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 칼럼] 트럼프와 클린턴, 덜 나쁜 선택밖에 없는가?

미국 대선 제3의 길, “힐러리 아닌 질 스타인”...대안은 싸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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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7 17:49 | 최종 업데이트 2016-10-17 17:50

점입가경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6월 대선 출마선언 직후 멕시코 출신 이민자들을 모두 성폭력범으로 매도했다. 하지만 자신이야말로 구제불능 미소지니스트(misogynist)에다 상습적인 성폭력범임이 드러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선거 운동 내내 그가 보여준 반이민자, 반무슬림, 인종주의 선동과 여성비하에 비추어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고 대상화하는 녹음파일 폭로 후 트럼프는 그저 남자들끼리 나누는 음담패설, 소위 ‘라커룸 토크(locker room talk)’라며 무마하려 한다. 말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그에게 당한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지난 며칠 동안 거의 열 명에 가깝다. 시간과 장소, 상황은 다르지만, 이 여성들의 진술은 일관되게 트럼프가 ‘라커룸 토크’에서 떠벌인 행동패턴에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트럼프는 혐의를 부인하는 와중에도 피해 주장 여성의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그가 뼛속까지 미소지니스트인지를 다시 한 번 드러냈다. 그는 뭐가 문제인지 아직도 이해를 못 하고 있다.

그동안 마지못해 트럼프를 지지해 왔던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며 거리두기에 나섰다. 공화당 일인자인 폴 라이언 연방 하원의장은 트럼프를 방어할 생각이 없다며 선거운동에 힘을 보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폴 라이언이 여성의 권리를 옹호해서 선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출산전후휴가와 남녀동일임금지급을 반대해 왔고, 여성의 낙태권을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대표적인 보수정치인이다.

그는 낙태한 여성을 형사처벌하고, 강간이나 근친상간, 산모의 건강이 위험한 경우에도 낙태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에 분노하는 여론이 상하원의회 선거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막으려는 것뿐이다. 역겨운 언행을 일삼는 트럼프는 통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포기하지만, 상원과 하원은 포기할 수 없다는 지극히 실리적인 판단이다.

▲공화당 트럼프(왼쪽), 민주당 힐러리(오른쪽) 대선 후보. [사진=http://blackbag.gawker.com]
▲공화당 트럼프(왼쪽), 민주당 힐러리(오른쪽) 대선 후보. [사진=http://blackbag.gawker.com]

지난 7월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후 힐러리 클린턴은 지금까지 몇 차례 고비를 넘겨왔다. 지금 상황은 클린턴에게 유리해 보인다. 이대로 11월 8일 대선까지 남은 몇 주 동안 별문제 없이 지나간다면, 그녀는 다음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인종주의자 트럼프를 저지하고 말이다. 그러면, 트럼프라는 ‘재앙’을 막아낸 미국인들은, 그리고 미국 대선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을까? 클린턴은 트럼프와 달리 보통 사람들 삶에 좀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줄까?

불행히도 아니다. 정치이력을 보면 클린턴은 일관되게 기득권을 옹호하고, 친기업 정책을 펼치고, 제국주의 전쟁 확대를 지지해왔다. 전형적인 부패한 워싱턴 정치인이다. 남편인 빌 클린턴 정권에서 그녀는 빈민에 대한 복지 삭감과 인종주의적 형법 개악을 지지했다. 그 결과 흑인들은 대거 투옥됐고, 제도적 인종차별 심화를 가져왔다. 또,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고, 오바마 정권 국무부 장관으로 리비아,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 지역에서 제국주의 전쟁 확장에 앞장섰고, 남미 온두라스에서 우익 쿠데타를 지원했다. 전범인 공화당 헨리 키신저가 멘토라는 사실은 클린턴이 얼마 지독한 매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다면 중동에서 전쟁은 더 확대되고 한반도와 동아시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것이다.

여론조사를 보면 클린턴과 트럼프는 역사상 가장 인기 없고, 신뢰를 못 받는 대선 후보들이다. 대다수 미국 유권자들은 영 탐탁지 않은 이 두 명을 두고 그나마 누가 덜 나쁜가를 골라야 하는 곤혹스러운 선택에 직면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예 기권하겠다는 게 이해가 될 정도다.

트럼프가 아닌 다른 이가 공화당 후보였다면 클린턴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클린턴의 유일한 장점은 그녀가 트럼프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클린턴이 당선된다면 일등공신은 트럼프이다. 클린턴이 맘에 안 들지만, 그런데도 트럼프를 저지하기 위해 그녀에게 표를 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차악 논리다.

흔히 주류언론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교육 수준이 낮은 저임금 백인노동자로 묘사한다. 하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중산층에 더 가깝다.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몰락하고 있는 계층이다. 트럼프가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하는 대중들의 불만에는 실질적인 토대가 있다. 트럼프 인기는 갑자기 많은 미국인들이 인종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기존 정치질서에서 아웃사이더로 자신을 포장한 트럼프를 워싱턴 기성정치인들 보다 나아 보이게 했다. 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샌더스 돌풍과 동전의 양면이다. 샌더스 돌풍이 신자유주의 폐허를 딛고자 나온 변화에 대한 열망이었다면, 트럼프 돌풍은 신자유주의 폐허에서 나온 절망에 대한 한숨을 표현한다.

