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유령이다: ‘유일자(唯一者)’ 막스 슈티르너 ②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절대자유-아나키즘](11)

12:45

3. 국가론

“국가는 유령이다.”

이 말은 ‘유일자’를 주장한 에고이스트 슈티르너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신, 황제, 교황, 조국, 민족 등 일체의 권위를 ‘유령(ghost)’으로 본다. 만일 이 ‘유령들’에 대한 사상을 구체화하지 못하면, 이들은 무시무시한 힘을 갖게 된다. 그에게는, “오직 나만이 구체적이다(I alone am corporeal).”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유령이자 도깨비에 불과하다. 그는 말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에게 속하는 그대로의 세상을 가진다. 나 자신의 것으로, 나의 소유로. 나는 모든 것을 나 자신의 것으로 돌린다.”(Max Stirner, p. 23.)

슈티르너의 이 선언은 미래지향적 자기창조자로서 ‘유일자-나’가 가지는 당연한 권리다. 유령에 불과한 국가는 ‘나’를 창조할 수 없고, 오직 ‘유일자-나’만이 국가를 만들 수도, 없앨 수도 있다. 본래부터 ‘나’의 소유인 모든 것을 ‘나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국가라 할지라도. 그러나 슈티르너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국가 그 자체’가 아니다. 국가라는 ‘고정관념(fixed idea; die fixe idee)’의 해체와 소멸이다.

“고정관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복종시키는 관념이다. 이러한 고정관념에 관하여 당신이 그것을 어리석다고 인정할 때 당신은 정신병원에 그 고정관념을 감금한다. 그리고 우리가 전혀 의심하지 않는 신앙의 진리,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인민의 황제(이 죄를 범하면 대역죄에 해당한다), 단 한마디의 비난도 허용되지 않는 미덕, 순수함을 지켜야 하는 도덕, 이러한 것들이 고정관념이 아닐까?”(Max Stirner, p. 37)

슈티르너에 의하면, 고정관념이란 “인간을 복종시키는 관념”, 즉 “나 자신을 부정하고 희생시키는 관념”이자 “자신을 타자에게 복종시키는 관념”이다. 그 관념의 대표적인 예로는, 신, 인간성, 진리, 자유, 민족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은 그동안 종교(기독교)와 철학을 통하여 인간이 숭배하고 수호해야 할 지고한 가치로 간주되어왔다. 누구든 이를 의심할 경우, 신성모독으로 처벌받는다. 우리는 자신과는 무관한 것을 신성시하고, 그에 지배를 받고 있다(김은석, 121~122쪽). 슈티르너는 묻는다. 도대체 신, 인간성, 진리, 자유, 민족 등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그는 아나키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프루동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래서 프루동은 뻔뻔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종교 없이는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도덕률(도덕규범)은 영원하고, 또 절대적이다. 오늘날 누가 감히 도덕을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그에게 있어 일체의 경건함(piety)은 비인간적(inhuman)이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 자신과 관계없는’ 모든 것에 저항하고 거부해야 한다. 심지어 칼을 빼 들고 목을 쳐야 한다(Max Stirner, p. 39).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일까? 나의 관심이 아닌 기존의 모든 것을 無로 취급하는 일, 즉 ‘모든 가치의 전도( the revaluation of all values or the transvaluation of all values; Umwertung aller Werte)’를 통하는 것뿐이다(김은석, 122쪽). 오직 자신의 것만을 생각하는 에고이스트‘이자 ’유일자‘ 슈티르너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슈티르너는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관점에서 국가라는 고정관념 역시 해체하고자 시도한다. “국가는 유령이다”는 말은 곧 “국가라는 ‘고정관념’은 유령이다”는 뜻이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유럽은 절대군주제를 철폐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근대주권국가를 창출하였다. 자유주의와 이성에 따른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근대국가는 인간을 절대군주제라는 비인격적인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로 인하여 과연 인간은 자유를 쟁취하였으며, 일체의 권위로부터 해방되었는가? 슈티르너는 근대국가체제 역시 개인을 권위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개인은 국가에 의해 또다시 예속되고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제 모두가 동일하게 되었다. 특수이익(separate interest; Sonderinteresse)은 더 이상 추구되지 않고, ‘만인의 일반이익(the general interest of all; des allgemeine Interesse aller)’이 추구되기에 이르렀다. 국가야말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모두는 스스로 ‘전체의 행복’에 봉사하고, 국가 속에 자신을 용해시키며, 국가를 자신의 목표와 이상으로 만들고 있다. 국가! 국가! … 이리하여 모두는 ”국가의 바른 형태“, 최상의 조직, 최상의 개념 속에서 국가를 추구한다. 국가의 사상은 만인의 가슴에 파고들어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했다. … 국가나 국민에 봉사하는 것은 최고의 이상이 되었으며, 국가의 이익이 최고의 이익으로, 국가의 공복이 최고의 명예가 되었다.”(Max Stirner, p. 63~64; 김은석, 136쪽에서 재인용. 일부 내용 필자 추가)

