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가 ‘강추’한 일본 전범기업 아사히글라스의 역사

아사히글라스, "당사는 군수 생산에 총력을 결집해 전시에 기여했다"
일본 패전으로 타격받았지만, 한국전쟁 겪으며 급부상
“조선 동란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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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15:18 | 최종 업데이트 2018-03-26 17:24

[편집자 주] 아사히글라스 집단 해고가 1,000일을 넘었습니다. 아사히글라스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2월 21일부터 3월 9일까지 일본 도쿄도, 오사카시에 있는 아사히글라스 공장을 찾아 해고 사태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 원정 투쟁을 마쳤습니다. <뉴스민>은 4~7일 일본 도쿄도를 방문해 취재했고, 아사히글라스 그룹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연재합니다.

지난 기사: 아사히글라스 해고 1000일, 해고노동자 일본 본사 원정투쟁기
한국 촛불을 부러워하는 일본 시민들···“아사히글라스 복직 염원”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이 결성하자 계약을 중도 해지해 178명을 길거리로 내몬 아사히초자화인테크노코리아(한국아사히글라스)는 제국주의 일본 전쟁 범죄에 적극 가담한 기업이다.

아사히글라스는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2012년 일본기업 1,493곳을 조사해 발표한 299개 전범 기업에 포함됐다. <뉴스민>은 이달 초 일본 국회도서관을 방문해 아사히글라스가 직접 작성한 사사(社史)를 입수해 분석했다.

아사히글라스는 일본 3대 재벌이자 군함도 조선인 강제동원, 2차 세계 대전 가미카제(제2차 세계대전 말기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여 자살 공격한 일본제국의 특공대)의 전투기 제로센(A6M) 등을 제작한 재벌 미쓰비시 계열 기업이다. 사사에는 미쓰비시와 함께 전시 만주~조선 지역 공장 설립에 대한 기록, 내화 벽돌, 전투기 유조탱크 보호막 생산 등 군수 산업에 몰두했던 아사히글라스의 '기여'가 드러났다.

패망과 함께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철수했던 아사히글라스는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구미시장이던 2004년 구미시와 경북도의 유치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아사히글라스 설립 후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08년 3월 현지 공장을 방문해 시찰하고 직원을 격려했다. 이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방문 외투기업을 아사히글라스 공장으로 정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 기념재단'에 게시한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구미 공장 방문 경험을 기록하며 한국아사히글라스를 칭찬했다.

이 전 대통령은 "(아사히글라스) 사장실에 들어선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방에는 손님이 앉을 공간이 없었다···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중소기업들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재고하게 됐다. 아사히글라스 이야기를 들려준 후 나는 중소기업 대표들에게 말했다···"라고 기록했다.(이명박 회고록 링크)

▲2008년 3월 아사히글라스 구미공장을 방문한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 출처=산업통상자원부

이 전 대통령이 2008년 4월 20일 일본에 방문할 당시,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한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남유진 구미시장은 일본 도쿄 제국호텔에서 아사히글라스와 양해각서를 체결해 추가 투자를 약속받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일본을 오가며 소위 '세일즈 외교'를 벌였고, 일본 기업의 적극적인 한국 진출을 당부했다. 2009년에는 일경련(일본경제인단체연합회)과 만나 아사히글라스 방문 경험에 대해 "지난해 당기순이익이 17%에 이르렀고 오늘 이곳에서 증설 투자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면서 "이러한 기업이 더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관련 기사: 이명박"일본기업 전용공단만든다")

김관용 도지사도 2008년 일본 방문 당시 “한국의 사업 환경이 일본의 사업 환경이 좋다고 생각한다”라며 “(일본 지방에 비해) 기술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가능하고 노임도 싸다. 일본 기업이 걱정하던 노동조합 문제도 산업 평화를 달성함으로써 해결했다”라고 설명했다. (관련기사:김관용 "일본 기업에 한국 오면 이익있다는 것 보여줘야")

아사히글라스가 한국 일자리 창출을 위해 진출한 것은 아니다. 당시 진출 배경으로는 "구미시 공단부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투자 기회를 놓칠 경우 한국 시장 진출이 어렵고, 한국 시장을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관련기사: 日아사히글라스 한국진출, 성공여부는 불투명)

