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촛불열전] (6) 동남청년단 이민수, ‘뺑소니’ 황교안과 맞짱뜨다

'황교안 뺑소니' 이후 마주한 새로운 삶...국가가 그를 싸우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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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3 15:13 | 최종 업데이트 2017-04-13 15:59

[편집자 주=2016년 7월 13일 국방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성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자파부터 남북관계, 한중관계 경색까지. 성주 주민들은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성주읍내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바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월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 부지로 바뀌었고, 국방부가 사드 포대를 반입해왔지만, 사드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뉴스민>은 성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만난 성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성주촛불열전]을 매주 월, 목요일 연재한다.]

그날, 자동차 핸들을 왼쪽으로 꺾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성주 사람 이민수(39) 씨는 그날 사건으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됐다. 2016년 7월 15일, 황교안 국무총리,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몽골로 순방 간 박근혜 전 대통령 대신 성주에 온 그 날은 수많은 성주 사람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황교안 총리가 오전 11시 성주군청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이민수 씨는 D부동산에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당시 성주군청 앞에는 군민 1천여 명이 모여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사드배치 결정을)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을 송구하게 생각한다"는 황 총리 말이 떨어지자 달걀과 물병이 쏟아졌는데, 그런 소식에도 이민수 씨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중간에 오피스텔 신축 현장에서 일을 보다가 성주고 학생들이 군청 가는 차편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태워줬을 뿐이다. 이날 저녁 읍내에 사는 아버지와 저녁 약속을 떠올리며 민수 씨는 오후 5시 퇴근 후 집으로 향했다. 집에는 큰딸(11, 당시 10살)이 있었다. 딸은 군청에서 벌어진 사단에 관심이 많았다. 앞서 같은 학교 친구들 몇몇이 등교를 거부하거나 조퇴하고 배정하(43) 씨 등 학부모들과 시위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민수 씨는 학교 공부에 충실한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쌍둥이(8, 당시 7살)를 챙기느라 바빠, 딸은 함께 갈 사람이 없었다.

"아빠, 나도 군청에 가보고 싶어. 친구들은 다 조퇴하고 나갔단 말이야"
민수 씨는 상황이 어수선하고 위험하다고 느끼면서 설명했다.
"지금은 경찰도 많이 있고 사람들이 많이 화가 났어. 몸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고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어. 괜찮겠니?"
"응, 멀리서 보면 되잖아"
"그래. 너도 봐야 하니까 가보자"

민수 씨는 딸과 함께 군청으로 갔다. 딸은 민수 씨 손을 꼭 잡았다. 도착 시각은 오후 5시 30분. 이미 황 총리는 없었다. 아버지와 저녁을 먹기 위해 아내를 불렀다. 아내는 유치원을 마친 쌍둥이를 데리고 집에 있었다. 군청에서 경산네거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 경찰 무전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무심결에 들었다.

"VIP 빠져나감"

하늘을 보니 헬기가 날아다녔다. 민수 씨 머릿속에서 성산포대가 떠올랐다. 헬기가 갈 곳은 성산포대밖에 없다. 딸은 친구의 아버지가 경찰에게 제압당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전날 "아빠는 왜 군청에 나오지 않았어"라고 묻던 딸의 눈빛도 생각났다.

'내가 실수를 했구나.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겠구나'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민수 씨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성산포대로 가보겠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친구들이랑 있을래요. 여기서 살고 싶어요"

아내 차를 타고 성산포대로 갔다. 오후 6시, 성산포대는 한산했다. 오줌이 마렵다는 아이는 내려서 소변을 봤다. 그때 처음 보는 차 한 대가 왔다. 상황이 끝났다고 했다. 사드 반대 현수막이 차 안에 있는걸 보아 주민이었다. 그 차는 방향을 틀어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끝났다고 생각한 민수 씨는 아이들을 추슬렀다. 차를 몰고 아래로 향하던 순간, 경찰차 한 대가 올라왔다. 그 뒤로 수상한 차 한 대가 따라왔다. 흰색 소나타였다.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동요 소리가 심장박동 소리에 묻혔다. 직감이 뇌리에 스쳤다. 누군가 탔을 것이다. 경찰차가 스쳐 지나갔다. 언덕 중턱에서 민수 씨는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그러면서 민수 씨 삶도 갈림길을 지났다.

