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촛불열전] (5) 이종희의 향수(鄕愁)

"사랑하는 할머니의 고향 성주를 위해 함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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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6 18:54 | 최종 업데이트 2017-04-06 20:24

[편집자 주=2016년 7월 13일 국방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성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자파부터 남북관계, 한중관계 경색까지. 성주 주민들은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성주읍내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바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월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 부지로 바뀌었고, 국방부가 사드 포대를 반입해왔지만, 사드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뉴스민>은 성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만난 성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성주촛불열전]을 매주 월, 목요일 연재한다.]

소백산맥을 낀 분지 성주를 방문하는 사람은 이따금 바다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듬성듬성 솟은 산자락을 피해 참외밭이 펼쳐져 있다. 언덕배기에서 밭을 훑어보면 쏟아지는 햇살이 비닐하우스 위로 번들거린다. 하늘빛이 번진 비닐하우스는 출렁이는 바다가 된다. 밤이면 별고을 하늘 아래 바다가 더욱 넓고 깊어진다. 달빛이 은은한 날이면 들판은 영락없는 바다라서, 어느 술 취한 토박이조차 착각하고 오줌을 갈길 정도다. 성주읍에 시원하게 펼쳐진 들판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초전면이 나온다. 지금은 사드 배치 철회 투쟁 최전방이 된 소성리도 초전면에 있다. 성주읍과 초전면을 나누는 대티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나오는 칠선리에 오늘의 이야기꾼 이종희(60) 씨가 살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이종희 씨는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원회에서 공동위원장이다. 이번 <성주촛불열전>에서 이종희 씨가 들려주는 성주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진 가운데가 이종희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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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치골 벽진이가네 장남 이종희
숨겨둔 풀빵같은 할머니의 편애
동장 아버지로부터 정의를 배우다

내 고향은 칠산리다. 문치(文治)골이라고도 불린다. 북동쪽으로 백내가 흐르고 동쪽에는 두리장군이 으름장을 놓고 있다. 어릴 적 백내는 우리들의 낚시터였다. 동네 형들과 함께 자전거 바퀴에 달린 수동 라이트 전선을 따 강을 지지면 물고기가 떠올랐다. 간혹, 어떤 싱거운 형님은 윗도랑에서 멱 감는 처자들을 향해 기역자 플래시를 비추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그런 허튼짓엔 관심 없었던 나로선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마을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베이비붐 시절 마을은 한 집에 대개 육남매에서 십남매까지 있었다. 등굣길은 가장 나이 많은 형이 앞장서고 그 뒤를 나이순대로 질서 있게 쫓았다. 백내가 얼면 그 위를 건너 학교에 갔다. 밤에는 잠자러 온 꿩을 손쉽게 잡아 나눠 먹기도 했다.

꿩도 맛있었지만, 으뜸은 장날에 파는 풀빵이었다. 나를 각별하게 생각했던 할머니는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꼭 풀빵 하나씩을 사 오곤 했다. 장날이면 목을 빼고 할머니를 기다렸다. 가끔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날은 훗날 알았지만, 품팔러 간 날이었다. 내 아래로 동생이 다섯이지만, 할머니는 나를 편애했다. 풀빵도, 품팔이하고 오는 날 얻어온 사과도 나에게만 살며시 주곤 했다. 도시락을 까보면 내 도시락에만 달걀이 올라가 있었다. 서러웠던 동생들은 지금까지도 불만이다. 할머니가 내게 각별했던 이유는 있다. 아버지를 낳고 삼촌을 낳았는데,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첫 손자인 나에게는 조건 없는 사랑을 주셨다. 더구나 내가 2살 때 결핵을 앓는 바람에 더욱 각별했다. 할머니는 읍내병원까지 나를 업고 대티고개를 넘어다녔다.

지금은 집성촌이란 말이 무색하지만, 어릴 적 마을 사람 70%는 벽진 이씨였다. 예전에는 추수철이면 큰집 먼저 몰려가 타작했다. 추수철 큰집 밥상이 가장 푸짐했고, 끝으로 갈수록 부실했다. 큰집 추수를 마치면 쌀밥에 갈치가 나왔다. 나는 나락 베어낸 것을 소달구지에 얹어주는 일을 주로 했다. 당시에는 아주 끈끈하게 협업했고 욕심도 없었다. 관개시설이 턱없이 부실하던 그 시절, 냇물을 끌어다 쓰거나 웅덩이 물을 퍼서 논밭에 물을 댈 때는 절대 욕심부리지 않았다. 장마철에는 결코 논두렁을 다 열지 않았다. 밑 집 논에 피해가 가기 때문인데, 그 시절에는 법으로 정하지 않았는데도 당연한 질서가 있었다.

