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감염인, 가난의 면역결핍사회 한국을 살다

빈곤과 공포에 떠는 에이즈 감염인
한국에서 에이즈 '감자'가 살아남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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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4 08:27 | 최종 업데이트 2017-11-14 08:27

※기사에 등장하는 일부 인물과 단체 이름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덕수야···눈 좀 떠봐라”

환자복을 입고 의료용 침대에 누운 덕수 씨는 2주 전부터 혼수상태에 빠졌다. 김춘희 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덕수 씨 입을 바라봤다. 들은 기색이 없다. 혼수상태에 빠진 덕수 씨는 날마다 몸이 말라갔다. 경관식(튜브를 이용해 코로 식사를 대체)을 흘려 넣었지만, 손등으로는 바늘을 꽂고 링거도 맞았지만, 몸은 자꾸만 쪼그라들고 굳어갔다.

31일은 병원을 옮기는 날이다. 퇴원 절차를 끝내고 오후 4시까지 ▲■병원에 가야 하는 춘희 씨 마음이 급하다. 카테터(수술할때 사용하는 의료용 기구)로 물똥이 멈추지 않았지만,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 간병인이 카테터를 제거하고 기저귀를 가져왔다. 덕수 씨 몸을 모로 뉘고 보니 엉덩이가 거무튀튀하다. 조만간 욕창이 생길 것이다. 춘희 씨의 눈살이 찌부러진다. 소란을 지켜보던 다른 간병인도 거든다. 널브러져 있던 소지품을 100L짜리 비닐봉지에 담는다. 빛바랜 사진 몇 장, 그리고 덕수 씨가 입원할 때 입고 온 옷도 우겨 담았다.

서류뭉치가 자꾸 앞을 막았다. 건성으로 휙휙 사인 했다. 사실 글자에 익숙지도 않다. (주)황금시간응급센터에서 사설 구급차가 도착했다. 119구급차는 불러도 오지 않는다. 덕수 씨는 법률상 응급환자가 아니었다. 천장에 징검다리처럼 걸린 형광등이 덕수 씨의 얼굴을 훑는다.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오케스트라 버전이 엘리베이터 스피커에서 웅장하게 흘러나온다.

“김덕수 씨, 제 말이 들리십니까”

구급차에 올라타니 구조팀장이 덕수 씨 가슴팍을 두드리며 불러본다. 얼굴 위로 응급차 천장 서치라이트의 창백한 빛이 떨어졌다. “······.” 보호자 석에 앉은 춘희 씨는 긴 한숨을 내쉰다. 운전석 쪽에서 석양이 비쳤다. 운전석 옆으로는 카드결제기가 달려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춘희 씨는 말없이 비스듬히 돌아간 밤색 털모자를 바로잡았다.

덕수 씨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이다. 10월 2일 일하다가 쓰러진 덕수 씨를 동네 사람이 병원에 데려왔고, ‘누나’라고 저장된 춘희 씨 번호로 밤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 입원 중 감염 확진을 받았고, 입원 한 달이 차면서, 병원을 옮겨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구급차에 탄 덕수 씨

2주 전까지만 해도 덕수 씨 상황이 이토록 나쁘지는 않았다. 10월 초, 대구시 동구에 있는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지회 사무실에서 차명희 상담팀장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보건소였다. 에이즈 확진 받은 감염인이 나왔고, 간병인이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 얼마나 심각한지 물었고, 보건소 쪽에서는 걷는 게 조금 어려운 정도라고 했다. 곧바로 음료수를 하나 사 들고 병원에 방문했다. 병실을 훑어보니 상황은 좋지 않았다.

