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주민 ‘김련희’가 있어야 할 곳

송환 요청한 김련희, "제3국 아닌 우리땅으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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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2 17:21 | 최종 업데이트 2015-09-02 17:23

북한으로 귀환을 요구한 탈북자로 알려진 김련희(46)씨. 그의 기구한 삶은 분단과 적대가 가득한 한반도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의 모순을 응축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그에게 새로운 국적을 부여했지만, 그가 원하는 국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평양 주민으로 살고 싶다. 그의 기구한 사연은 지난 7월 <한겨레>(관련기사: “나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 <뉴스타파>(관련기사: 나를 북으로 보내주오)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8월 3일 종교인들은 인도주의적 원칙에 따라 그를 북으로 송환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그가 마주한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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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기구한 사정을 김 씨의 입에서 끄집어내는 게 못내 미안해 질문을 망설이던 차에 김 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2011년 김 씨는 간 질환 치료를 위해 친척이 사는 중국으로 건너갔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중국이지만, 경제는 이미 자본주의 체제와 다를 바 없었다. 비싼 치료비 탓에 식당 일을 했고, 탈북 브로커를 만났다. 브로커는 한국에 들어가면 몇 달만 일해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제안했다. 김 씨는 몇 달만 한국에 머물렀다가 돌아올 생각으로 브로커에게 여권을 맡겼다. 얼마 후 탈북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브로커에게 빼앗긴 여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김 씨는 그해 9월 16일 대한민국에 들어왔다.

2011년 9월 입국때부터 지금까지
“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김련희 씨
밀항, 여권 위조까지 시도했다가 실패
‘간첩이 되면 북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간첩 행위 했다며 경찰서에 자수하기까지…

김 씨는 대한민국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한민국 국적을 원하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국정원으로 갔다. 난 여기 살 이유가 없으니까 보내달라고 했다. 단식투쟁도 하고…다른 사람들은 다 하나원(탈북자 남한 정착 시설)으로 가는데 난 받아주지 않았다. 서약서를 쓰지 않아서였다”

김 씨가 말한 서약서는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받고 탈북 정착 지원을 받는다는 동의서였다. 그에게 이 동의서는 사상검증을 위한 ‘전향서’와 같았다. 분단이 고착된 한반도에서 남과 북 가운데 어느 한쪽 국적을 취득한다는 것은 다른 한쪽을 버리는 행위기 때문이다.

“서약서를 쓰지 않으면 죽어도 (북한으로) 못 간다고 하더라. 한국 법이 뭔지도 모르고, 무서웠어요. 국정원 직원이 6개월 지나면 여권이 나온다는 말을 했고, 그때야 서약서를 썼어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을. 여권만 나오면 북으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강압에 의해서지만 끝까지 쓰지 말았어야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해요. 비전향장기수분들을 수십 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도 쓰지 않았는데…”

그렇게 하나원으로 간 김 씨는 2012년 1월 26일 경북 경산시에 왔다. 여권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패션디자인직업전문학교에 다녔다. 평야에서 양장사로 일했던 자부심도 있었고, 당장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다리던 여권은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북한에 돌아가겠다고 밝힌 것 때문이다.

“여권 발급이 안 되면서 희망이 없어졌어요. 난 섬나라에 혼자 있는 거잖아요. 어쩔 수 없이 중국의 북한영사관에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했어요. 영사관에서는 ‘중국까지는 오라’는 답변만 돌아왔어요.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국가 대 국가 문제라는 생각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밀항을 준비했다. 하지만 브로커가 요구한 2천만 원을 마련하기란 어려웠다. 밀항은 포기하던 차에 인터넷에서 위조 여권 제작 사이트를 발견했다.