비스듬히 차를 댔다. 경찰 서너 명이 나타났다. 무어라고 말하는 입 모양이 보였으나 들리지 않았다. 되물어보려는 찰나,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와 발길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차를 밀었다. 길가로 차가 밀리자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멈춰섰다. 난타가 시작됐다.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손이 안 들어올 정도로 창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있다고, 내릴 테니 그만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들리지 않았다. 곤봉이 운전석 유리창을 깼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이들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왼팔로 유리창 파편을 막고 오른팔로 아이들을 감쌌다. "밀어"라는 소리와 함께 차가 밀렸다. "쿵"하고 흰색 소나타가 뒤범퍼를 치고 성산포대로 올라갔다.

▲7월 15일 황 총리 탑승 차량이 들이받고 부서진 이 씨의 차량. 황 총리 일행은 이 씨 차량을 그대로 두고 성산포대로 향했다.

이민수 씨는 흰색 쏘나타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이후 언론 취재로 흰색 소나타에 황교안 총리가 탔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당시 현장에 있던 경찰은 설명도 없이 공무집행방해라고만 했다. 사후 조치도 없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거부했다. 아내는 전화로 112에 뺑소니 신고했다. 성주파출소에서 출동한 경찰에게 신분증을 보이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 그날 오후 8시,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차량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 말이 없었다. 뺑소니 혐의에 대한 조사도 없었다. 딸은 그날 밤 갑자기 벌떡 일어나 경기를 일으켰다. 쌍둥이도 깨어 같이 울었다. 아이들을 보며 민수 씨도 눈물을 흘렸다. 사흘 동안 밥숟갈을 들지 못했다. 잠도 못 잤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폐인 같은 날이 흐르는데, 어느 기사에서는 민수 씨가 후진해서 총리 차를 박았다고 했다. 돌연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됐다. 페이스북 계정이 일베에 떠돌더라는 말이 들렸다. 종북빨갱이, 가족보험사기단이라는 말도 떠돌더라고 했다. 휴대전화 도청 확인 앱을 받았다. 아내는 정상이었으나, 민수 씨 휴대전화는 도청 중으로 확인됐다.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다 사흘이 지났다. 얼굴이 바짝 말랐다. 18일 새벽, 정신을 차려보니 이민수 씨는 체육복에 슬리퍼를 신은 채 낙동강 앞에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선원리 남쪽 골짜기까지 차를 몰고 왔다. 강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 얼굴이 스쳤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이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아이들을 바라봤다. 민수 씨는 한참을 울었다.

소문이 걱정됐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취재 전화. 확산되는 소문. 소문에는 있지도 않은 중앙선이 생겼다. 민수 씨가 있지도 않은 중앙선을 넘어 총리 차량을 들이받았다. 딸은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으며 또 울었다. 혹시 학교에서도 다른 얘기를 듣는 게 아닐까? 연락도 없던 서울 친구도 전화로 말했다.

"야, 니가 후진해서 박았다며? 중앙선 넘었다며?"

원체 소심한 딸은 트라우마도 큰 듯했다. 대구까지 나가 심리검사를 받았다. 그나마 이겨낼 수 있을 만한 트라우마라는 상담사 말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딸은 경찰만 보면 몸을 숨겼다. 8월, 지나가는 경찰차를 보고 딸은 자동차 조수석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본 민수 씨 가슴이 찢어졌다. 집에 딸과 둘만 남은 8월 어느 날, 딸에게 물었다.

"아빠가 그날 괜히 군청에 데리고 갔는갑다"
"··· 아빠가 우릴 지켜주려고 한 거 다 알아"
"··· "
"··· 미안해. 아빠가 이제는 정신 차릴게"

경상도 남자 이민수
객지생활하며 성격다듬어
자식 키우려 여러 직업 진전
부동산업에서 성주 '줄서기 사회' 배우다

민수 씨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참외농가에서 태어나 아버지 농사를 돕다 보니 성격도 아버지를 닮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참외 스티커 작업부터 참외 거지기(거적, 하우스 내 참외 줄기 주변을 덮는 물건) 덮는 일까지 자질구레한 일이 민수 씨 몫이었다. 공부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육상부에 들었다. 5교시부터는 운동 시간. 출발 신호에 맞춰 뛰고, 뛰어서 이기면 되는 달리기가 좋았다. 복잡하지 않고, 이기면 희열감도 줬다. 육상으로 먹고살 생각은 없었다. 수업을 안 듣는 게 좋았고, 가끔 시합에 나가는 날이면 며칠씩 학교를 땡땡이치는 것도 좋았다. 아홉 살부터 열아홉까지 육상부를 했으니 끈기는 있는 편이었다.

