼는데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조사를 마칠 때쯤에는 그렇게 쌓인 종이 높이가 30㎝가 훨씬 넘어 보였다. 어느덧 등 뒤로부터 빛이 서서히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왔다. 조사가 밤을 넘기고 새벽까지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조사는 잠시도 쉴 새 없이 진행됐다. 둘째 날 조사하던 수사관이 욕조에 물을 틀었다.

“야 목욕 좀 해라”

사실 잡혀 오기 바로 전에 시내에서 서점을 하던 선배의 배려(?)로 목욕비를 받아 대구에서 제법 유명한 사우나에 가서 3명이 같이 목욕을 해 별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목욕하는 동안 힘든 조사를 피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소중했다. 목욕을 마치자 수사관의 소리가 들려왔다.

“물은 빼지마래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물로 고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언어의 뜻은 상황과 연결돼 전혀 다르게 이해된다. 물을 빼지 말라는 그 말의 잉여적 의미가 섬뜩하게 피부로 와서 닿았다. 결국 그 물에, 나의 몸에서 나온 때가 둥둥 떠다니던 그 물에 머리가 처박혔다.

당시에는 내가 물에 대해 매우 자신 있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청년 때에는 물속에 약 3분 가까이 숨을 멈추고 있을 수가 있었다. 자랑삼아 풀장 끝에서 끝까지 잠수로 다니곤 했었다. 수건을 씌우고 위에서 주전자로 물을 붓는 물고문 말고는 대체로는 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물을 마시게 된다. 욕조에 머리가 박히는 시간은 고작 10초에서 20초 사이다. 하지만 몰려온 공포가 물을 들이켜도록 하고 물이 기도로 넘어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극대화된다. 익사에 대한 공포였다.

▲대공분실에서는 물고문이 이뤄졌다. [사진=영화 ‘남영동 1985’ 스틸컷]

욕조에 머리가 박히자 숨을 참았다. 그리고 머리를 꺼내면 물을 먹은 척 캑캑거리며 쇼를 해댔다. 고문하던 자가 이근안처럼 숙련된 이가 아닌지 다행히도 속는 것 같았다. 고문을 통해 묻는 것은 이 사건과 3명의 선배와 관계를 대라는 것이었다.

K, S, S선배가 그들이다. 그 중 한 선배는 지금 성주와 소성리 문제 때문에 소원해지기는 했지만 사드 반대를 위해 열심히 투쟁 중이다. 제법 긴 시간 물고문이 진행됐다. 그리고 책상에 앉게 한 후 그 선배들과 관계가 나오지 않으면 고문이 다시 시작됐다. 나의 머리는 살아야 한다는 본능같은 것으로 야비하리 만치 빨리 돌아갔다. 이 상황을 보면 분명 고통속 쾌락처럼 공포와 코미디 또한 공존한다. ‘주이상스’(Jouissance, 프랑스어로 고통 속의 쾌락을 뜻한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선배들과 사건의 관계를 불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나를 고문한 수사관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강봉이 경사라는 인간이다. 4명이 한조를 이루고 3명이 3교대로 24시간 조사하고, 1명은 조사한 내용을 어디론가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조사하는 3명 또한 때리고 고문하는 놈, 살살 달래는 놈 등 역할이 구분돼 있었다.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는 동안 우리에 대한 면회는 금지됐다. 3일째 되는 날 아버지가 시경국장(지금의 대구지방경찰청장)에게 항의하고 협박해서 면회를 왔다. 아버지는 시경국장에게 우리아들 면회시켜주지 않으면 외신기자들 불러다 놓고 고문하고 있다고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했단다.

사실 아버지는 내가 고문당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결국 시경국장과 아버지가 같이 왔다. 면회도 조사받던 대공분실이 아니라 대구 범어로터리에 있던 뉴영남호텔 커피숍에서 이루어졌다. 아버지가 물어왔다.

“괜찮나?”
“예”

물은 먹지 않았지만, 고문으로 주눅이 들고 아버지가 걱정할까봐 아버지의 물음에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아버지 면회 이후 여전히 잠은 재우지 않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물고문이나 구타는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면회가 커다란 위로가 됐다. 공범 중 나와 다른 1명은 사전에 만들었던 시나리오대로 알리바이를 잘 맞추었다. 그런데 1명이 그것을 잘 외우지 못했던지 2명과 삑사리가 났다. 결국 수사관들이 다른 이들이 써놓은 진술서를 들고 와서 서로 맞추어 쓰라고 했다.

읽어보니 별문제가 없었다. 최종 진술서 작성이 끝나자 침대에 누워서 잠시 자라고 했다. 4박 5일을 한잠도 자지 못했던 몸은 아무리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이 잠을 잊어버린 듯했다.

이후 수성경찰서 유치장으로 넘어가 보름을 더 보냈다. 낮에는 대공분실로 출근(?)해서 조사를 더 받고 밤에는 유치장에 와서 잤다. 20일간 조사 기간이 지나고 우리는 교도소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