아사히글라스는 구미 공장 설립 전 한국전기초자 주식부터 매입했다. 한국전기초자 지분을 확보한 아사히글라스는 이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1년, 대우그룹 출신 서두칠 사장 등 한국전기초자 임원들을 해임하고 한국전기초자 상장을 폐지했다. 상장 폐지 후 국내 시장 상황이나 소액 투자자, 감독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경영할 수 있게 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은 아사히글라스의 사례를 외국 자본의 파괴적 M&A사례로 보고 있다. 현재 일본아사히글라스는 한국아사히글라스 지분 67%를 보유했고, 나머지 33%는 한국전기초자가 가지고 있다. 한국전기초자 지분은 100% 일본아사히글라스가 갖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한국아사히글라스는 2017년 결산 배당으로 1,100억 원을 올 상반기 내 주주(일본아사히글라스)에게 지급할 계획이다. (관련 기사: 아사히초자화인테크노, 화끈한 돈잔치...순이익 16배 배당지급) 2015년 한국인 노동자 대량 해고, 노동부의 해고자 직접 고용 명령도 이행하지 않으며 막대한 이익을 일본 본토로 보내는 아사히글라스의 모습은,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키던 시절 식민지에 진출한 일본 재벌의 모습과 겹친다.

유명한 전범 기업 미쓰비시 계열사 아사히글라스
본토 노동자도 탄압...35명 해고 기록
일제 수탈기구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적극적인 합작

1차 세계 대전 즈음 일본은 전쟁의 영향을 받아 광공업 노동자가 급증했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는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파업도 발생했다. 1907년 9월 8일 창립한 아사히글라스는 1921년 한 차례 노동자를 감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강제 해고였는지는 알 수 없다. 300명이던 노동자가 1923년 170명까지 줄었다. 공장 노동자는 줄었지만, 암모니아 소다법 공정 활용도를 높였고, 노동자 특별 잔업과 강습 교육을 통해 이전보다 비교적 노동의 강도와 수준을 높였다.

당시 기업의 주요 설비는 창립 후 7년이 흐르며 노후화된 상황인 데다, 작업이 부진할 수 있을 정도로 실내 악취와 분진이 심했다. 이에 대해 아사히글라스는 "공장이 아직 현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원 감축에 의해 공원(노동자)에 과중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また工場がまだ近代化されていなかったので、人員縮小によって工員に労働過重の感を与えていた)"라고 기록했다.

분쟁 사례도 나온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1923년, 아사히글라스는 도쿄 남쪽 요코하마시의 쓰루미(鶴見) 공장이 지진으로 생산이 중단됐다. 이에 후쿠오카 현 기타큐슈 시 마키야마(牧山) 공장에서 유리창 생산을 도맡아 증산에 힘쓰고 있었다. 기타큐슈 지역은 기타큐슈철공조합(이후 일본노동총동맹에 가입)이 결성돼 파업이 벌어지던 상태였다. 당시 아사히글라스 사내에도 노동조합이 있었다.

▲마키야마 공장(왼쪽)과 쓰루미(오른쪽) 공장. [출처=아사히글라스 사사]
▲간토대지진으로 무너진 쓰루미 공장 [출처=아사히글라스 사사]

아사히글라스는 파업 등이 공장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35명을 해고했고, 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사측은 비조합원을 고향에 돌려보내고 생산을 중지했다. 작업 중지 기간을 이용해 시설을 정비했고, 돌려보냈던 비조합원을 임시인부로 불러 작업을 재개했다. 이 과정에서 노조의 힘이 빠졌다. 노동쟁의는 2개월 이상 진행됐다. 이는 당대 가장 긴 파업이었다. 이후 마키야마 공장에는 공장위원회가 생겼고, 정기적인 노사 협의를 시작했다.

대공황 즈음, 아사히글라스의 주요 고객이었던 중국은 벨기에와 합작해 독자적인 유리창 생산을 시작했다. 1925년, 아사히글라스는 만주지역 수탈을 위해 설립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와 합작해 만주에 창광초자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아사히글라스는 300만 엔 가운데 180만 엔을 창광초자주식회사에 투자하면서 경영 일체를 떠맡았다.

