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미화원 (4)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가난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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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9 13:18 | 최종 업데이트 2015-08-19 13:18

18.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연상과 기억을 불러온다. 어쨌든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가난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70년대 초까지, 걸식하러 집에 찾아오는 거지나 헌 옷이나 빈 병 등을 주워 연명하는 넝마주이는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극빈자들이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젊은 부부가 동냥하러 나타난 적은 없던 듯싶다. 언제부턴가 이들은 마을 입구에 놓인 다리 밑에서 다리를 지붕 삼아, 이불을 벽 삼아 자리 잡고 살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장마로 개천에 물이 불어난 어느 날, 그들의 어린 자식이 익사하는 사고만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들 부부 역시 마을 주변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떠돌이에 불과했을 터이다.

이들 부부를 생각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게 크리샤 고타미에 관한 일화다. 뒤집어서 크리샤 고타미를 생각하면 반드시 이들 부부가 떠오르기도 한다.

붓다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크리샤 고타미라는 여인은,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자식이 질병으로 죽자 아이를 살릴 방법이 없느냐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애원했다고 한다. 무작정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이 가엾은 모정을 딱하게 여긴 어느 현자가, 붓다를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여인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던 붓다는, 크리샤 고타미에게 겨자씨 한 알을 구해오라고 요구한다. 단, 조건이 있다. 죽음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집에서 얻어온 겨자씨라야 할 것!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떠한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부부에 대한 기억과 ‘티벳 사자의 서’에 나온다는 크리샤 고타미의 이야기가 붙어 다니는 이유란, 내가 보았던, 죽은 아이를 안고서 실성한 듯 외치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 일화의 장면과 정확히 겹치기 때문이다. “우리 애가 죽었어요! 아줌마, 아저씨, 누가 얘 입에 물 한 모금만 넣어줘 보세요.” 넋이 빠진 여자는 다리 위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느라 둘러선 우리를 향해 흐느꼈었다. 구경꾼 중에서 “미친년 아니야, 물 먹고 죽은 애한테 물을 먹여보라니.”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 아낙네의 그 새된 목소리만큼 내게 무정함이나 무자비함을 연상시키는 건 없다. 남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더라도, 무정함이나 무자비함은 그것 자체로 충분히 악하다.

가난에 대해 생각하다가 가난한 부부가 기억났고, 가난한 부부에 대한 기억이 크리샤 고타미의 일화를 떠올리게 하였다. 요컨대 지자체의 정규직 환경미화원이 아닌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환경미화원으로서의 내 노동 가치는 2015년 현재 기준으로 시급 5,580원이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최저임금’이다. 강조하건대 나는 짬을 내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다. 하루 8시간이라는 시간과 한계치의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봉급은, 내가 적어도 까마득한 과거로 돌아가 살지 않는 이상,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하기에 터무니없는 재화다.

어린 시절의 내가 목도했던 가난이 절대적 빈곤이었다면, 오늘날의 가난은 상대적 빈곤이라고 흔히 말들을 한다. 스스로 노력하는 한 ‘절대로’ 절대적 빈곤은 없으며, ‘더’ 부르주아적이거나 ‘덜’ 부르주아적인 삶만이 존재하며, 자본주의적 욕망에 시달리는 상대적 박탈감이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지닌 문제점이라고 말이다. 그렇더라도 자본주의적 인류의 각성과 보편적 가치를 일깨우는 논의가 ‘가난’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쪽으로 기울어서는 곤란하다. 곰곰이 따져보자. 노숙자나 쪽방 신세를 면할 정도의 경제적 수준이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걸까? 오로지 ‘먹고 사는’ 데에 그치는 동물적 삶이?

이처럼 현대의 가난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자본가/비자본가 혹은 자본가/노동자로 계급을 구분함이 대단히 시대착오적이라는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의 논의에 절로 동감을 표하게 된다. 이것은 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전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 또는 생산 수단을 갖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무산자(無産者) 계급'을 의미하는)에 대한 착취를 통해 이윤을 추구함으로써 유지된다고 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지금 현재를 제대로 읽어내기에는 역부족이고, 육체노동자 전부를 기득권에서 배제된 존재로 무작정 여길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차이가 보여주듯, 노동자라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닌 것이다.