“김덕수 님, 제 얘기가 들리면 눈을 한 번 깜빡여보세요”
“김덕수 님, 제 얘기가 들리면 제 손에 힘을 줘보세요”

응답이 없다.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거나 움직일 수 있다면 가끔 도움을 청했던 정신과 병원에 부탁이라도 해볼 수 있었다. 지금 상황이라면, 보호자가 집에서 책임지든지, 그것도 아니면 요양병원을 찍어서 담판을 지어야 한다. 2016년, 요양병원 입원 제외 대상에서 감염인을 뺀 의료법 시행규칙이 시행됐지만, 감염인은 장기요양을 위한 요양병원 입원은 어렵다. 의료진, 입원자, 보호자의 감염 공포와 혐오 반대 시행규칙 따위는 없었다. 명희 씨는 눈살을 찌푸린 춘희 씨를 봤다. 행색을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장애인 등급을 받은 다음 장애인 활동보조를 활용하고 남는 시간에는 가족이 간병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조차도 어려울 듯했다.

“누님은 덕수 씨를 어느 정도 돌보실 수 있어요?”

“저는 책임질 수 없어요···”라는 춘희 씨에게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뾰족한 수는 없다. 명희 씨는 한숨을 들이키고 말했다. “최선을 다해볼게요. 같이 가봅시다.”

사무실로 돌아온 명희 씨는 곧바로 보건소에 연락했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고, 가족에게는 인프라가 없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협회는 고작 간병비를 일부 지원하고, 요양병원과 담판을 짓는 일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상황을 아는 의사 하나와 같이 요양병원 몇 군데를 노크했지만, 문을 열어주는 병원은 없었다.

*

31일 오후 5시 20분,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했다. 발걸음이 빠르다. 양쪽 무릎 인대 수술 후 관절염에 시달리는 춘희 씨는 뒤쳐졌다. 한발 늦게 응급실에 도착했다. 춘희 씨는 병명을 묻는 의료진의 눈을 피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입원을 거부당할까 두려워 에이즈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간단한 확인절차 끝에 덕수 씨 손목에 입원환자를 표식하는 초록색 RFID(전파를 이용해 정보를 인식하는 기술) 팔찌가 걸렸다. 중환자실 입원은 성공했다.

“7만 5천 원입니다” 사설 구급차 직원이 영수증을 들고 왔다.

춘희 씨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만 원짜리 여덟 장을 건넸다. 직원은 “쾌차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중환자실에는 (주)●○여성인력개발원에서 파견한 간병인이 일주일 치 간병비 선불을 요구했다. 그는 덕수 씨를 포함한 환자 4명을 동시에 보살필 예정이다. 신문지를 치우고 공동간병 사용신청서를 썼다. 신문 헤드라인에 모 교단이 빈민 봉사활동에 나섰다는 소식이 걸렸다. 덕수 씨는 ▲■병원 정착을 준비하고 있었다. 링거 바늘이 들어가자 덕수 씨는 몸부림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환자복도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카테터는 배변 주머니에 다시 연결됐다. 얼마나 머물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닻은 단단했다.

“우리는 못 씻겨줘요. 보호자가 와서 씻겨줘야 해요. 사람 넷을 내가 보는데 얼마 전부터 씻기는 건 안 하고 있어요.”
“네···”
“그리고 소지품은 다 가져가세요. 옷도 가져가고. 언제 또 입으려고.”

“할아버지 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할아버지 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간병인의 말을 듣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춘희 씨는 접이식 휴대전화를 펼쳐 대뜸 말했다.
“곧 갈게요. 한 시간만 기다려주세요”
평소대로라면, 집에서 남편의 노환을 보살펴야 하는 시간이었다.

간호사가 의사와 면담할 수 있는 회진 시간을 알린다. 그리고 약품식별의뢰서, 약물투약동의서 따위를 건넸다. 비상시 덕수 씨에게 병원이 어떤 조치를 하는지, 간호사가 줄줄 설명했다. 춘희 씨는 서명하느라 정신이 없다. 중환자실을 나서기 전, 덕수 씨 얼굴을 한 번 더 물끄러미 바라본다. 손으로 뺨을 한 번 쓰다듬었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걸까. 말이 없다.

간병인이 안겨준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길, 복도에서 춘희 씨가 멈춰 섰다. 봉지를 뒤집어 병원 복도에 내용물을 쏟아 냈다. 덕수 씨가 찍은 어머니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홀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덕수 씨 혼자 모셨다. 덕수 씨는 병실에 어머니 사진을 두고 가끔 꺼내보곤 했다. 사진을 보며 춘희 씨가 말했다.