나는 그나마 농사일을 면제받는 편이었다. 우둔해서 동생보다 일을 못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장남이라고 공부를 시키려고 했다. 노는 것이 좋아 종일 밖에 있다 집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웠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 아지매들 사랑방이었다. 아버지가 시골 사람 치고 개방적인 편이었기 때문이다. 전기가 귀한 시절이었지만, 방에 전등을 달아 놓고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아지매들은 MBC '법창야화'를 틀어놓고 홀치기를 했다. 할머니는 내가 무릎을 베면 홀치기를 하다가도 손을 놓고 살랑살랑 부채질해 주었다.

어린 시절 당숙은 술만 마시면 망나니가 됐다. 집안에 보이는 사람을 때렸고, 기물을 부쉈다. 중학생이 되던 해, 당숙이 술을 먹고 집에서 낫을 휘둘렀다. 그날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종희 아부지, 종희 아부지"라고 다급하게 부르며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는 동장이기도 했지만, 의협심이 강해서 마을의 사나운 일에 나서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걱정에 가슴을 쳤다. 나도 두고 볼 수 없어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아버지는 신도 벗지 않고 문지방을 넘어 당숙을 손쉽게 패대기쳤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는 덜 여문 머리로도 고향에서 질서와 정의를 배웠다.

녹록지 않던 대구 도시 생활
고등학교 졸업 후 성주 4H활동에 매진했으나
아버지 권유로 대학 마쳐
졸업 후 취직한 대구백화점에서 아내 만나다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중학교 3학년, 대구 신암동으로 나왔다. 장남이라고 체질에도 맞지 않는 공부를 시키려고 유학을 보냈다. 위장 전입을 위해 미리 1년을 대구 이모 집에서 살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자취를 시작했다. 대구 생활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주 시골생활과 모든 게 달랐다. 주인집과 친해지기도 어려웠다. 늦게 들어가는 날에는 대문도 따지 못해 담을 넘어가야 했다. 한 울타리에 살지만, 벽이 있었다. 고향에는 성당 신부님 차를 타고 다녔었는데, 대구에는 길도 많고 차도 많았다. 굴뚝이 하늘을 가렸는데, 밤이면 별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성주에서는 하늘을 보고 길을 찾았는데 대구에서는 공장 이름을 외어 길을 찾았다. 외로운 시절 위안이 된 사람도 할머니였다. 바쁘셨지만, 농한기가 되면 여지없이 반찬을 들고 자취방을 찾아왔다. 할머니가 다녀간 날이면 집안이 깨끗했다. 어두운 밤 집에 돌아와 할머니가 널어놓은 행주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곤 했다. 그 행주를 만지는 것조차 아까웠다.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꼭 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가족의 바람과 다르게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서도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오히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꽂혔다. 박동혁처럼 농촌에서 깨우침을 주고받고 싶었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컸다. 그래서 대학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 뜻을 무릅쓰고 마을로 돌아왔다. 돌아와 4H(농촌계몽운동의 일종)운동을 시작했다. 고향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내게 고향은 곧 할머니였으므로. 4H운동에 드디어 취미를 붙였다. 청년들끼리 연극도 했고, 노래자랑도 했다. 무대 위에 새끼를 쳐 놓으면 구경꾼들이 돈을 엮어 놓았다. 그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그 중 설렜던 일은 포크댄스를 배울 때였다. 20대 총각으로서 여인네 손을 잡을 때 전기가 통하는 듯했다. 살랑거리는 마음으로 포크송에 맞춰 빙글빙글 돌던 그때, 그때는 우리의 희생으로 지역이 잘살 수 있다는 마음이 있었다. 4H운동은 길게 하지는 못했다.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대학을 가야 했고, 23살 79학번으로 입학했다. 한 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오니 군청이 4H운동하던 시절 내가 심어놓았던 무궁화를 다 베어 놓았다.

대학을 늦게 마치자마자 대구백화점 경리부로 입사했다. 여기서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나보다 11살이 적었다. 당시 나는 감정보다도 6남매 장남으로서 가정과 화합할 수 있는 사람이냐가 중요했다. 같은 부서에 있던 아내는 조건이 맞았다. 그래서 꼬시긴 했지만, 아내도 전부터 내 모습을 눈여겨봤던 것 같다. 한 날은 동성로 네거리에서 사내 둘이 칼을 들고 다툼이 벌어졌는데, 나서는 사람이 없어 내가 뜯어말렸고, 그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싸움을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주변이 위험해 보이는 바람에 끼어들어 대화로 중재했고, 뜻밖에도 쉽게 두 사내의 싸움이 끝났다. 그리고 사내에서 노조 비대위원장도 맡았다. 회사와 힘들게 싸우는 모습이 아내 눈에 들었을 것이다. 87년에 결혼했다.