자기창조자로서 유일자인 나를 추구하는 슈티르너에게 있어 그 나를 속박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국가와 나는 처음부터 양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왜 개인은 이러한 국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국민(the Nation)’과 ‘국가(the State)’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함께 모여 있는 것이 국가이고, 함께 모여 있는 우리가 국민이다.”(Max Stirner, p. 60)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국민’과 ‘국가’로 결속된 사회형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한다.

“국민 혹은 국가로서 함께 결속되어 있을 때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가 그 이외의 어떤 점에서 개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발전시키고, 우리가 어떤 이기적인 충동을 발현시키며, 또 우리의 사생활을 오로지 우리 자신을 위해 향유할 수 있는가. 우리의 공적 혹은 국가적인 생활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것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모든 비인간적인 혹은 ”에고이스트적인“ 것은 ”개인적 문제“로 취급된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를 ”에고이즘“ 사회의 영역에서 ”시민사회“를 명확하게 구별한다.”(Max Stirner, p. 60)

따라서 “참된(혹은 진정한) 인간은 국민이지만, 개인은 항상 에고이스트(The true man is the nation, but the individual is always an egoist.)”로 남을 수밖에 없다. 슈티르너의 이 말은 지독한 역설이다. 하지만 뒤따르는 그의 주장을 들으면, 국가에?예속되어 무한한 복종을 강요받는 ‘참된 인간=국민’의 자화상에 슬픔을 넘어 가슴이 저리다.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불평등과 불화가 숨 쉬고 있는 당신들의 개별성이라든가 분열을 떨쳐 버려야 하며, 국민 또는 국가라고 하는 참된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맡겨야만 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들은 인간이 될 자격이 있으며, 인간인 바의 본질을 모두 지니게 될 것이다. 진정한 인간인 국가야말로 당신들에게 그 구성원의 자격을 주며, ”인간의 권리“를 준다. 인간이라는 것이 그대들에게 인간적인 권리를 준다!”(Max Stirner, p. 60; 박종성, 박사학위논문, 76쪽에서 재인용. 일부 용어 필자 수정)

슈티르너에 있어 ‘참된 인간’은 곧 ‘선량한(혹은 착한) 시민들(good citizens)’이다. 이들은 국가에게 세금을 내고, 국가는 그 세금을 사용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경찰제도를 도입한다. 이제 국가는 경찰을 통해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억압한다. 슈티르너의 표현에 의하면, 국가는 마치 ‘국가기계(the State machine; the machinery of the State; Staatsmaschine)’와 같다. 국가는 이 기계를 통해 개인을 억압한다(Max Stirner, p. 67 & 118).