“야가 언제 일어나서 옷 입겠노. 버리는 게 낫겠다. 다 버려야지. 아이고. 환자복 버렸다고 돈 달라 소리할까봐 겁난다. 그런데 언제 이거 갖다 주러 가겠노. 다 버려야지. 너무 돈 돈 그래서 머리가 어지럽다···”

사진 속 어머니도 말이 없다. 풀밭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어머니는 춘희 씨가 12살 되던 해부터 품을 팔아 온 가족을 먹였다. 이발소도 없이 떠돌며 이발 일을 하던 아버지가 그해 돌아가시면서, 춘희 씨네 주식은 풀죽이 됐다. 대명동 화장터 인근 초가집에는 어머니와 춘희 씨, 동생 덕호, 덕수 씨와 살았다. 덕호 씨는 월남 파병 갔다 돌아와서 아파트 회사에 다녔고, 그사이 병을 얻었다. 그래서 덕수 씨가 쓰러진 후에도 병원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발소도 없고 바리깡도 없이 가위 하나로 일했다. 덕분에 머리만큼은 항상 단정했다. 어머니는 품을 팔아 푼돈을 벌어왔다. 춘희 씨는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도 가지 못했다. 대신 공민학교(대한민국에서 정규 초등교육을 이수하지 못한 자에게 초등교육을 제공하는 기관, 3년)에 갔다. 학교에 불이 나는 바람에 졸업도 하지 못했고, 문자가 낯설다.

그 길로 춘희 씨는 성냥공장에 들어갔다. 휴일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 딱 이틀. 그날도 혼자 공장에 나와 쓸었다. 바닥에 깔린 적린가루(성냥대가리 원료로 쓰는 가루)를 털어내다보니 사장에게도 인정받았다. 사장이 몰래 챙겨주는 보너스는 모두 어머니에게 줬다. 성냥 공장에서 남편도 만났다. 같은 공장에 다니던 시숙모가 춘희 씨를 눈여겨보다 조카며느리로 삼았다. 가난한 춘희 씨는 쉬는 날, 지금은 대신동 시민극장이나 두류공원을 돌며 남편과 연애했다.

아이가 셋 생겼다. 일은 따라 붙었다. 양말 공장, 메리야스 공장을 전전하며 집 한 채 살 돈이 모일쯤이었다. 남편이 보증을 잘못 섰다. 그 후로 평생 전세방을 오갔다.

그러는 동안 간간이 덕수 씨 소식을 들었다.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고 외골수였던 덕수 씨는 별다른 직업을 갖지 못했다. 가는 공장마다 관리자와 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뛰쳐나왔다. 겨우 정착한 29살 되던 해, 신문사 지국 하나를 차렸다.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덕수 씨와 노모 두 입에 풀칠은 했다.

춘희 씨 아이들이 크면서 덕수 씨와 자주 만났다. 아이들이 덕수 씨를 좋아했다. 머리가 굵어지자 아이들은 제 발로 덕수 씨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덕수 씨는 셋방을 얻어 혼자 살았다.

다시 연락을 끊은 것은 덕수 씨였다. 남편과 술김에 싸웠고, 자존심 강한 덕수 씨는 그 길로 연락을 끊었다. 아이들이 수차례 덕수 씨 집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배달 오토바이는 세워져 있는데,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기초생활보장급여 신청을 권했다. 덕수 씨는 단박에 거절했다. 대명동 춘희 씨 집 근처에 붙어있으라고 끝내 붙잡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저 흉한 병에도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자책했다.

▲춘희 씨가 사는 쪽방

11월 2일 오전, 춘희 씨는 약값이라도 벌기 위해 나가던 구청의 노인 일자리 지원사업 교육을 빼먹고 ▲■병원을 찾았다. 춘희 씨는 혼수상태에 빠진 덕수 씨 앞으로 기초생활보장급여를 신청했다. 병원비를 대야 했다. 긴급 의료지원금을 신청했었는데, 쓰려고 보니 의료지원금은 이미 덕수 씨의 카드 값으로 나가고 없었다.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춘희 씨의 하소연을 듣던 구청 공무원은 압류방지통장을 먼저 만들어야 했다고 뒤늦게 알렸다.