“북한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조선족이라고 했어요. 위조한 여권을 이메일로 보내왔는데 처음에 말한 2백5십만 원이 아닌 5백만 원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돈을 못 준다고 하니까 경찰서에 넘긴다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어요. 무서웠어요. 자수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서 신변담당 경찰한테 사실대로 말했어요”

공문서 위조죄로 기소됐다. 두렵지는 않았다. 김 씨가 가장 두려운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조사를 받으면서 그는 “혹시 간첩이 되면 그 나라로 보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로지 난 간첩이 되고 싶었어요. 여권도 안 되고, 밀항도 안 되면서 마지막 방법으로 떠올린 게 그거였어요. 간첩이 되면 강제추방 되니까. 하지만 증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탈북자명단을 북한에 넘기려고 했다는 증거를 만들었어요. 탈북자가 모여 있는 경산의 한 다방에 취직해 거기서 만난 탈북자 17명 신상을 휴대폰에 저장했어요. 그 길로 경찰청에 연락해서 나 간첩이니 잡아가라고 했어요”

2014년 시작한 수감 생활
“돌아가지 못할 바에 죽는 게 낫다”고 자살시도
상처난 등에 연고 발라주며 울던 여간수 보며
“나하고 똑같은 형제구나”

2014년 7월 19일 김 씨는 간첩으로 구속된다. 하지만 2년 정도 감옥 생활 후 북한으로 갈 수 있으리라던 기대는 무너졌다. 경찰은 김 씨에게 북한 정보원과 내통 여부를 추궁했고, 김 씨는 부인했다. 경찰은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15년 징역을 살고, 협조하면 선처해준다고 설득해 허위자백을 했다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이후 김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대구구치소에 수감됐다. 하지만 2심에서 대구고등법원은 김 씨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해 김 씨는 올해 4월 21일 풀려났다.

10개월 동안의 감옥 생활. 김 씨의 오른손목에 남은 상처는 감옥 생활을 고스란히 말하고 있었다.

“돌아가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가족과 함께할 수 없다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미안하니까. 그래서 손목을 그었는데, 신문에는 간첩 행위가 드러나 자살시도를 했다고 나와 있었어요. 자살시도 이후에 교도관들이 손발을 묶었고, 묶이지 않으려고 저항하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어요”

출소 이후 한 달 동안 김 씨는 나빠진 건강 회복에 시간을 보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우선 살아야 했다. 몸을 추스른 후 김 씨는 밀항, 위조 여권 등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고향 땅을 밟겠다고 마음먹는다. 희망이 없던 수감 생활 가운데 김 씨가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분단 체제와 국가를 뛰어넘는 ‘인간’이었다.

“감옥에서 피멍이 들어있을 때, 여간수 한 명이 등에 연고를 발라주면서 눈물을 흘리는 거에요. 그전까지는 나를 억압하는 간수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마음의 문이 열렸어요. 반세기 넘도록 갈라져 있으면서 적대감정이 있겠지만, 내가 아프면 너도 아픔을 느끼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픔을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동포구나…”

0.8평 독방생활을 마친 김 씨는 한 달여를 혼자 보낸 후 일자리를 찾았다. 양장사로서 자부심도 사라졌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자리면 충분했다. 신문 광고를 보고 경북 영천의 한 재활용품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김 씨를 포함해 7명이 일하는 공장은 편했다. 모두 외국인이라 주변 시선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직장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그런데 <한겨레> 보도 이후 회사 사장은 “사정을 몰라서 미안하다”며 김 씨를 돕겠다고 했다. 김 씨는 “나하고 똑같은 형제라는 느낌을 또 한 번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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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송환 호소 시작한 김 씨
“남의 땅 아닌 우리 땅 밟고 가고 싶다”

“수감 생활과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극단적인 방법이 가족을 만날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에는 몰랐어요. 체제가 틀리잖아요. 구치소에 처음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가 찾아왔을 때 만나지도 않았어요. 구치소에 민변에 대한 나쁜 소문만 들었거든요. 그런데 변호사분들이 돌아가면서 면회를 왔어요. 이 사람들이 나한테 도움을 줄 수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언론도 마찬가지였어요. 한겨레를 찾아가 사연을 말하니 왜곡하지 않고 사실을 알려줬어요. 아플 만큼 아프고, 힘들 만큼 힘들었으니까 이제는 약점 안 잡히고 합법적인 길을 가기로 했어요. 내일 당장 여권을 준다고 해도 중국을 통해서는 안 갈 거에요”

