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촛불 열전] (10) 배윤호의 무한도전

"사드를 물리치는 것 만큼이나 성주의 변화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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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2016년 7월 13일 국방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성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자파부터 남북관계, 한중관계 경색까지. 성주 주민들은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성주읍내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바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월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 부지로 바뀌었고, 국방부가 사드 포대를 반입해왔지만, 사드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뉴스민>은 성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만난 성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성주촛불열전]을 비정기적으로 연재한다.]

배윤호(61) 씨의 집은 가천면 야산 중턱에 있다. 산속에 덩그러니 놓인 집에는 온실이 하나 딸려 있다. 그곳에는 분재 수십 개가 찜질방 냄새를 풍기며 들어앉아 있다. 분재를 한 번 팔아보려다 썩 재미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밀짚모자를 쓰고 분재를 다듬는 모습이 산속 적막처럼 차분했다. 녹차를 한 잔 마시고 있자니 동네 사람 둘이 들렀다. 그들에게도 차를 내며 이야기를 나눈다. 안빈낙도가 따로 없다. 사드 반대 투쟁 초반부터 마이크를 잡고 연설했던 배윤호 씨는, 사실 초야에 묻혀 살기를 즐겼다. 2016년 12월, 자신이 두드러져서는 안 된다며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공동위원장직을 내려놓은 배윤호 씨. 그는 인터뷰에 응하면서도 자신 개인을 부각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칼바람 부는 겨울에도 화목난로를 피운 작은 집이 훈훈하다. 종종 배윤호 씨 집을 찾는 사람들의 온기도 더해진다. 방 한 칸을 빼곡히 둘러싼 책은 단열재 노릇을 한다. 책장 가장 위쪽에는 함석헌의  『너 자신을 혁명하라』가 꽂혀 있다. 그 책이 무서워 읽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윤호 씨의 삶은 그 책 제목처럼 탈피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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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씨 문중에서 받은 엄격한 교육
문중의 세에 자부심 느끼다
12살에 나간 대구
삼촌 집에 얹혀살다 가출…직업소개소 전전
두 번 가출 끝에 다시 성주로

배윤호 씨의 도전은 문중을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는 성주 배 씨 집성촌이다. 윤호 씨가 막 태어난 55년 도남리 120가구 대부분이 배 씨 문중에 속했다. 법도를 바로 잡는 일이나, 교육도 모두 문중에서 해결했다. 문중 어른은 다섯 살에 천자문을 가르쳤고, 일곱 살에 명심보감을 가르쳤다. 문중 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문중 재판을 받았다. 재실에서 열리는 문중 재판에서는 남의 물건을 탐했다거나 하는 범죄 혐의를 확정지으면 멍석에 사람을 눕혀놓고 말아 곤장을 쳤다. 문중 총회에서는 가문 사람 결혼에도 개입했다. 만약 결혼할 사람의 조상이 배 씨 문중과 원수 집안이라면 결혼을 불허했다. 문중의 관습은 지역 문화로도 남았다.

이는 훗날 사드 사태에서도 확인된다. 배윤호 씨에 따르면, 사드 배치 발표 이후 당장 수천 명이 군청으로 쏟아져 나온 것에는 성산 이씨 등 지역 문중 반발의 영향도 있었다. 사드 배치 지역이 성주읍 성산포대에서 제3부지로 넘어가면서 반대 운동의 세가 줄어든 것에도 문중의 영향이 끼쳤다는 이야기다.

문중의 정체된 관습 중 하나인데, 20세기 말 갑오개혁으로 사라진 노비제도가 문중에 여전히 이어졌다. 돌이라는 문중 종이 있었다. 집안 6대조가 들인 종의 후손이다. 배윤호 씨가 30리 떨어진 외갓집을 갈 때면 종은 어린 배윤호 씨를 업어 모셨다. 설날에는 배윤호 씨에게 세배도 했다. 엄격한 유교 문화 속에서, 종은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절했다. 이 종에게 배윤호 씨는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나이 차이가 서른 살 정도라 존댓말이 나올 때면 어른들은 대뜸 ‘아랫것한테 말을 높인다’며 나무랐다. 문중 어른들은 시시콜콜 ‘양반’을 강조했다. 보학(譜學) 교육도 엄격히 받아 남을 볼 때 집안을 보는 버릇도 생겼다. 어른들의 교육에 국민학교 시절 윤호 씨는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 당시 국민학교는 인근 다섯 개 마을에서 학생들이 왔는데, 도남리에서 온 학생들이 한 문중이다 보니 교내에서도 세가 컸고, 세력이 생겼다.