구청 공무원 설명이 이어진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수급자로 선정되면 덕수 씨는 생계비 49만 원을 매달 받을 수 있게 된다. 병원비도 일부 할인받을 수 있다. 생계비라도 받아 병원비에 보태야 한다. 하지만 신청을 위해서는 근로능력평가진단서, 진료기록부 2개월 치 등 문서 몇 장이 더 필요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서류를 마련해야 한다는 말에 춘희 씨 얼굴이 굳어간다.

춘희 씨는 공무원과 함께 중환자실로 향했다. 덕수 씨 지장이 필요했다. 도장이나 신분증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중환자실 데스크에서 춘희 씨를 본 수간호사가 재차 묻는다.

“보호자 분, 심장 마사지, 기관 삽관, 인공호흡기는 안 한다고 하셨는데”
“···그거 해가 도움이 되겠어요”
“알 수 없어요. 약물치료만 할까요? 얘기를 정확하게 해 줘요”
“안 바뀌어요···”

춘희 씨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덕수 씨 엄지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서류에 꾹 눌렀다. 휴지로 인주를 닦아내고 나서도 춘희 씨는 덕수 씨 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춘희 씨가 서류를 떼러 이리저리 다니는 동안, 명희 씨도 머리를 싸맸다. 예전에는 그나마 대구에 감염인에게 호의적인 의사 둘이 있었는데,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 요양병원은 명희 씨가 2005년 감염인을 상담을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이토록 심하지 않았다면, 덕수 씨는 늦게라도 치료를 시도했을 것이다. 에이즈 치료법은 꾸준히 발달해서, 꾸준히 약을 먹고 치료하면 기대수명만큼 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에이즈는 여전히 공포스러운 단어다. 감염인을 사회적으로 격리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게 나타난다.

에이즈 정책은 1985년 한국에서 첫 감염자가 나타난 후, 감염인을 격리하는 시대(1985~1994)에서 예방 홍보에 주력하는 시대(1995~2004)로, 이후 감염인의 인권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대부분 언론은 여전히 에이즈나 HIV바이러스와는 전혀 관계없는 현상을 ‘참나무 에이즈(소나무재선충병)’ 따위로 보도하기 일쑤다. 최근 부산 성매수 사건에서도 그랬다. 감염인인 성매매 여성에게만 초점을 맞췄고, 언론은 여전히 에이즈에 관한 근거 없는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다. 가장 공포에 떠는 사람은 바로 감염인인데.

명희 씨는 진환 씨가 떠올랐다. 서울에 살던 진환 씨는 감염 사실을 알고서 고향 대구로 내려왔다. 명희 씨가 서울의 활동가에게 들은 진환 씨의 모습은 유능하고, 에이즈에 대해서도 편견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감염되자 깊은 우울에 빠졌고, 협회의 쉼터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얼굴에 그늘이 개지 않았다. 치료를 권했으나 나서지 않던 진환 씨는, 쉼터를 나와서 칩거했다.

명희 씨는 진환 씨 장례를 치렀다. 몇 안 되는 동료들에게 연락하고, 칩거에 들었던 집을 정리하는 일도 도맡았다. 진환 씨는 약을 먹지 않는 소위 소극적 자살을 택했다. 뒤늦게 병원에서 연락을 받은 명희 씨가 응급실에 달려갔을 때, 이미 진환 씨 병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진환 씨의 마지막 말은 “살고 싶다”였다.

명희 씨는 숱한 감염인을 만나며, 감염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공포에 떠는 사람이 바로 감염인 자신이라는 걸 느꼈다. 에이즈 진단을 받은 감염인의 마음은 혼돈 그 자체가 됐다. 무한 증식하는 원망, 자살 욕구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공포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했다. 감염인에게는 경계가 아닌 보호가 필요하다. 거기에는 국가의 역할도 있고, 감염인 자신도 편견을 버려야 했다.