백화점 노조는 출범하지도 않았는데, 소식을 들은 경영자들이 노조 관계자가 속한 부서장들에게 사표를 받아놓고 압박했다. 그 일을 보자 나는 비대위원장을 맡아서 경영자들과 협상했다. 강당에서 조합원 대회를 열었더니 회사 임원도 나왔다. 거기서 임원과 이야기가 잘 됐다. 임금 25% 인상, 소통창구 활성화 등을 약속받았다. 조합원들의 인사상 불이익을 주지 않는 조건으로 노조 설립신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한 해에 각기 다른 부서로 3번을 발령받았다. 91년, 나는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뒀다. 내게는 고향이 있었다. 결혼 직후 효목동에 얻은 집에는 전축이 있다. 집에서 조용한 날이면 나는 정지용 시인의 시를 딴 노래 <향수>를 자주 듣곤 했다.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다시 고향으로
예전같지 않은 고향
급작스런 사드 배치 발표

퇴사 직후 백화점 동료 셋과 IT회사 <포맨정보>를 차렸다. 직원 둘을 모집해 6명이 시작한 회사는 2003년 대표이사를 맡을 때 60여 명까지 규모가 불었다. IMF도 무사히 넘겼다. 회사 분위기가 혁신적이었기 때문이다. 금일봉, 연차수당, 월차휴무를 엄격히 보장했고, 직원 포상 시스템도 훌륭했다. 지역에서 처음으로 격주 토요일 휴무제를 도입했다. 이런 회사 분위기가 이어지다 보니, 1998년 IMF 당시에는 사우회 회장이 상여금을 반납할 정도였다. 2007년 대표이사를 그만뒀다. 회사는 컸지만, 건강이 점점 악화됐기 때문이다. 당뇨 수치와 혈압 수치가 아주 높았다. 주치의가 스트레스를 피하려면 일을 그만두라고 권유했다. 그로부터 3년은 빈둥대다가 2011년 참외농사를 마음먹고 성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고향을 마주한 기분은 복잡했다. 탁 트인 밤하늘. 넓은 들,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옛날 할머니가 널어두었던 행주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내가 백화점을 그만두던 그해 돌아가셨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마음에 죄책감으로 남았다. 두고두고 할머니와 고향을 생각했다.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은 빚이고, 갚을 곳은 이제 고향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향은 내 생각과 달리 변해 있었다. 공동체 생활은 실종됐고, 친구들까지도 개인주의적인, 이기적인 생활에 물들어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수로정비에 나서지 않았다. 참외가 부를 가져다줬지만, 이웃 간 정을 가져가 버린 것 같았다. 변해버린 고향을 보며 나는 소매를 걷었다. 4H운동을 하던 시절처럼 내 노력으로 바꾸려고 했다. 시시콜콜한 일도 군청에 건의했고, 나름대로 효과를 보기도 했다.

▲성주군-국방부 사드 지원책 합의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종희 씨.

군이 공장 총량제를 도입한 적이 있다. 큰 도시에서 퇴출당하는 도금, 소각업소를 위시한 환경오염 공장들이 무계획적으로 불어났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 군청에 공장 총량제 도입을 건의했다. 다행스럽게 조례에 제안이 인용됐는데, 박근혜 정부 들어서며 기업규제 혁파라는 명분으로 조례는 폐지됐다. 이거 말고도 정부나 관조직에서 시작하는 시스템은 지역사회에 여러 적폐로 뿌리내렸다. 군청이 어릴 적 심었던 무궁화를 뽑아내어서인지, 변화의 씨앗을 찾기 어려웠다.