하지만 클린턴은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선동에 현혹된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이 오늘날 트럼프 지지 기반을 가져온, 지난 30여 년간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 최대 기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빈곤 심화와 양극화에 절망한 지지자들에게 트럼프는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구호를 써먹었다. 클린턴은 고작해야 미국은 ‘이미’ 위대하다고 응수했을 뿐이다.

▲클린턴을 지지하는 버니 샌더스. [사진=flick.com @disneyabc]
▲클린턴을 지지하는 버니 샌더스. [사진=flick.com @disneyabc]

민주당 경선에서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돌풍은 변화에 대한 열망, 특히 희망 없는 미래에 대한 미국 젊은 세대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기성 정치와는 다른 대안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다. 전국민의료보험 도입, 공립대학 무상학비, 부자증세, 월가 규제와 환경 보호 등 공약으로 이들에게 화답한 샌더스는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불행히도 민주당 내부에서 개혁을 시도한 샌더스 돌풍은 오래 가지 못했다. 민주당은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미국 대자본의 이해와 제국주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는 정당이다. 양당 체제에서 ‘보통 사람들의 당’을 자처한 민주당은 대중들의 불만이 체제를 위협하지 않고 흡수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경선 과정 내내 민주당은 이름만 민주당이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음을 보여줬다.

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오래전에 점지한 클린턴을 후보로 세우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했다. 그런 민주당 내부에서 정치혁명을 시도한 샌더스는 우려한 대로 민주당과 클린턴에게 지지자들을 그대로 몰아준 양치기 노릇을 한 꼴이 됐다.

클린턴 지지 선언 후 샌더스가 보인 행보는 지지자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경선 기간 그는 99%를 위한 ‘정치혁명’을 주장하며, 1% 대변인 클린턴이 월가에서 한 강연 전문 공개를 요구했다. 클린턴은 끝까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위키리크스 폭로에 따르면 샌더스가 옳았다. 표를 얻기 위해 유권자에게 하는 말과 돈줄인 월가 중역들과 밀실에서 나눈 말은 서로 달랐다. 클린턴은 대자본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월가 장학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클린턴 선거운동본부장 존 포데스타의 이메일'이 일부. 해당 내용은 도이치 은행을 상대로 한 강연 내용이다. [사진=위키리크스 홈페이지 갈무리 ]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클린턴 선거운동본부장 존 포데스타의 이메일’이 일부. 해당 내용은 도이치 은행을 상대로 한 강연 내용이다. [사진=위키리크스 홈페이지 갈무리 ]

하지만 이미 클린턴에 대한 지지로 스스로 손발을 묶어버린 샌더스는 진보운동에게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고 앞을 내다봐야 한다며 클린턴 비판을 삼가고 있다. 자신이 불과 몇 달 전에 했던 주장조차 침묵하면서 지지자들에게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심지어 트럼프조차 왜 샌더스가 ‘악마와의 계약’을 했는지 의문을 던질 정도다. 샌더스는 진정한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왜 민주당과는 다른 독립적인 대안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었다.

클린턴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샌더스 지지자들은 ‘버니 아니면 버스트 (Bernie or Burst – 버니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 다수는 결국 11월 대선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클린턴을 찍을 것이다. 클린턴이 대안은 아니지만, 트럼프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차악 논리, 즉 공화당 괴물에 맞서 민주당 매파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차악 논리를 거부하며 다른 대안을 찾는 의미 있는 소수가 있다. 미국 석학이자 인권운동가인 코넬 웨스트를 비롯한 이전 샌더스 지지자들은 샌더스가 클린턴을 지지한 후 그와 함께하지 않고, 녹색당 질 스타인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두 개의 악에서 더 작은 악을 선택하기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미래를 위한 최선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이다.

▲지난 2012년 뉴욕 맨하탄 월가 점령 시위 에서 연설하고 있는 질 스타인 미국 녹색당 대통령 선거 후보. [사진=flickr.com @Paul Stein]
▲지난 2012년 뉴욕 맨하탄 월가 점령 시위 에서 연설하고 있는 질 스타인 미국 녹색당 대통령 선거 후보. [사진=flickr.com @Paul Stein]

질 스타인은 기존 샌더스의 국내정책뿐 아니라 대외정책에서도 미국의 군사 개입과 전쟁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 대선 후보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드반대 투쟁에 지지와 연대를 보낸 것도 질 스타인이다. 노스다코타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 원주민들의 대형 송유관 건설 반대 투쟁을 지지하며 함께 하는 유일한 대선후보도 질 스타인이다.

무엇보다 질 스타인의 운동이 의미가 있는 것은 민주당이 아닌 제3의 대안을 건설하는데 초석을 놓는 풀뿌리 운동이라는데 있다. 독립적 대안 건설은 주류언론이나 일부 식자들 주장처럼 비현실적인 환상이 아니다. 2015년 갤럽 조사에 의하면 60% 미국인들이 민주/공화 양당이 자신들의 실질적인 이해를 대표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정당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녹색당이 곧바로 그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힐러리가 아니라 질 스타인 (Jill Not Hill)’이라는 구호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민주당이 아닌 새로운 대안 건설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므로 질 스타인 지지는 사표가 아니다. 차악을 거부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만들고자 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진정한 변화를 위한 최선의 한 표이다.

클린턴과 트럼프 둘 중 누가 당선되든 미국인들은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후보를 백악관 새 주인으로 맞는다. 문제는 누가 백악관에 앉아 있느냐가 아니라 그 밖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1%에 맞선 99%의 투쟁만이 모든 재앙을 만들어내는 체제에 도전할 수 있고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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