19.

자본주의의 상징, 소비자본주의의 상징, 부(富)의 상징, 여인들의 욕망이 빚어낸 자본주의의 상징, 자본주의의 축소판, 소비문화의 정점… 이 모두는 하나같이 백화점을 일컫는 이름들이다. 이 같은 수식어들에 걸맞게, 과연 내가 일하는 층에는 연 4천만 원 이상을 소비해야 가입이 가능한 클럽의 전용 라운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백화점의 다른 층에는 연 1억 원 이상의 소비가 조건으로 내걸린 보다 고급형인 클럽도 존재한다.

발렛파킹 서비스 및 각종 혜택을 누리는 회원들이 라운지를 드나들 때마다, 열리고 닫히는 문틈으로 은은한 커피 향이 새어 나올 때마다. 나는 그 안쪽에 뭐가 있나 기웃거리곤 한다. 대걸레를 잡고 선 푸른 제복의 환경미화원에게 라운지의 출입문은 실수로라도 입장을 허락할 것 같지는 않다. 동경과 호기심 어린 눈빛이 좇고 있는 걸 알면서도 회원들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들이다. 나는 나의 시선을 즐기는 그들의 은밀한 즐거움을 은밀히 즐긴다. 이 비틀린 즐거움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내게 남긴 상흔일 터이나, 달리 어쩌겠는가. 클럽의 회원들이 소비하는 돈은 비록 낮은 단계의 액수라 할지라도 내게 어마어마한 숫자고, 누구나 그들처럼 소비를 과시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들의 부가 이해할만하다고 해서 우리들의 가난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는 기득권자들과 우리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제발 부탁이니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우리가 가난한 이유, 앞으로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 영원히 가난해야 마땅한 이유를 누가 명쾌하게 설명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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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출근길에는 아무래도 백화점 주차장의 전광판을 주시하게 된다. 남은 주차대수를 알리는 전광판의 숫자가 옥외 옥내 할 것 없이 ‘0’ 혹은 ‘혼잡’이라는 글자로 모조리 도배되었거나, 주차장 쪽으로 우회하기 위해 바깥 차선을 점령한 채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의 행렬을 보면, 사람멀미 비슷한 증상이 도지면서 절로 한숨부터 나온다. 당연히 백화점 측에서 듣는다면 펄쩍 뛸 소리다. 뉴스에서는 불황형 흑자라느니 불황의 터널로 진입했다는 소식으로 연일 흉흉한데, 어찌 된 셈인지 내가 일하는 백화점의 고객 수는 줄어들 기미가 없다. 이곳의 쇼핑객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이고,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경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게 아마 확실하다.

물론 그중에는 더위를 피해 백화점의 에어컨 밑으로 몰려온 피서객들도 섞여 있다. 지하 1층에 있는 시식코너에서 무리하게 얻어먹이다가 아이가 꾸역꾸역 토하도록 만드는 목이 늘어진 티셔츠 차림의 여자,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를 빼서 가방에 몰래 넣어가는 좀도둑들, 칭얼거리는 아이를 업고 안고 종일 백화점 안을 맴도는 ‘애 봐주는 노인’ 등이 바로 그들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상황을 질문하자 슬라보이 지젝은 이렇게 대답한다.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이차대전 당시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있었던 교신 내용을 패러디한, 자본주의의 상황뿐 아니라 환경문제 등의 부정적 상황을 빗대기 위한 목적으로도 종종 동원되는 지젝의 이 말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이성복, 「그날」)라는 시구(詩句)와 형식과 의미가 일치한다. 정치적 억압의 시대에 시인이 자유의 불감증을 고통스럽게 노래했다면, 지젝은 자본주의의 한계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21세기적 경제 불감증을 위트있게 질타한다. 심각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파국을 파국으로 체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신경을 그는 꼬집는 것이다.