1998년, 구미에 있는 대학에 갔다가 한 학기가 끝나기 전에 그만뒀다. 공업고등학교 자동차과를 나와 대학교 전기과에 갔더니, 수업을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미련은 없었다. 마음 한켠에는 참외농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보증수표처럼, 혹은 과업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친구도 없었다. 객지이기도 했지만, 아버지를 닮아 표현을 하지 않는 성격이 문제였다. 친구를 사귀기 위해 성격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음료수를 들고 거울 앞에서 연습했다. '친구야 음료수 한잔하자', '음료수 같이 마실래?',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짐짓 우스웠다. 그래도 노력하는 만큼 성격은 바뀌었다. 제대 후 울산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왜관 삼성제침을 거쳐 2007년부터 계명대학교 인근 휴대전화 매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폰팔이는 적성에 맞았다. 성격을 바꾸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젊은 여자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 결혼은 볼링 치러 가서 만난 고향 사람과 2006년에 했다.

다양한 일에 전전했다. 건강 악화로 폰팔이를 그만두고 성주로 들어왔다. 가구회사에 잠시 일하다 끝으로 D부동산에 취직했다. 아이가 셋이나 태어나자 민수 씨는 닥치는 대로 어느 일이나 했다. D부동산에서는 토지개발을 도맡았다. 개발할 땅을 매입하는 일, 장비 관리에 개발 업체 관리가 민수 씨 몫이었다. 부동산업 세계는 처음이었지만, 의욕적으로 나섰다. 사업의 핵심은 군청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각종 개발 허가권이 군청에 있기 때문이다. 사장이 군청과 만나는 일을 도맡아 했다. 한두 개발부서만 만나는 게 아니었다. 사장은 군청에 줄을 잘 댔다. 사장의 사업 수완을 보며 이민수 씨는 생각했다.

'성주는 줄이구나'

사장은 당시 집권당이었던 새누리당 가입을 권했다. 당시만 해도 소위 '조중동'만 믿던 민수 씨는 거부감 없이 가입했다. 참외농사 덕에 성주는 부유했고, 민수 씨 일은 힘들지만 먹고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태평한 세월, 성주 밖 이야기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평온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보고도 민수 씨는 외려 유가족이 너무한다는 투의 '조중동 류 보도'에 마음이 끌렸다. 이회창을 찍고 이명박을 찍고 박근혜를 찍었다. 박근혜 정부는 사드를 들여왔다.

뺑소니가 억울해서 나선 투쟁
뺑소니 수사는 안 하고 공무집행방해라니?
제3부지 발표후 부동산도 그만둬
참외농사 과업 잇다

7월 13일 성주 성산포대 사드 배치 발표 이후 성주군은 하나같이 들끓었다. 김항곤 군수마저 혈서를 쓰고 삭발했다. 사장 역시 사드 반대 투쟁에 나섰다. 사장은 민수 씨에게도 반대 운동에 나서라고 했다. 민수 씨는 그길로 약 한 달을 군청으로 출근했다. 군청에는 여러 단체 천막이 놓이고 서명부스도 들어서면서 언제나 사람으로 붐볐다. 민수 씨는 7월 15일부터 시작된 '위 더 피플(We the People)' 백악관 청원 서명운동에 두 팔 걷고 나섰다. 그는 새누리당 탈당운동에도 참여해 탈당했다.

▲2016년 7월 19일 새누리당 탈당계를 작성하는 이민수 씨.