8살에 어머니가, 10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대구 사는 삼촌이 윤호 씨를 돌보게 됐다. 대구시 고성동에 살던 삼촌은 양말공장을 했다. 집 앞에는 개울이 흘렀고, 교회가 하나 있었다. 학교를 오가며 교회를 눈여겨보곤 했다. 대구로 와서는 약간의 혼란을 느꼈다. 12살, 사회 교과서를 잃어버리고 헌책방에 가 봤더니 배윤호 씨의 책이 꽂혀 있었다. 잃어버린 책을 다시 사고는 문중과 다른 사회를 느꼈다. 문중 생활은 경쟁 없는 공동체 생활이었다면, 사회는 경쟁과 불신이 가득한 곳이었다. 윤호 씨는 틈만 나면 백지에 농장을 그렸다. 사과나무를 그리고 돼지도 한 마리 그려 넣었다. 얼른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공부에는 취미가 있었다. 썩 잘하지는 못했다. 삼촌 일을 돕느라 시간이 부족했다. 가고 싶던 고등학교에 떨어져 진학을 포기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했지만, 그 또한 시간이 부족해 녹록지 않았다. 삼촌은 낮에 일을 도우라고 했고, 검정고시 학원에서는 낮에도 공부하러 나오라고 했다. 또, 삼촌은 윤호 씨가 가고 싶던 농업고등학교보다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했다. 의견이 맞지 않은 차, 윤호 씨는 17살에 삼촌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오면 공부도 진로도 자유로워질 것으로 생각했다. 남쪽으로 내려가 달성공원에 갔다. 무작정 그곳 직업소개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알고 보니 주점에 여성을 알선하는 곳이었다. 사장 얼굴은 뜻밖에 괜찮아 보였다. 윤호 씨에게 직업을 소개해주지는 않았지만, 허드렛일이나 하며 끼니를 제공해 줬다. 부수입은 여성 직원들에게서 얻었다. 그들은 씀씀이가 컸다. 술담배 심부름을 해가며 돈을 모았다. 푼돈을 얻어 쓰면서도 윤호 씨는 어렵게 돈 벌어 헤프게 쓰는 그들이 우스웠다.

여섯 달 정도 같은 생활이 지났다. 정작 공부는 꿈도 못 꿨는데, 제 발로 나온 입장에서 다시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사촌 동생이 달성공원에 왔다가 윤호 씨를 발견했다. 어른들은 당장 달성공원으로 와서 윤호 씨를 잡아갔고, 다시 삼촌 집에 보내 일을 시켰다. 삼촌 공장에서 만든 양말을 서문시장에 배달하는 일을 맡았다. 어느 날 배달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도저히 면목이 없었던 윤호 씨는 다시 같은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사장에게 멀리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부산 영감에게 윤호 씨를 보냈다. 훗날 짐작건대 부산 영감은 여직원을 부산으로 들이는 업자였고, 윤호 씨도 헐 삯에 사들인 것이었다. 다시 문중으로 끌려갈 것이 두려웠던 윤호 씨는 가지고 있던 5만 원 통장을 담보로 맡겼다. 부산에 간 윤호 씨는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했다. 8개월쯤 일하고는 대구 직업소개소에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소개소에 진을 치던 문중에 걸려 다시 붙잡혀 들어왔다. 집안 회의가 열렸다. 윤호 씨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공부는 안 되겠다. 두 번의 가출 끝에 결국 윤호 씨는 성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살, 농사는 처음 짓는 것이지만, 어떤 일보다 좋았다. 문중에서도 더이상 성주 밖으로 윤호 씨를 보내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게 없다 보니 꼴망태를 메고 소 먹일 풀이나 뜯으러 다녔다. 그것이 자유였다. 쉬지도 않고 풀을 뜯다 보니, 소가 살이 쪄 번지르르했다.

농사의 기쁨
참외가 들어오며 생긴 성주의 욕심
서재에 꽂힌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다
기독교의 한계를 체감하고 농민운동에 나서기까지

