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나비의 전설-촛불을 든 성주 군민들께 / 변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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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2 16:41 | 최종 업데이트 2016-09-02 16:41

나비의 전설
- 촛불을 든 성주 군민들께

변홍철

1.

쑥부쟁이 꽃잎을 가만히 건드리는
초가을 잠자리 날개를 간지럽히는
기도하는 늙은 어머니 눈썹 위에
부드럽게 떠는, 촛불을 가만히 핥아 보는
들고양이 무심한 눈동자에 일렁이는

작은 바람을 보았다

밭두렁에 다짐처럼 꽂아둔 삽날
손바닥에 마른 침을 뱉고 다잡는
낫자루 위에, 얼핏 푸른빛으로만
얼굴을 드러내던

조용한 바람을 보았다

때로 그 바람은
우리네 이마 위 땀방울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던 바람

막걸리잔 가에 묻은 한숨, 붉게 익어가던
고추밭의 이슬방울을
말 없이 위로하며 털어주기도 하였다

노래여,
너무나 오래 전에
내 할머니가 흥얼거리며
들려주시던 자장가여,
혈관 속으로 나즈막히
그저 흐르기만 했던 바람이여

2.

바람,
그 바람이 문득 회오리를 일으키며
아이들 떠난 학교 운동장,
성밖 숲 왕버들 줄기를 흔드는 소리

쇠붙이들에 부딪혀,
순하던 바람길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꺾이는 소리를 들었다, 화약냄새 풍기는 그늘,
심상찮은 무기의 그림자가
바람의 고운 비늘을 부러뜨리며
갈짓자로 장터를 누비는 소리도 들었다

멀리 산 너머 서서히 다가오는 뇌성처럼
불길한 예감에 펄럭이는 깃발 소리를 들었다
일제히 몸을 떠는 날갯짓 소리

그때 우리 모두는 보았다,
나비!

먹구름 사이로 쏟아진 별들
전설처럼 숨죽였던 마을들이
웅성웅성 켜 든 촛불, 펄럭이는 현수막과 검은 만장들
굳게 다문 입술로 흰 머리카락마저 떨궈내며
알몸으로 부화하는 나비들의
푸른 물결을 보았다

나비들의 부화, 침묵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나비들의 변태, 나비들의 이글거림

아니, 온 고을이 거대한 나비가 되어
천천히 날개를 일렁이는 순간을 보았다

나비의 함성, 나비의 도저한 사랑,
나비의 느리디 느린 이륙, 천근의 무게를 가진
나비의 날개가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그때 우리는 보았다
나비의 날개 위에 새겨진 놀라운 별자리를
그때 우리는 들었다
거대한 나비의 날갯짓이 일으키는 땅의 울림을

날개의 한 자락이 성산마루를 스치었다
날개의 다른 한 자락이 들판의 두려움을 뒤엎었다
나비의 굳센 더듬이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별빛을 가리고 있던 검은 하늘을 흔들었다

침묵하고 있던 바다,
백두대간의 갈비뼈 속에 꿈꾸고 있던
우리의 분노를 출렁이게 하는 나비여!

태풍의 눈동자를 할퀴어 버린 발톱,
화강암처럼 침묵하고 있던 태풍이
몸서리를 치며 일어서는 장산곶매여!

3.

먼 훗날,
화약내 가신 향기로운 봄언덕을
손잡고 넘어오며 아이들은 노래할 것이다

그날,
무자비한 태풍의 시작을 우리는 보았다고

수금을 뜯으며 시인은 나무그늘에서
순한 바람처럼 읊을 것이다

그날,
길을 잃었던 별자리가 제 자리를 찾아갔던
태풍의 시작을 우리는 들었다고

농부들은 개울을 따라 흘러내려오는
복사꽃의 속삭임 속에서 기억할 것이다

그날,
부서졌던 뼈들이 소리치며 일어섰던
태풍의 기원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고사리 우거진 계곡
녹슨 지뢰의 파편에
날개가 찢어져 울고 있던
한 마리 나비

그 작고 조용한 바람,
자장가 같은 바람 속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고

▲인간 띠잇기를 마친 사람들이 행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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