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11) 충환 형 때문에 팔이 부러지다

0
2018-03-01 17:11 | 최종 업데이트 2018-03-01 17:11

지금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에 함께 하고 있는 김충환 위원장의 양보를 얻어낼 방법 중 한 마디가 있다.

▲김충환(왼쪽), 류동인(오른쪽)

“형 때문에 내 팔 부러졌다 아니가”

하루는 경비교도대 한 명이 대구에서 같이 활동했던 충환 형과 뭐라며 다투고 있었다. 멀리서 나의 눈에 들어왔다.

충환 형은 내가 사건을 모의할 때 영남대 운동권 대표로 선배들 라인에서 같이 논의하고 있었다. 앞의 경비교도대 이야기는 잘 듣지 못했지만, 맥락상 도둑놈이 왜 복도에서 독보하느냐는 것이었다.

독보란 교도관 계호 없이 재소자 혼자 걸어 다니는 것을 뜻한다. 일반재소자들은 독보를 할 수 없었다. 청주교도소 정치범들은 교도소가 포기한 상태였다. 독보해서 옆에 있는 병사로 가 공중보건의가 서랍에 넣어 놓은 담배를 가져오기도 했다. 물론 훔쳐온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 가톨릭학생회 출신인 공중보건의의 배려였다. 병사에서 나오는 길에 우리가 있는 사동으로 와 건강 상담하는척 하면서 은근히 귀엣말했다. 병사에 가서 자신의 서랍을 열어보라고 하고는 했다. 보통 담배 두 갑이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은 직접 피우기도 했지만 소지들에게 줘서 교도소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구해오게 시키기도 했다. ‘소지’는 소재라는 일본어 의미인 듯했다. 재소자 중 교도소 안에서 여러가지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야 이 XX야 니가 뭔데 지랄이고?”

충환 형의 같잖다는 투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곳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히야 와카노?”
“허~ 이 XX가 나보고 여기 나와 있다고 지랄한다.”

충환 형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을 했다.

“야 이 XX야 니가 뭔데 우리 형님보고 지랄이고?”

나는 경비교도대의 따귀를 사정없이 올려붙였다. 그때 목포 출신인 임○○이 다가왔다.

“동인아 뭣 땀시 그러냐?”
“이 XX가 충환이 형보고 여기 나와 있다고 지랄한다.”

그 교도대가 임○○에게 몇 대 더 맞았다. 임○○은 한신대 삼민투 위원장 출신이다. 그가 삼민투 위원장으로 있던 시절 한신대에 있는 형님(518광주민중항쟁 故 류동운 열사)의 추모비를 경찰이 철거하기 위해 학교로 진입하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추모비는 외부에 나 있는 스탠드 형태의 계단 위에 있었다. 또, 주변으로는 건물이 에워싸고 있었다. 경찰들이 크레인과 포크레인으로 진입해 들어오면 건물 옥상에서 화염병과 돌, 죽창 등을 던져서 막아냈다고 한다.

한신대에서는 임○○에 대한 일화가 있었다. 시위대열 뒤쪽에서 최루탄을 쏘기 위해 길옆으로 흐르는 하천의 좁은 다리를 건너오는 전경 1개 분대를 쇠파이프를 들고 모두 물에 처박아 넣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나에게 형님의 추모비를 지킨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했고, 나는 그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해 줬다.

그는 목포에서 재야운동을 하시던 故 임기준 목사님의 아들이다. 아버지도 형님도 빵잡이였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가정형편(?)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와 76년 서울명동성당사건 여파로 전국 일제검속이 실시되면서 같은 시기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빵잡이란 감방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일종의 은어다. 그러니까 전과자라는 이야기다.

그는 한때 깡패가 될까, 대학을 갈까 고민했다고 한다. 집안 배경도 있어 한신대를 가게 됐다고 했다. 아마 깡패가 되었다면 목포를 기반으로 하는 ‘양은이파’의 행동대장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임○○에게 몇 대를 더 맞은 경비교도대가 도망을 치더니 사동 간 연결통로에서 운동장으로 나 있는 문으로 나가서는 빗장을 채웠다. 그러더니 쇠창살 사이로 우리에게 욕을 해댔다. 그때 임○○이 어디선가 주먹보다 큰 돌을 손에 들고 오더니 불과 2m도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에서 경비교도대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다행히도 쇠창살 사이로 빠지지 않고 부딪혀 깨져버렸다. 나 또한 단과반이지만 그는 나보다 확실히 한 수 위의 단과반이었다. 욕을 하던 경비교도대가 너무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도망쳤다.

조금 있자 경비교도대가 떼로 몰려왔다. 한 서른 명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아마 우리들과 거의 나이가 비슷한 또래였을 것이다. 서로가 처한 존재의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패싸움이 벌어졌다.

우리 쪽은 대체로 밖에서 각목이나 쇠파이프쯤은 흔하게 휘두르던 아이들이 많았다. 말이 학생이지 그런 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달려오는 한 명을 향해 날라 이단 옆차기로 차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에 맞은 경교대가 바닥에 쓰러졌다. 나 또한 팔을 잘못 디뎠는지 팔이 시큰했다. 팔꿈치를 보니 팔이 빠진 것 같았다.

팔을 잡고 옆에 서서 싸움을 보니 가관이 아니었다. 그 중 임○○은 확실히 군계일학이었다. 정확하게 막고 정확하게 상대를 때렸다. 확실한 싸움꾼이었다. 그렇게 싸움판이 벌어진지 조금 지나자 교도관들이 달려와 말리면서 싸움이 정리됐다.

나는 빠진 팔을 치료받기 위해 충북대학교병원으로 갔다. 일명 ‘죄수복’을 입지 않고 ‘가오’ 잡는다고 안에서 입고 지내던 사제 추리닝 차림으로 나갔는데 계호로 따라나선 교도관들도 사복을 입었고, 친했던 교도부장이 허리에 권총을 찬 채로 나를 따라왔다. 병원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깁스하고 왔다. 그때 뭐가 문제였는지 팔을 반듯이 펴면 지금도 통증이 온다.

싸움이 있었던 다음 날이 되자 교도소 내 비둘기파의 한 사람인 현주임이 우리 사동으로 찾아왔다.

“동인 씨 큰일 났다.”
“왜요?”
“동인 씨가 발로 찬 교도대 갈비가 부러졌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쌌소? 갸들이 나를 패서 내 팔이 부러졌는데”
“본인이 넘어지면서 그랬다며”
“그게 아니라 갸들이 나를 때렸다니까”
“허 참”
“그러니 서로 없던 일로 하입시다.”
“그럴까?”
“그러지요”

강경파가 아니라 협상을 잘하는 현주임이 온 것, 그리고 그가 없던 일로 하자는 말에 쉽게 꼬리를 내리는 것을 보고 경비교도대 갈비뼈가 부러진 것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팔이 빠진 것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고자 선수 치러 온 것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나 또한 그 일을 더 길게 물어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충환이 형은 나보다 석 달 정도 먼저 나갔다. 나가면 운동화 고무 깔창을 파서 소형 라디오를 숨겨서 넣어달라는 부탁도 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검사가 꼼꼼해서 불가능했다고 한다. 봄은 오고 있었고 그렇게 87년 6월도 다가오고 있었다.

tele
Print Friendly, PDF &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