▲차명희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상담팀장

6일 오전, 명희 씨는 협회 활동 중 알게 된 감염인들과 섞여 승합차에 탔다. 소풍 가는 길, 마음이 들뜬 그들은 한껏 들떠 대화를 나눈다.

“어제, 니하고 같이 있던 사람, 감자가 고구마가?”
“감자다”
“감자가 그래 행동해가 되나. 지도 감자면서 내한테 뭐라 그러나”

감염인은 ‘에이즈’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아우팅이 두려우므로, 평소에도 조심스럽다. 명희 씨는 감염인과 협회 앞 식당에 갈 때도 협회 조끼를 벗고 갈 정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이들이 이 자리에서 서로 자기 삶을 공유하기까지. 그 험난한 여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명희 씨는 안다. 이를 지켜보는 명희 씨는 감염인들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다 보면 가끔 감격스러울 때가 있다. 자기 고통을 들어줄 존재가 있다는 것이, 그 아픈 사람에게 큰 힘이 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명희 씨에게도 큰 힘을 줬다. 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에서 명희 씨의 삶과 아픔도 공유하게 됐다. 처음 상담을 시작할 때, '공감'에만 의식적이었던 명희 씨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자기 삶이 확장됐다. 명희 씨와 감염인의 상처가 연결됐다.

*

명희 씨의 아픔은 왼쪽 눈과 연결돼 있다. 어릴 적 명희 씨에게 왼쪽 눈은 트라우마였다. 선천성 녹내장 때문에 한쪽 눈이 어릴 때부터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 우물가를 지나는데 난생 처음보는 커다란 보자기를 옆에 두고 한 할머니가 쑥을 캐고 있었다. 우물에서 물을 긷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저 보자기가 뭐예요?”
“너 같은 한쪽 눈이 큰 아이를 잡아가는 보자기다”

명희 씨는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덮어쓰고 울었다. 명희 씨의 트라우마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명희 씨는 누군가의 장애를 이유로 사람을 해코지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나쁘다는 공식을 머리에 새겼다.

명희 씨를 믿고 지지하는 가족이 힘이었다. 한 번도 장애를 이유로 불편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명희 씨를 동네 최초로 대학에 들어간 여자로 키웠다. 여자는 대학에 잘 보내지 않는 시절이었다.

사회적 차별이 녹록지는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수녀가 되려고 3년 동안 수도원 생활에 매진했다. 그러나 수녀 서원식을 코앞에 두고 수련원장은 장애를 가진 명희 씨가 수도자 활동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정했다. 늦은 밤, 수련원 방에 누워 있는데 지나가는 수련원장의 그림자가 명희 씨에게 드리웠다. 명희 씨는 마음속으로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대사를 떠올렸다.

“주님께선 문을 닫으셔도 어딘가 창문은 열어두셨을 거야···”

*

명희 씨는 감염인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사회에서 편견과 맞선 한 사람을 떠올렸다. 석구 씨는 태평양을 항해하던 선원이었다. 에이즈 감염 후 협회의 쉼터에 들어왔다. 가족과 관계가 무너진 직후였던 석구 씨는 주변 사람을 경계했다.

석구 씨는 어릴 적 부산역 앞에서 놀다가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형제복지원은 비가 오는 날이면 복지원 안에서 입소자끼리 강제로 싸움을 시켰고, 거부하면 폭행했다. 견디지 못한 석구 씨는 탈출했는데, 포장마차에서 음식을 먹다가 다시 복지원에 끌려갔다. 경북 다른 고아원 이송 후 석구 씨는 고아원을 탈출해 거리 생활을 시작했다.

10대에 어선을 잠깐 탔고, 30대 초반에는 태평양에서 조업하는 원양어선의 요리사가 됐다. 어선은 가끔 기름과 양식을 채우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수도 타히티 섬에 정박했다. 고독과 적막의 공간 태평양에 대비된 타히티는 석구 씨에게 낙원 같았다. 술집에 사람들이 붐볐고,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술과 춤을 즐겼다. 거기서 에이즈에 걸렸지만, 석구 씨는 별달리 감흥이 없었다. 타히티의 술집에는 감염인들끼리 자기를 드러내놓고 춤추며 즐겼기 때문이다. 차별이 없었다. 편견도 없었다. 석구 씨는 누구와도 섞여서 춤추고 놀 수 있었다.

