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여자에게 필요한 게 사랑뿐? 지긋지긋”, ‘작은 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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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1832~1888)의 자전적 소설 <작은 아씨들>은 150년 넘게 사랑받고 있는 고전이다. 전 세계 55개 언어로 번역돼 수천만 권이 판매되고, 10대의 대표 필독서로 꼽힌다. 특히 미국에서는 교과과정에 빠짐없이 다뤄지고 있다.

<작은 아씨들>은 1933년 처음 영화화된 후 거의 10년마다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고 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이 연출한 <작은 아씨들>은 무려 8번째 영화화다. 영화 개봉에 맞춰 동명의 소설은 2월 첫 주 예스24 소설·시·희곡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2만 부 팔렸는데 구매자 80%가 여성이다.

소설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는 꿈 많은 네 자매의 유년시절을 다루고, 2부는 네 자매가 성인이 되면서 겪는 삭막한 현실을 그린다. 각자 배우·작가·음악가·화가를 꿈꾸던 말괄량이 천방지축 유년시절과 여성이라는 이유 등으로 벽에 막혀 현실에 수긍하는 네 자매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은 아씨들>은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각색상·의상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의상상을 받았다. 제7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의상상을 비롯해 제25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각색상), 제54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감독상, 여우조연상), 제32회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여우조연상, 각색상, 음악상, 의상상)을 휩쓸었다.

영화에 대한 극찬은 수없이 각색돼 식상해진 <작은 아씨들>을 탁월하게 재조립된 데 따른 것이다. 영화는 원작의 뼈대를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시각으로 각색됐다. 1860년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매사추세츠주(州)의 콩코드에서 자라는 네 자매 메그(엠마 왓슨)·조(시얼샤 로넌)·베스(엘리자 스캔런)·에이미(플로렌스 퓨)의 성장기는 미국의 오랜 정신인 청교도적 가치를 비춘다. 여기에서 21세기적 관점이 녹아들어 새로운 시대정신과 절묘하게 연결된다.

부딪힐 것 같은 오래된 가치와 현대의 문제의식은 교착되어 삶을 관통한다. 영화에서 조가 “여자에게도 마음과 영혼이 있어. 야망도 있고 재능도 아름다움도 있어. 여자에게 필요한 게 사랑뿐이라고 말하는 건 지긋지긋해”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원작에는 없지만 루이자 메이 올컷의 다른 소설에서 나온다. “사랑이 여자가 추구할 전부란 말이 신물 난다”, “나이 먹고 ‘마치 양’으로 불리면서 긴 드레스를 입고 과꽃처럼 새침해 보여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라는 대사도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전통적 가치와 교직한 또 다른 대사다.

여성을 가로막는 사회 구조적인 장벽에 대한 비판은 막내 에이미의 입에서도 튀어나온다. 여태껏 에이미는 화려한 금발의 말썽쟁이 막내로만 그려졌는데, 총명한 야심가이자, 작가인 언니 조만큼 화가로서 예술적 재능을 펼치는 캐릭터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에이미와 조 사이의 경쟁심리, 질투심도 한결 부각됐다. 여성의 욕망이 결코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쾌하게 일깨우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 관객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이 영화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밖에 구시대의 의상을 입은 네 자매가 수다를 떨거나, 아웅다웅 다투는 모습도 현대적 감성으로 원작을 재해석한 부분이다. 19세기 미국의 모습이 현대극처럼 생기발랄하고 입체적이다. 결말도 달라졌다. 소설처럼 조의 로맨스도 그리지만 조의 결혼이 엔딩은 아니다. 조는 자신의 책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인쇄기에 활자가 찍히고 책장이 묶여 표지에 제목이 찍히는 장면을 옆에서 바라본다.

영화에서 모든 인물들은 특유의 색을 띤다. 다른 인물을 보조하기 위해 배치한 것이 아니다. 자매 개개인과 주변인들이 살아 있도록 숨을 불어넣은 것이다. 첫째 메그는 결혼으로 안락한 가정을 꿈꾸는 19세기 여성의 모습이다. 둘째 조는 작가를 꿈꾸는 진취적인 여성이다. 자매들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 시나리오를 쓰며, 연극에서 늘 남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셋째 베스는 조용하고 섬세하며 착한 성품을 가졌다. 매사에 헌신적이며, 이타심이 뛰어나다. 넷째 에이미는 화가를 꿈꾼다. 꿈을 이루기 위해 부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믿는다. 가장 어리지만 자기의사가 분명하다. 마치 부인(로라 던)은 전쟁에 참전한 남편 대신 실질적인 가장이다.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며 딸들을 올곧게 키운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가난한 이웃과 아침을 나누고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보다는 마음의 풍요에 무게를 둔다. 영화는 입체적 캐릭터를 통해 원작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영리한 결말을 도출해낸다.

영화는 소설과 위노나 라이더가 주연을 맡은 <작은 아씨들(1994년, 질리언 암스트롱 감독)>과 다르다. 유년 시절 네 자매가 크리스마스 아침 벽난롯가에 모인 풍경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첫 장면부터 바뀌었다. 영화는 뉴욕의 출판사 사무실을 찾은 성인 조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1994년작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흥행이 잘 안 되던 당시 분위기에 따라 가족영화로 홍보됐다.

영화의 전개는 마치가(家)가 이웃 부잣집 소년 로리(티모테 샬라메)를 처음 만난 7년 전 과거와 교차하며 보여주는 방식이다. 시간 흐름에 따라 쓰여진 원작을 재구성한 것이다. 시끌벅적한 유년 시절 자매들 간 말다툼, 몸싸움 신이 뮤지컬처럼 리드미컬하고 유쾌하게 그려지다가,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시간 순서대로 전개된 소설과 다른 점은 큰 매력이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구성 안에서 파생하는 관계와 축적되는 감정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작은 아씨들>은 시의적절하다. 지금 여성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심도깊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작은 아씨들>을 향해 “이것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작은 아씨들’이다”며 찬사를 보냈다.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 신선도가 95%에 달한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개봉한 미국에선 제작비(4천만 달러·약 476억원)의 두 배가 넘는 1억 달러 수입을 벌었다. 이 영화를 보고 그레타 거윅 감독의 팬이 된다면 그의 전작을 챙겨보길 권한다. 전작 <레디이 버드>는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