70년대 중반, 그때만 해도 도남리는 농사가 생활이던 시절이었다. 안 가도 되는 군대를 모르고 갔다가 마을 이장 도움으로 1년 만에 제대하고 보니, 도남리도 많이 변했다. 참외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쌀이나 보리, 밀 농사를 짓던 옛날과 달리 도남리에도 참외가 들어오며 부유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욕심이 생겼다. 이전보다 부유해졌는데, 인심은 각박해졌다. 윤호 씨는 이런 분위기를 아쉬워하면서도 덩달아 참외 농사에 나섰다. 당시 참외 판매는 서울 상인들에게 위탁했다. 상인들은 정보를 많이 가진 농민이나 마을 안에서 영향력 있는 농민과 거래하기를 선호해, 시세보다 납품 가격을 더 쳐줬다. 그 사람과 거래하면 다른 사람의 신뢰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고 봤다. 윤호 씨도 참외 가격을 잘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윤호 씨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공정하지 않고, 요행으로 돈을 번다고 생각했다. 당시 기독교에 빠졌기 때문이다. 어릴 적 삼촌 집 근처 교회를 보며 호기심을 키워두었고, 우연히 성경을 접하며 인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성경은 훗날 목사가 된 사촌 형 서재에서 봤다. 철학과 문학 서적을 다 읽고 볼 게 없어 성경을 집어 들었다. 윤호 씨는 신약 가장 처음에 나오는 마태복음에서 지옥을 알게 됐다. 눈이 잘못하면 빼내는 것이 지옥 가는 것보다 낫다는 구절(5장 29절)이었다. 그 길로 교회에 빠졌다. 2km 떨어진 교회에 매일 새벽 기도를 갔다. 아침을 알리는 종을 윤호 씨가 맡아서 쳤다. 새로운 세상을 접한 기분이었다. 문중의 의례에 무조건 순종하던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제사에서 특히 부딪혔다. 성주는 선조 제사에 묘사(5대조 윗대)까지 챙기며 제사에 엄격했다. 문중 사람들이 보기에 제사는 안 챙기고 새벽부터 교회에 가며 찬송가를 부르는 윤호 씨는 어딘가 잘못됐다.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윤호 씨는 문중회의에 오라는 말도 흘려듣고 나가지 않았다.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 큰 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복은 금전적 복이었다.

1980년, 중졸도 갈 수 있는 야간 신학원에 들어갔다. 농촌 교회에서 깊은 수준의 신학을 접하지 못한 윤호 씨는 신학 지식에 목말라 있었다. 신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려고 했다. 입학하자마자 수업 거부 사태가 벌어졌다. 3, 4학년들이 저학년에게도 수업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무슨 일이든 기독교인은 순종해야 한다고 배운 윤호 씨는 학생의 데모에 동의하지 못했다. 학비 내놓고 공부도 못하는 것이 아까웠다. 그러던 차, 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김소영 목사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 신문을 들고 목회해야 한다고 했다. 세상과 동떨어지지 말고, 자기 혼자 잘 사는 것이 아닌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윤호 씨는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아모스 서 2장 6~7절)

성경도 새로 봤다. 이전에는 다윗과 솔로몬 왕에게 마음이 끌렸는데 이제는 그들에게 가려진 수많은 백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모스 선지자는 당시 물질의 풍요로 부패한 부유층에게 일갈했다.

1983년, 성주에서 소를 키우던 사람이 목숨을 끊었다. 농가 부채 문제였다. 군청이 나서서 문상 행렬을 일부 막았다. 윤호 씨는 의문을 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비닐하우스가 날아가는 바람에 또 목숨을 끊었다. 농가 같은 문제로 보였다. 농업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86년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마을로 농활을 왔다. 하지만 파출소 직원들이 쫓아냈다. 윤호 씨는 그들이 소란을 피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87년 영남대학교 학생들이 농활왔을 때 태도가 바뀐다. 그 사이 소성리 마을 주민 임순분 현 부녀회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농민운동을 처음으로 만났다. 한국 농업 문제와 농민 단결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우리가 조직하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길 수 있습니다. 농민 문제 해결할 수 있어요”

영남대 농활단과 어울렸고, 농민회원과도 교류를 시작했다. 농민운동을 접하고 보니 주변의 여러 문제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정자들은 나서서 문제를 개선하지 않았고, 결국 당사자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순응해야 한다고 여겼던 윤호 씨는 처음으로 사회에 맞서기 시작했다. 성주군에서 부당하게 부과하던 부역과 잡부금을 거부했다. 여럿이 뭉쳐 목소리를 내니 뜻밖에도 수월하게 상황이 바뀌었다. 길가 옹벽에 스프레이로 벽서를 썼다. “부당 부역 거부! 군수 규탄!” 윤호 씨가 순종에서 투쟁으로 태도를 바꾼 순간이다. 군의원에도 출마했다. 1991년, 31년 만에 부활한 지방선거에 출마했다 낙마했다. 변화를 위해서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 번 출마하고 나서 마음은 접었다. 이후에도 윤호 씨는 성주 읍내 유선방송사를 인수해 여론활동을 하거나, 자연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전면에 서고 싶지 않았던 사드 반대 투쟁
사드 저지 만큼 중요한 성주의 변화