트라우마 따위는 없었다. 다만, 워낙 에이즈를 사소하게 생각해서 치료도 하지 않았다. CD4(세포표면항원무리) 수치가 300으로, 비감염자의 1/3수준으로 떨어지며 몸이 약화됐다. 당시 1세데 에이즈 치료약인 지도부딘(azidothymidin)은 부작용이 많았다. 석구 씨는 치료를 위해 뱃일을 접었다.

그러면서 고통이 시작됐다. 프랑스 영주권을 포기하고 청국장과 고들빼기를 먹으러 한국에 정착한 게 잘못이었다. 한국은 석구 씨를 괴물로 여겼다. 친한 친구가 감염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누설했다. 석구 씨는 홧김에 홀로 쉼터에 들어왔다.

쉼터에서 석구 씨는 다른 감염인들과 잘 어울렸다. 석구 씨는 자기 주변 환경을 긍정적으로 바꿨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는 애초 느끼지도 않았다. 치료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몸은 금방 건강을 되찾았다. 쉼터에 있는 동안 명희씨에게 여러차례 상담도 받았다. 잘못한 친구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석구 씨는 그를 용서했다.

그제서야 쉼터를 나갔다. 그때 석구 씨는 심마니가 됐다. 산삼을 캐서 협회에 보내기도 했다. 명희 씨는 가끔 석구 씨 전화를 받았다. 감염인도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수도 있다는 것을 석구 씨를 통해 알게 됐고, 자기 일처럼 기뻤다. 석구 씨의 삶이 명희 씨를 위로했다. 따뜻한 지지와 위로가 한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는 것일까.

석구 씨는 명희 씨에게 자서전처럼 쓴 기록도 보냈다. 거기에는 석구 씨가 복지원 생활 당시 강제로 타인을 폭행하거나 폭행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다로 향했던 과정이 나와 있다.

어느 날 석구 씨가 사고를 당했다. 술에 취한 고등학생이 석구 씨를 밀었다. 얼굴 반쪽이 갈렸고, 엉덩이뼈가 부러졌다. 훗날 동거인은 명희 씨에게 전했다. 동거인이 그 고등학생을 고소하려고 했는데, 석구 씨가 제지했다.

“고소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쟤 인생이 어떻게 되겠냐며. 그 학생을 전혀 미워하는 얼굴이 아니었어요”

죽기 전, 석구 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대구로 향하는 버스에 탔다. 대구에서 부상을 치료받겠다는 석구 씨를 명희 씨는 끝내 말릴 수 없었다. 동거인과 함께 탄 버스에서 석구 씨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장례식을 생략하고 간단히 입관식을 진행했다. 명희 씨가 국화꽃 한 송이를 관에 올리고 보니, 몇 송이가 더 올려져 있다. 쉼터에서 같이 생활하던 감염인들이 올린 꽃이다. 석구 씨는 마지막으로 그를 인정하고 신뢰했던 사람을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감염인에게 주변 사람의 편견 없는 신뢰와 지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

“공오삼○○○○○○○ 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공오삼○○○○○○○ 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11월, 춘희 씨는 구청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덕수 씨가 기초생활보장급여를 받게 됐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병실의 덕수 씨는 눈을 감고 뜨지 않는다.

수급비로 덕수 씨 간병비를 얼마나 낼 수 있을까 생각하며, 달력을 봤다. 검은 사인펜으로 동그라미 친 내일은, 다시 약값을 벌기 위해 횡단보도에 나가 안전통제를 하는 날이다. 침대 옆 탁자에는 아픈 남편이 먹다 남긴 밥그릇이 있다. 정신없는 요즘, 귤과 홍시를 버리지 못해 곰팡이가 피었다. 옷걸이에는 소변기용 나프탈렌이 걸려있다. 마른기침 소리가 쪽방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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