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도 변한다] (2) 정치에 ‘눈 뜬’ 바쁜 청춘

대구참여연대 6월의 함성 서포터즈 황예지, 금지원 씨
주말 없는 아르바이트, 하루 3~4시간 잠자는 대학생
촛불 이후, 박근혜 첫 재판 방청 신청하기도
“역시 행동해야, 나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는구나”

10:28

[편집자 주] 2016년 11월부터 지난 3월까지 대구에서 17차례 전 대통령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집회가 열렸다. 연인원 21만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두 달 뒤 대구는 다시 ‘역적’의 도시가 됐다. 탄핵 국면에도 불구하고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가장 많은 득표를 했기 때문이다. 손가락질이 빗발쳤다. 요지는 변할 줄 모른다는 거였다. 그러나 대구도 변하고 있다. 다만 속도가 느릴 뿐이다. <뉴스민>은 탄핵 정국을 지나오면서 변화를 맞은 대구 시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얼마나 진행될지 알 수 없다. ‘이 사람이 딱 인터뷰 대상이다’ 싶은 독자들의 제보도 받는다.

요즘 대학생은 바쁘다. 계명대학교 언론영상학과 2학년생 금지원, 황예지 씨는 유독 더 바쁘다. 학과 구성원으로서 과 내에서 주어진 역할이 있고, 학회에서도 역할이 있고, 하고 싶은 대외활동은 덤이고, 아르바이트는 필수다. 수업마다 주어지는 과제도 빠지면 섭섭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사나, 기숙사 돌아가는 길에 울기도 했거든요” 예지 씨는 그렇게 바쁜 일상을 회상했다.

예지 씨의 ‘바쁨’은 ‘비사광장’에서 비롯된다. 비사광장은 각종 광고글이 올라오는 학내 온라인 게시판이다. 동아리 모집,  대외활동 관련 모집글에, 설문조사 요청글까지 성격도 다양하다. “설문조사 한 번 참여하면 기프티콘(모바일 상품권)을 주는 것도 있고, 알찬 정보가 많아서 매일 들어가거든요” (황예지)

지난 2월 어느 날, 그날도 어떤 알찬 정보가 있을까? 게시판을 살펴보던 예지 씨는 대구참여연대의 6월의 함성 기록출판 프로젝트 청년서포터즈 모집 공고를 봤다. 단번에 ‘이거다’ 싶었던 예지 씨는 즉각 모집 공고글을 미국에 있던 지원 씨에게 쐈다. 이 무렵 지원 씨는 오래간만에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대학 입학 후 1년 내내 하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모은 돈으로 미국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그때가 한창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되니 마니 하고 있을 때여서, 나라에 대해 피가 끓을 때”였다고 예지 씨는 당시를 회상했고, 지원 씨는 “저는 그때 아침에 막 눈을 뜨고 있는데”라고 회상했다. “아, 아침이었어?” 예지 씨의 추임새가 더해졌다.

▲지난 8월, 계명대학교 캠퍼스에서 만난 황예지(왼쪽), 금지원 씨.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서포터즈에 지원했고, 활동을 시작했다. 전공을 살려 영상 작업팀에서 일했다. 영상 작업팀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당사자를 만나 진행하는 인터뷰를 영상작업물로 만드는 일을 했다. 지난 6월 30일, 오오극장에서 ‘30년, 그리고’라는 제목으로 작업물을 공개하는 상영회도 가졌다.

예지 씨는 김용락 시인 인터뷰와 계명대학교 학생 인터뷰 등에 동참했고, 지원 씨는 박형룡 전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인터뷰에 참여했다. 김용락 시인은 87년 당시 교사를 그만두고 대구에서 문화운동을 하던 중 6월 항쟁에 참여했다. ‘그날이 오면’ 같은 저항시를 이때 썼다. 박형룡 씨는 6월 항쟁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다.

두 사람에게 당시 현장에 있었던 ‘선배’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그대로 영화였다. 동시에 나였다면 그때 어떤 행동을 했을까를 자문하도록 하는 촉매제였다.

“당시 직접 경험하신 분들이 말씀해주시잖아요. 치약을 발라서 (최루탄을)덜 맵게 한다든지 그런 이야길 많이 해주셨는데, 책이 아니라 말 그대로 경험하신 분들이어서, 영화에서만 보던 걸 직접 겪었던 분을 만나니까 새롭기도 하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했어요” _ 금지원

“‘경찰이 잡아간다’, ‘잡혀가면 행방불명이 된다’ 이런 이야길 들으면서 시위를 나갔대요. 나였으면 어땠을까? 무서워서 못 나가지 않았을까? 잡, 잡혀가다니? 시대가 많이 바뀌었구나. 잡혀갈 수도 있겠다. 그때 막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본 뒤여서 그랬는지 충격이 더 컸어요” _ 황예지

▲지난 6월 예지 씨(왼쪽에서 첫 번째)와 지원 씨(왼쪽에서 세번째 마이크 든 사람)가 영상작업물 상영회를 갖게 된 소감을 전하고 있다. [사진=정용태 기자]

촛불 이후, 박근혜 첫 재판 방청 신청하기도
“역시 행동해야, 나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는구나”

두 학생은 지난해 11월부터 올 3월까지 이어진 촛불집회에는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한 번 밖에 참여하지 못했다. 주말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3~4시간 밖에 못 자는 일상을 매일 같이 보낸 두 사람에게 주말 저녁 촛불집회는 ‘가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집회였다.

예지 씨는 “서포터즈 활동하면서 처음 나간 게 마지막 집회였어요. 시간을 내서라도 나갈 걸,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핑계를 댄 건 아닐까? 나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안 나간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처음 온 게 마지막 집회라니, 이런 생각이 드니까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왔죠”라고 탄핵 촛불 집회에 한 번 참여한 걸 아쉬워했다.

하지만 탄핵 국면과 넉 달 동안 이어져 온 촛불집회는 이들에게도 변화를 일으켰다. 지원 씨는 “이번 일을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케이스”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면서 변화한 자신을 체감했다. 지원 씨는 지난 5월 23일 처음 열린 수인번호 503 박근혜 씨의 재판 방청도 신청했지만 당첨되진 못했다.

이전부터 아버지 영향으로 정치 사안에 관심이 많았던 예지 씨는 좀 더 활동적으로 변화했다. 대구참여연대 서포터즈 활동에 지원한 것뿐 아니라 지난해 11월 계명대 학생 1,008명이 참여한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시국선언에도 동참했다.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교과서에 있는 게 아니라 실제 이야길 들으면서 활동하길 잘했다. 역시 행동해야 나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고 그렇구나 싶었어요. 일단 제가 많이 바뀌었구요. 인권 관련해서 여성 인권이라든지 성 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는 데 관심을 더 갖게 된 것 같아요” _ 황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