▲배윤호 씨

또 다른 도전의 순간이 찾아왔다. 사드 반대 투쟁이다. 2016년 7월, 성주에 사드가 배치된다고 국방부가 발표했다. 13일 오후 3시, 국방부 공식 발표 전, 이미 12일 성주군민 사이에 성산포대로 사드가 배치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전 성밖숲에서 열린 집회에 5천여 명이 모였다고 했다. 세를 본 윤호 씨는 당시 투쟁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면서 반대 투쟁에도 나서게 됐다. 전면에 서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상황은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7월 13일 성주군민들이 군청에서 촛불을 밝힌 첫날부터 마이크를 잡게 됐다. 사회를 보던 이재동 성주군농민회장이 군청에 모인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넘겼고, 자유발언에 나선 배윤호 씨는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사드 배치를 비판했다. 투쟁 초기, 윤호 씨는 언론에 나온 사드 관련 소식을 모아 브리핑했다. 당시 다수 언론에서 ‘외부세력’ 프레임으로 성주군민 투쟁을 호도하던 시기다. 언론 보도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비판하는 윤호 씨더러 성주군민은 ‘핵사이다’라며 호응했다. 우연인지 윤호 씨 집 뒤쪽 산책로에서 삐라가 발견됐다. 배추 종자 종이인 줄 알고 주운 종이가 삐라인 걸 알자 아차 싶었던 배윤호 씨는 기자들에게 제보하고 파출소에도 신고했다.

불가피하게 나서는 일이 많아졌다. 군수와 만나 제3부지 요청을 하지 말라고도 했다. 김항곤 군수는 윤호 씨에게 “대통령이 하는 일을 어떻게 막겠나”라고 했고, 다음 날 바로 성산포대가 아닌 제3부지 검토를 국방부에 요청했다. 윤호 씨는 주민소환제에 나서서 군수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3부지를 건의한다는 건 제3부지 주민을 저버리는 일이고, 동조할 수 없었다. 군수 주민소환을 위해 투표권자 1/3 이상 투표를 성사시키긴 쉽지 않지만, 설령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해도 주민의 힘을 모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민소환제를 두고도 의견이 분분했고, 결국 본격적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군청 앞 항의 농성 중인 배윤호 씨

9월 30일 국방부가 사드 배치 최적지를 성산포대에서 초전면 롯데골프장으로 바꿔 발표했다. 그 당시는 보름가량 성주문화원 앞 인도에서 집회가 열리던 시기다. 안전문제 등이 불거지며 투쟁위는 9월 26일 군청 마당으로 촛불집회 장소를 옮기도록 군청과 협의했다. 제3부지 발표 이후 집회장소를 옮긴다는 조건이 붙었는데, 당시 투쟁위는 제3부지 발표에 빠르게 나서지 못할 것으로 봤다. 10월 1일 김항곤 군수는 군청 마당에서 촛불집회를 열 수 없다고 통보했고, 2일 윤호 씨는 군청 현관 앞에서 가장 먼저 연좌 농성을 시작했다. 오기를 느끼고 사흘을 내리 농성했더니 부담을 느꼈는지, 군수도 다른 집회 장소로 문화원 앞을 제안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윤호 씨는 한계를 느꼈다.

사드를 막아내는 것만큼 성주가 변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당장 사람들이 바뀌기는 쉽지 않았다. 변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움을 느꼈지만, 윤호 씨는 위원장이 아닌 다른 위치에서 역할을 찾기 위해, 지난해 9월부터 맡았던 투쟁위 공동위원장직을 12월 18일 내려놓았다. 묵상을 거듭하며 생각했다. 투쟁 초기부터 전면에 나선 것이 조급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당장 필요한 얘기를 윤호 씨가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결국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변하는 만큼 투쟁의 성과로 남는 것이 아니었을까.

▲성주투쟁위 공동위원장 사임을 밝히는 배윤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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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호 씨가 책장에 함석헌의 책을 꽂아 두고도 읽지 못한 이유는 두려워서라고 했다. 젊었다면 망설이지 않았겠지만, 이제와서는 알면서 행하지 않게 될까봐 무섭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촛불 투쟁을 기록하며 자기를 내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문중의 세에 자부심을 느끼는 어린 시절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기독교 신자에서 농민운동가로, 또 사드 저지 투쟁에 나서기까지. 행하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는 말에 여러 순간에서 묵상하며 고민하는 배윤호 씨의 모습이 그려졌다. 묵상하며 행동한 배윤호 씨의 발걸음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함께 사드 저지 투쟁의 족적을 이뤘다.

▲2016년 9월 17일 사드 배치 철회 촛불집회에 참석한 배윤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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