2016년 2월, 뉴스를 통해 한미 간 사드 배치를 협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부터 사드에 관심을 기울였다. 7월 들어 칠곡으로, 양산으로, 예천으로, 포항으로 사드가 들어온다는 흉문이 돌았다. 7월 13일. 성주 성산포대에 사드가 배치된다고 발표됐다. 그때 생각했다. 사드를 막는 것이 내가 고향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발표 초기 다른 지역 사례를 찾아봤다. 사드 배치 지역 중 어느 곳도 성주처럼 내륙 한복판인 곳이 없었다. 방어 거리를 따지면 성산포대에서는 수도권조차 방어하지 못했다. 핵심은 북핵이 아니라 미국이 중국까지 감시할 레이더라는 답이 나왔다. 사드를 강행하려는 정부의 태도에서 절벽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지만, 일은 쉽게 풀리는 듯했다. 군 전체가 나서서 격하게 사드를 반대했다. 군수부터 동네 이장까지 관변단체도 발 벗고 나섰다. 그때 나는 오히려 거리를 두고 상황을 보려 했다. 집회에 꼬박꼬박 참여했지만, 마이크는 잡지 않았다. 충분히 사드를 막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들었다.

군수가 8월 22일 제3부지 검토를 국방부에 요청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촛불집회 전, 군청을 걸어 잠그고 전기를 차단했다. 그즈음에는 제3부지로 까치산이나, 염속산이니 하는 설도 있었지만, 초전면 소성리가 가장 유력한 곳이었다. 8월 23일 김세환 부군수가 초전면에서 열린 사드 반대 대책회의에 불시 방문했다. 회의 중 소문도 없이 끄적끄적 오만하게 들어오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 부군수였다. '저 뻔뻔한 상판떼기로 염장지르려고 왔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욕설도 나오기 시작했다.

"성주 부군수란다"
"점마가 전깃불 내린 놈이가"
부군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 이 집회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집회 내용은 당초 우리가 하던 성주에 사드 안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 한반도 사드 배치 반대(라고 하고), 거기다 반정부, 반미, 대통령·도지사·군수 욕하고 있는데···군청 앞마당은 공용 재산이 아니고 공공용 재산입니다. 재산관리법 상…"

더 참지 못한 사람들은 "초전은 성주가 아닙니까", "전기를 넣어주십시오" 하면서 따졌다. 부군수는 해명에 나섰지만, 오히려 화를 돋웠고, 겸연쩍게 자리를 떠났다.

초전면 투쟁위원장에서 성주투쟁위원장으로
'우리'들의 변화에서 희망을 본다
촛불이 그 변화를 만들었다

나는 9월부터 초전면 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투쟁위원은 20여 명이었고, 투쟁위원장은 나와 이석주 소성리 이장 등 3명이었다. 이즈음부터 촛불집회 군중도 줄기 시작했다. 군수가 가진 힘이 컸다. 군과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은 돌아선 군수를 따라 집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남았다. 누구 하나 여유로운 사람이 없지만, 없는 시간, 없는 여력을 쪼개서 나오는 사람들과 오히려 더욱 끈끈해져 갔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를 담금질했다.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 공동위원장들과 함께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종희 씨(가운데).

힘들 때도 잦았다. 결국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의 공동위원장도 맡았다. 참외 농사를 벌여놓은 처지라 언제나 시간 내서 오지는 못했다. 성주로 돌아온 계기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 했던 것인데, 싸운다는 것은 아무리 옳다고 해도 힘든 일이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받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희망을 본다. 집회에 나오지 않던 친구나 후배들이 조금씩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제3부지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다. 도저히 저 친구 입에서는 나오지 않을 줄 알았던 소리. 미안합니다. 힘내십시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말을 듣게 됐다. 지난 3월 국민학교 25회 동기 모임 둘오회를 한 식당에서 열었다. 술잔을 따라 놓고 한마디씩 했다. 나는 소성리에서 애먹는 할머니들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소성리에라도 들러달라고 말했다. 앞에서도 수차례 비슷한 요청을 했었는데, 당시에는 냉소적이던 친구들이 관심을 표하더니, 급기야 조를 짜서 한 번씩 가자고 이야기가 나왔다. 후원하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어떤 친구는 29일 열린 수요집회에도 왔다. 내가 다니는 산악회도 4월 8일 계획했던 등산을 취소하고, 같은 날 소성리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범국민 평화행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들이 시각을 바꾼 게 나 때문인 건 아니다. 우리 촛불이 이제 270일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촛불을 들었다. 군청이 관변단체를 주무르는 그런 사회만 경험하던 친구들은, 촛불에서 다른 세상을 볼 것이다. 꺼지지 않는 촛불에서 이 투쟁이 얼마나 질기고, 중요하고,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인지 느낄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느 한 사람 손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들이 생각하던 민주주의는 정치인에게 사회를 맡겨두고 방관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참여'에 대해서도 생각할 것이다. 작지만,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내가 사드 반대 투쟁으로 고향을 재발견하는 것처럼, 그들도 나름의 메시지를 받을 것이다. 나의 향수도 그들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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