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는다” /이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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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7월 중순 어느 한때에 일본의 배우 모리시게 히사야는 중국 사평가역의 플랫폼에 서 있었다. 중국 대련을 거쳐서 도착하는 자신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그는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던 만주전신전화주식회사 건물을 몰래 빠져나온 참이었다. 그의 아내와 아이는 ‘아시아’라는 당시 일제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가 자랑했던 대륙특급 열차를 타고 왔다. 1934년 11월에 운행을 시작한 특급 열차였다. 바퀴 지름만 해도 2m에 달했던 거대한 증기기관차가 여섯 량의 객차를 이끌고 시속 100km로 대련과 장춘 구간을 오갔다.

식당차와 전망차가 딸린 호화로운 이 열차를 돋보이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전 객차에 설치된 에어컨이었다. 이 신형 열차에 처음 시승한 영국 사절단은 에어컨 성능을 자랑하는 기술자의 시연에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에어컨은 1902년 미국인 윌리스 캐리어가 발명했고, 1920년대에 비로소 일반 주택이나 공공건물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1930년대만 해도 에어컨이 설치된 열차는 세간의 주목을 끌만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특급 열차 ‘아시아’에 도입한 이 신기술은 7월 만주의 불볕더위와 완전히 분리된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써,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여행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기술 혁명’이 고도경제성장과 궤를 같이하는 일제의 만주침략이라는 어두운 현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말하자면, 특급 열차 ‘아시아’의 에어컨은 소위 ‘내지인’에게 쾌적한 만주 여행을 선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문명의 편리성은 일제의 팽창정책을 뒷받침했던 개발과 성장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올해에 ‘소각: 화석 연료 소비의 세계사’라는 책을 저술한 사이먼 피라니는 오늘날 집집마다 보급된 에어컨이야말로 화석 연료 문명의 상징으로 지구의 환경 재앙을 앞당기는 주범 중 하나라고 지목한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기술 문명의 발전은 인간이 마치 자연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올여름 두려운 폭염을 경험하면서 ‘기후 변화’에 대한 경고들로 세계는 떠들썩했지만, 이곳 한국은 에어컨 사용으로 인한 ‘전기료 상승’ 문제만이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당장 나부터 위험하게 느껴진 살인적인 더위의 한복판에서 환경문제를 생각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배고픈 이를 앞에 두고 기아의 의미에 대한 긴 설교를 늘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피라니처럼 화석 연료의 재앙을 경고하는 이들이 화석 연료의 사용을 규제해야 한다고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실감 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올여름 지구를 생각해서 며칠을 참던 이들조차 결국 폭염을 이기지 못하고 에어컨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책은 분명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환경 재앙을 막는 문제는 분명 개인의 결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정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피라니는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화석 연료의 사용량이 증가하게 된 것은 시장주의라는 명목으로 정부의 규제가 느슨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한때 정부의 기능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시장 만능주의자들은 화석 연료의 소비도 시장의 법칙에 따라 조정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결과는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자연의 복수이다.

얼마 전 엄청난 태풍과 허리케인이 일본 열도와 미국을 강타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초유의 태풍이 필리핀과 홍콩을 초토화하고 있다. 미국의 요세미티 공원이 불타고, 한국의 지리산에 자라는 구상나무들이 기후 변화로 인해 말라죽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 개개인은 눈앞에 닥친 ‘전기세 인하’ 이외에 다른 논의를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개인의 힘으로 전체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개인이 자신의 한계를 뚫고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집단의 정치밖에 없다. 비단 폭염뿐이겠는가. 하늘 모르고 치솟는 주택 시세 역시도 어슷비슷하다. 소득과 인구가 동시에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먹고 입고 자는 기본 생존권 자체가 파괴되는 상황이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장의 방임이 아니라, 현명한 규제를 통한 근본적인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제 개발과 성장이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케인스가 일찍이 말했듯이,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중요한 것은 장기적 계획이랍시고 마냥 대책을 무기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지금이라도 당장 팔을 걷어붙이는 용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