억울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올 수 있는 계기는 사장이 마련해 줬지만, 국무총리에게 '뺑소니' 당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경찰에게 가해자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투쟁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외로운 싸움도 시작됐다. 애초 파출소에 신고한 '뺑소니' 사건은 진척도 없는데,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민수 씨에 대한 수사만 시작했다. 9월 7일, 경찰은 민수 씨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그날도 민수 씨는 ㄷ부동산으로 일찍 출근했는데, 오전 9시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유치원 앞 공터에 애들 내려주고 나왔는데 경찰이 나를 잡았어"

집으로 달려가니 기다리던 경찰이 민수 씨 휴대전화를 압수했다. 자동차와 자택까지 수색한 끝에 경찰은 핸드폰 2개, 하드디스크를 가져갔다. 억울했다. 그날 사건으로 민수 씨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됐는데, 오히려 수사를 받는다니. 명절이면 친척은 군청에 나간다는 민수 씨에게 빨갱이 소리를 해댔다. 식당에서는 얼굴을 알아본 손님이 곁눈질하며 수군대기도 했다. 민수 씨는 국가에 맞서 법률대응을 준비했다. 일상이 투쟁으로, 온 가족이 투사가 되는 듯했다.

상황은 조금 변해있었다. 8월 22일 김항곤 성주군수의 사드 '제3부지' 발표 이후, 투쟁을 접는 사람들이 나왔다. 여러 관계로 얽힌 성주 사회에서, 군수와 면 받힐 일을 하기는 어렵다.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민수 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투쟁에 열의를 보였다. 현장직원들과 밥을 먹던 어느 날, 사장으로부터 회사를 쉬라는 말을 들었다. '밥 먹는데 왜 지X이고···' 민수 씨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이제 농사지어야 할 거 같습니다"

자식에게 힘든 업을 이르게 물려주는 게 마음에 걸렸던 아버지도 마음을 돌렸다. 경찰조사에 소송까지 나서는 아들이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기는 이미 어려워 보였다. 11월 1일 이민수 씨는 ㄷ부동산을 나와 참외농사를 시작했다. 같은 달 16일 이민수 씨 부부와 자녀 5명은 차량을 부순 경찰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나섰다.

▲2016년 11월 16일. 이민수 씨와 성주군민들이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경찰의 과잉 대응을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투쟁은 옛 것을 가져가고
새로운 것을 주었다
'동남청년단'과 함께 '빵야' 열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끝까지 간다

투쟁에 나서며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인간관계도 그중 하나다. 어릴 적 육상부에서 사귄 동네 친구들마저 멀어졌다. 그 친구 세 명 만큼은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민수 씨는 각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토로했다. "미친 거 아니냐. 도대체 왜 그랬어?" 하나같이 같은 반응을 확인하고는 그들과 연락을 끊었다.

그 빈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채워졌다. 같이 투쟁하는 사람들.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위로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또래가 모여 만든 '동남청년단'은 친구보다도 더 돈독한 관계가 됐다. 투쟁위 청년분과에 들어가며 만난 김상화(38), 방민주(39)와 마음이 통했다. 촛불집회가 끝나는 밤마다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들은 결국 '동남청년단'을 만들었다. 서북청년단이란 단체가 현수막을 걸고 '사드 괴담' 운운하자, 서북청년단과 맞짱 한번 떠보자며 즉흥적으로 '동남청년단'을 만들었다. 동남청년단은 집회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다. 심지어 성주시장에 점포를 얻어 공동상점 '빵야'도 열었다. 상화 씨는 채소를, 민주 씨는 커피와 참외빵을 팔고 이민수 씨는 참외 효모를 공급하기로 했다.

'뺑소니로 액땜했으니 올해는 동남청년단과 함께 대박 나기를··' 지난 2월 1일 빵야를 오픈하며 이민수 씨는 빌었다.

▲빵야에 모인 동남청년단. 왼쪽부터 김미영, 방민주, 이민수, 김상화 씨.

돌이켜보면 사드 배치 발표 후 몸서리칠 정도로 힘든 나날들이었다. 민수 씨에게 이날들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기억이다. 어린 시절 부끄럼 때문에 발표도 못 했던 민수 씨가 촛불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기까지. 국가를 상대로 싸우게 만든 것은 국가였다. 그날 핸들을 꺾지만 않았다면, 민수 씨는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 민수 씨는 말한다. 핸들을 꺾어 차도 잃고, 직장도 잃고, 친구들도 잃었다고. 대신 다른 소중한 사람을 더 많이 얻었다고. 사람 보는 눈, 세상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앞으로는 이전처럼 살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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