이후 김 씨는 공개적으로 “저는 남, 북의 체제, 이념을 초월해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통일부의 합법적인 절차허가를 받아 가족의 품으로 가고 싶습니다”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김 씨의 사연을 보도한 <뉴스타파>가 신경민 국회의원실을 통해 국정원에 질의했다. 국정원은 “통일부 산하 북한이탈주민대책협의회에서 논의해 결정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에 8월 5일 통일부 박수진 부대변인은 “한국에 왔을 때 정착 의사를 밝혔고, 어떤 결정이 날지 지금 말할 수 있는 사항은 없다”고 밝혔다.

당장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답변은 아니었지만, 김 씨는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자신과 같은 아픔을 누군가가 또 겪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자는 약 2만 7천 명. 하지만 이들의 생활은 ‘자유 대한의 따뜻한 품’과는 거리가 멀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지난해 발표한 탈북자 경제생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탈북자 실업률은 9.7%로 전체 실업률보다 3배 가까이 높다. 또, 남한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응답자 가운데 70%가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꼽았다. 종종 탈북자들은 북한과 비교해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데 소모된다.

그러면서 김 씨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느낀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분단의 비극 때문에 이런 일을 겪지 않으면 좋겠어요. 사상이나 체제도 중요하고 법도 중요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만들었잖아요. 북과 남 두 체제에서 모두 살아봤잖아요. 네가 죽고 내가 죽고 그래야 통일이 된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해요. ‘통일은 대박이다’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북한은) 절대 붕괴되지 않아요. 서로가 인정하고 양보하면서, 나 같은 사람도 보내주면 서로 오가면서 통일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 언제까지 서로를 멸시하고 무시하고 살아야 하나요. 남의 땅(중국 등 제3국)이 아닌 우리 땅을 밟고 오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이어 김 씨는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북한 인권 문제를 많이 하는데요. 탈북자 인권도 책임을 못 지면서 어떻게 인권 문제를 지적하겠어요. 탈북자들이 생계 때문에 야당 비판 시위에 나가고, 북한 체제 비판 강연을 다니고…북에 비해서 자유롭다고 느낀 남한의 언론도 마찬가지예요. 북한에서 굶어 죽고 못 살고 하는 거는 일부분이에요. 북한이 나쁜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요. 서울역이나 지하철 노숙인 모습만 찍어서 이게 대한민국 모습이라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일부분만 가지고 전체를 묘사하지 말고 서로가 그대로 봐 주면 좋겠어요. 우리는 유일한 분단국가잖아요”

그러면서 김 씨는 청년들이 북한에 대한 정보도 알고 교류를 지속하면 좋겠다고 했다. 분단 60년이 넘어가면서 많은 게 달라졌다. 보통 탈북자가 꺼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만큼 김 씨는 송환이 절박하다. 또, 곁에 있는 남한 사람들을 믿고 있다.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 꿋꿋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김 씨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김 씨는 김책공업대학 의사로 있는 남편과 딸이 평양에 있다.

“제일 가슴 아픈 게 아버지, 어머니예요. 나이가 많잖아요. 제발 빌고 싶은 게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주면 좋겠어요. 부모님에게 제일 죄스러워요. 딸이나 가족이 불이익 받을까 봐 두렵기도 해요. 걱정되지만 조국을 믿고 싶어요. 내가 직접 살아본 세상이잖아요. (조국에 대한) 그런 믿음이 없다면 반역자가 되더라도 이렇게 가려고 안 했을 거예요. 부모는 자식이 이런저런 잘못이 있어도 탓하지 않는다고 믿어요. 그 어떤 안락과 행복이 온다고 해도 가족의 눈물을 팔아야 하는 거라면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이 땅이 인권, 인도주의라는 말을 쓰는 나라라면 제 일을 한번 되새겨보면 좋겠어요. 그때까지 포기하지 않겠어요”

김 씨는 무사히 평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만약 그가 땅을 밟고 돌아간다면 한반도를 잠식하고 있는 분단의 아픔은 조금이나마 아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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