그의 이 비판은, 국가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오늘날의 ‘참된 인간=선량한 시민들=국민’이라는 도식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절실하게 다가온다. 또한, 앞으로도 우리는 ‘국가’와 ‘국민’이라는 이 결속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지도 않다. 그 주된 이유는, 근대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사회계약에 의한 개인의 자유로운 사적 평등 원칙에 따라 출발했기 때문이다(박종성, 박사학위논문, 76쪽). 이에 대해 슈티르너는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Max Stirner, p. 67)라는 관념에 따라 ‘근대국가란 곧 부르주아국가’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자는 국가에 의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소유자만이 국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고, 보호를 받는다. 국가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자의 고혈을 뽑아낼 뿐 그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국가는 부르주아의 국가이며, 부르주아의 재산이다. 국가는 인간을 개개인의 노동에 따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순종(”충성“)에 따라, 즉 개개인이 국가가 위임한 권한을 국가의 의지인 법률에 맞게 향유하고 집행했는가에 따라 인간을 보호한다.(Max Stirner, p. 67; 박종성, 박사학위논문, 78쪽에서 재인용. 일부 내용 필자 추가)

“국가는 부르주아의 국가이며, 부르주아의 재산이다(The State is a-commoners’ State, is the estate of the commonalty)”이라는 그의 말에서 보듯이 국가는 개인의 내면에 내재된 소유(권)의 욕망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권력을 행사한다. 개인의 자기 지배와 통치는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국가이익을 달성하도록 개인에게 무조건적 순종과 충성을 강요하고 있다. “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그의 탄식은 자유주의국가가 곧 소유에 기반한 부르주아국가라는 성찰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창조적 無”로서 ‘유일자’인 ‘나’는 본질적으로 ‘에고이스트’일 수밖에 없다.

4. 에고이스트연합

“인민의 자유는 나의 자유가 아니다!”
“Liberty of the people is not my liberty!”(Max Stirner, p. 113.)

이 말에서 보듯이 슈티르너는 독일 낭만주의철학의 분위기 속에서 사유하면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선구자라고 할만하다. 그는 국가?재산(소유권)?법률?의무 등 보편적 도덕이념 혹은 절대이념을 개인보다 우위에 두는 독일의 근대관념론을 비판한다. 모든 가치 혹은 체제의 최상위에는 ‘유일자-나’가 있다. 슈티르너는 ‘나’에 대한 본질(essence; essentia)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의 실존(existence; existentia)에 대해 파고든다.

슈티르너는 자본주의와 그것을 지지하는 국가를 에고이스트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비판하고, 공격함으로써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철학적?사상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 입장에서 국가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그가 제안한 것이 바로 ‘에고이스트연합(the Union of Egoists; Verein von Egoisten)’이다(Max Stirner, p. 98).

에고이스트연합이란 “에고이스트-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확대하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유일자들 상호 간에 평등한 입장에서 협력하는 자유로운 조직”이다. 그에게 있어 사회는 에고이스트들에게는 불만족한 체제일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는 인간의 요구는 최소한 만족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자아의 요구에 대해서는 늘 불만족한 상태에 있다.”(Max Stirner, p. 111)

그래서 슈티르너는 묻는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가장 자연스럽고 확실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조직은 실제로 에고이스트연합이 아닐까? 누구는 노예로, 또 다른 누구는 농노로 뭉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에고이스트가 될 수 있을까?”(Daniel Gu?rin, p. 24.)