그렇지만 난파된 배에서 탈출하거나 구조되는 이들이 ‘부당한 기득권자들’이었음을 저 세월호는 증명한다. 이것은 파국과 절멸 그 너머의 신세계를 우리가 앞당겨 걱정해야 하는 이유, 혹은 정반대로 도무지 기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21.

예순이 넘거나 가까운 사람들과 한 조가 되어 일하는 경우, 그들의 생물학적 나이가 나보다 많다는 것만으로 나는 ‘언니’들을 안쓰럽게 여기곤 했다. 해서 다소 순진한 선의를 품고서 내가 “앉아서 땀 좀 닦고 계세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혼자서 쓸게요.”라는 말이라도 건넬라치면 의외로 퉁명스럽거나 쌀쌀맞은 반응이 돌아오곤 했다. 심지어 자신을 힘없는 늙은이 취급을 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까지 있었다. 나를 무안하게 했던 그들의 황당한 태도가 지금은 이해가 간다. 나이를 올무로 노동 시장에서 퇴출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필경 그들을 괴팍스런 언니들로 만들었을 터이다.

환경미화원들의 세계에서 4, 50대는 젊은 축에 속한다. 그러한 ‘젊은’ 신입이 입사하면 60대인 언니들은 과장되게 반색을 한다. 당신 같은 사람들로 북적대니 활기가 돈다고, 힘들어도 참고 이겨내라며 어깨를 두드려준다. 나 역시 한때 그런 위로와 격려를 받았었다. 이제는 그게 순순히 고맙지만은 않다. 나이로 말미암아 위축된 심리를 감추려는, 눈치껏 굴기 위한 제스처임이 빤히 들여다보이고, 반장이나 감독의 시선을 의식한 계산속이 그동안의 훈훈함에 찬물을 끼얹어서다.

미화원이 되고 나서 사회의 양극화현상(兩極化現像), 그중에서도 경제적 양극화현상을 더욱 실감한다면, 고령화사회(Aging Society, 高齡化社會)의 심각성은 미화원이 되고서야 비로소 절감하는 점이다. 늙음은 우리를 편하게 하고 죽음은 우리를 쉬게 한다고 장자는 늙음과 죽음을 예찬했지만, 평균수명이 백세인 이 시대의 덤 같은 노년이 어떤 이들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자식을 교육시키고 집 장만까지는 어찌어찌했는데 미처 노후대책을 마련할 정신이 없었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빠듯해하는 자식들한테 손을 벌리기는커녕 여전히 도와줄 처지인 연배들. 이들은 늘그막이라기에는 아직 어색한 나이의 생계를 위해, 혹은 손자와 손녀에게 쥐여줄 푼돈을 목적으로 다시 돈벌이에 나선다. 이 같은 나이가 지긋한 치들은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에 은근슬쩍 난색을 표한다. 안 그래도 눈치가 보이는 판이다. 비싼 돈을 내고 누가 노쇠한 노동력을 쓰려고 하겠는가. 그러니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노인 인력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거라 염려하기 때문이다.

반면 4, 50대의 비교적 젊은 층은 ‘떼거리로 몰려나온 늙은이들’이 적은 돈이라도 마다치 않는 탓에 일자리가 부족하고, 과잉된 인력 공급이 결국 최저임금의 인상을 막는 요인이라며 그들의 뒤통수에다 대고 눈을 흘긴다. 이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세대 간 갈등은, 국가 발전의 최종 단계가 복지국가여야 함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

퇴직 후에도 일자리로 내몰린 ‘새파란 노인’들은 우리 가까운 미래의 자화상이다. 다시 말해 최저임금을 놓고 벌어지는 세대 간 갈등이 환경미화원 집단만의 문제로 치부돼서는 안 되며, 사회 담론적인 재생산 과정을 통해 복지국가로의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비록 노인 세대를 부양하는 젊은 세대가 현격히 줄어든다는 점 등이 걸림돌로 존재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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