슈티르너가 제안하는 에고이스트연합은 종교나 국가체제처럼 위계적 혹은 계층적 구조가 아니라 비위계적 혹은 비계층적 구조를 취한다. 하지만 이 연합을 구성하는 ‘에고이스트(들)’의 개념에 관한 슈티르너의 설명은 일률적이지 않고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에 대해 헤스(Moses Hess)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슈티르너에 의하면, 지금까지 에고이스트들의 전체 결함은 그들이 자기의 에고이즘에 대해 아무런 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각설하고. 에고이즘 일반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에고이스트적인 생활과 사랑이 있는 생활의 차이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에고이즘은 무엇으로 사랑과 구별되는 것인가? 에고이스트란 사랑 없는 삶이며, 노동 없는 향유이며, 생산 없는 소비다. 슈티르너의 이상은 에고이즘(이기주의)의 시민사회다.”(のんきち小屋)

헤스는 슈티르너가 주장하는 ‘에고이스트연합’을 의도적으로 영어 소문자를 사용하여 ‘에고이스트결사(egoists’ association)’라며 폄하한다. 이에 대해, 슈티르너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다른 사람의 욕망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서도 안 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통해 에고이스트연합을 옹호한다.

“어떤 사람들의 욕망이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희생함으로써 충족되고,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의 휴식하려는 욕망이 다른 사람들이 탈진할 때까지 노동한 사실 덕분에 충족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빈곤 속에 생활하고, 또한 굶어죽은(아사) 덕분에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때, 혹은 다른 사람들이 궁핍한 생활을 참을 만큼 어리석기 때문에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라면, 이러한 사회를 ‘에고이스트결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 (のんきち小屋)

슈티르너는 헤스에게 강하게 요구한다. “당신의 ‘egoists’ association’을 슈티르너의 ‘Egoists’ association’과 동일시하지 마라!”

그렇다면 슈티르너는 왜 ‘유일자’인 ‘에고이스트(들)’의 연합의 결성을 강조하고 있는가? 슈티르너는 억압적 근대성에 대한 저항으로 유일자 개념을 도출한다. 이를 통해 억압받고 배제된 존재에 따뜻한 사랑과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이 존재는 에고이즘으로 나타나며, 기존의 모든 관행과 제도를 거부하고, 새로운 형태의 에고이스트연합을 통해 자아의 해방을 모색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국가를 비롯한 사회는 억압적인 것이고, 그 대안이 바로 ‘연합’이다.

“사회의 해체는 교류(intercourse; Verkehr) 혹은 연합(Union; Verein)이다.”(Max Stirner, p. 153)

결국 슈티르너는 억압적인 사회의 해체를 통한 에고이스트-개인 간의 ‘교류’ 혹은 ‘에고이스트연합’의 결성을 주장한다(Max Stirner, p. 111 이하). 이렇게 하여 결성된 연합은 ‘끊임없는 자기연합(an incessant self-uniting; ein unaufh?rliches Sich-Vereinigen)’이다(Max Stirner, p. 153).

“만약 연합이 사회로 굳어진다면, 그것은 연대(혹은 제휴)를 멈추는 것이다. 연대는 하나의 끊임없는 자기연합이다. 그 연대가 통합체가 되고, 정지되고, 고정된 것으로 퇴락한다는 것(그것이 연합으로서는 죽은 것, 연합 혹은 연대의 시체이다)은 사회,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두드러진 예는 정당이다.”(Max Stirner, p. 153; 박종성, 박사학위논문, 101쪽 재인용. 일부 내용 필자 수정?보완).

슈티르너는 ‘사회의 해체’가 이뤄지는 상태를 ‘교류’ 혹은 ‘연합’으로 본다. 즉, 에고이스트들의 ‘교류’가 곧 ‘연합’이다. 그의 이 생각은, “만약 연합이 사회로 굳어진다면, 그것은 연대를 멈추는 것이다(If a union has crystallized into a society, it has ceased to be a coalition)”라는 위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에고이스트연합이 결성되었다 할지라도 그 연합이 다시 사회화되어 버리면, 그것은 곧 ‘연대(coalition)가 멈추는 것’이다. 그 연합은 ‘죽은 연합’이고, ‘연합 혹은 연대의 시체’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슈티르너는 연합의 개념을 ‘운동성’, 연합의 고정성을 거부하고 활동성에 중점을 두고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박종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합은 제도화되지 않으며, 끊임없는 자기연합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자기연합을 멈추는 순간 연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연합을 멈춘다는 것은 사회를 의미한다. 사회는 결속과 유대를 위해 개인의 자발성을 억압하므로 정적이다. 하지만 연합은 자발성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동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연합은 해체와 결성을 반복한다.”(박종성, 박사학위논문, 101쪽)

슈티르너가 주장하는 연합의 ‘운동성’은 ‘자발성’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에고이스트는 두 유형, 즉 ‘자발적 에고이스트(voluntary egoist)’와 ‘비자발적 에고이스트(involuntray egoist)’로 나뉜다. 연합에 참여하는 개인은 ‘자발적’이며, ‘능동적’ 에고이스트다. 그런 개인이어야만 “연합이 너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연합을 소유하거나 너를 위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만 에고이스트연합은 연합의 원리를 구성하는 유일자의 존재론적 삶이 반영될 수 있다. 나아가 에고이스트연합은 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될 수 있다(박종성, 박사학위논문, 104쪽).

《유일자》에서 ‘아나키(anarchy)’라는 표현은 단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도 이 표현은 ‘무법상태’를 의미하는 ‘lawlessness’와 함께 사용하고 있다(Max Stirner, p. 63 & 123). 그에게 ‘아나키’란 다분히 ‘무질서’ 혹은 ‘무법’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러 측면에서 우리는 슈티르너를 아나키스트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유일자》와 그가 쓴 수많은 칼럼과 논문을 통해 드러난 그의 사상을 살펴보면, 그는 평생 고독한 아나키스트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그의 사상은 아나키즘 이론을 정립하는데 기초가 되었으며, 바쿠닌과 크로포트킨 등 실천적 아나키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슈티르너가 아나키스트인지 아닌지 혹은 그가 아나키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를 떠나 그는 평생 철저한 ‘유일자-에고이스트’이자 ‘자유인’으로 살았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권리가 있다.”(Max Stirner, p. 114)
“For only he who is alive is in the right.”

<참고문헌>
?박종성, 《슈티르너의 ‘유일자’(der Einzige)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유일자’, ‘고유성’, ‘연합’ 개념을 중심으로 》,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8.
?장 프레포지에(이소희?이지선?김지은 옮김), 『아나키즘의 역사』, 이룸, 2003.
?Daniel Gu?rin, No Gods, No Masters: An Anthology of Anarchism, AK Press, 2005.
?Max Stirner,《Der Einzige und sein Eigenthum》, 1. Digitalauflage Berlin 2002, Dreigliederungsverlag
?Max Stirner(Trans. by STeven T. Byington),《The Ego and His Own》, New York, Benj. R. Tucker, Publisher, 1907.
?John Henry Mackay, 《Max Stirner’s Kleinere Schriften und Entgegnungen auf die Kritik seines Werkes)》
?https://de.wikisource.org/wiki/Max_Stirner’s_Kleinere_Schriften_und_Entgegnungen
?김은석,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 in:《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우물이 있는 집, 2004.
?정문길, “막스 슈티르너의 생애와 저작: 슈티르너 연구 1”, 법학행정논집, 고려대학교 법학연구원, 19권, 1981.
?박종성, “아나키즘 철학의 운명과 정치 철학의 과제”, 진보평론 2012년 가을(제53호), 2012.9.
?박종성, “슈티르너의 “자유주의” 국가 비판의 현대적 의미”, 시대와 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2권1호, 2011.
?雅美住吉, “マ?ックス?シュティルナ?の近代合理主義批判(6)”, 北大法?論集, 43(4).
?のんきち小屋, “カピバラでもわかるマックス?シュティルナ?の「唯一者とその所有」“, http://www.ne.jp/asahi/anarchy/anarchy/booth/n_essay03.html

관련기사
국가는 유령이다: ‘유일자(唯一者)’ 막스 슈티르너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