중국 진출을 중요하게 여겼던 아사히글라스는 일본에서 직원을 선발해 중국에 파견했다. 당시 창광초자주식회사에는 중국인 노동자도 수백 명을 고용했다. 이에 사측은 "(공장 설립)작업이 순조롭게 성적을 올렸고, 제품의 판로는 중국 전역에 걸쳐 수립돼, 당사 해외발전의 첫걸음이 됐다(作業は順調の成績を上げ、その製品の販路は中国全土にわたり、当社海外発展の第一歩を輝かしく樹立した)"라고 썼다.

아사히글라스는 중국~만주 지역에서 만철과 합작을 통해 사세를 확장했다. 만주국 출범 이후, 아사히글라스는 만주조련주식회사(満州曹連株式会社) 설립에 손을 뻗었다. 자본금 800만 엔 중 아시히글라스는 35%, 만철 25%, 만주화학 25%, 만주창광초자 15%를 분담했다. 만주창광초자는 만주국의 성장과 함께 판유리 수요가 증가하면서, 공장도 증설했다.

전시 일제에 적극적인 협력
“군수 자재 생산에 총력 결집해 시국에 기여”
군수용 철강을 위한 내화 벽돌 생산

중일전쟁(1937)이 시작되며 일본은 본격적으로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전시 체제에서 군수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대됐다. 아사히글라스도 민수 제품인 보통 판유리 생산을 대폭 줄이고 군수 제품인 광학 유리, 내화벽돌 생산을 늘렸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자 아사히글라스는 판유리와 소다(유리의 원료) 생산 감소를 요구받았다. 일반 판유리 공장은 정비 대상이 되었고, 쓰루미 공장과 마키야마 공장은 공장 설비 일부를 정부에 제공했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펼치는 동안 아사히글라스는 전투기의 방탄유리를 만들었다. 사진은 F-104J, [출처=아사히글라스 사사]

전시에 수요가 증가한 내화벽돌도 생산했다. (내화벽돌은 전시 필수 생산품인 철강을 만들기 위한 용광로 자제로 쓰인다.) 아사히글라스는 1940년 첫 내화벽돌을 출하했고, 벽돌 생산을 늘리기 위해 설비를 충당하고 공장도 인수했다.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아사히글라스 생산품 가운데 군수 물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15%였는데, 태평양전쟁 돌입 후에는 군수 물자 생산이 30% 이상으로 늘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한 1941년, 아사히글라스는 군함도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잘 알려진 미쓰비시와 공동으로 함경북도 청진에 내화벽돌 공장을 세웠다. 공장 설립 당시 60%(미쓰비시 광업은 40%)를 투자했다. 그해 12월, 공장 이름을 아사히글라스 주식회사 청진 공장(旭硝子株式会社清津工場)이라고 붙였다.

같은 해 아사히글라스는 조선총독부와 함께 일본 판유리 조선출장소를 기반으로 '조선 판유리 판매 주식회사'도 설립했다. 또한, 항공기의 유조탱크가 총알에 맞아도 기름이 새지 않도록 하는 방어막 연구에도 1년이 넘게 몰두했고, 아크릴산메틸에스테르(도료의 일종)를 개발했다. 아사히글라스는 이 제품을 쓰루미 공장에서 생산하다 1942년 말 도료 생산 공장 하나를 더 만들었다. 생산량은 월 100톤 규모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아사히글라스는 군수용 유리섬유 생산에도 박차를 가했다.

▲아사히글라스가 생산한 판유리. [출처=아사히글라스 사사]

1944년, 아사히글라스는 니혼카세이공업(日本化成工業)과 합병하여 미쓰비시카세이공업(三菱化成工業)주식회사가 된다. 아사히글라스는 전시 회사의 역할에 대해 "당사는 가능한 한 시국 산업으로 전환을 도모하고 유기 유리를 비롯한 안전 유리, 유리 섬유, 기타 일련의 군수용 유리와 브롬, 질화소다 등 중요한 군수 자재 생산에 총력을 결집해 시국에 기여했다(当社は可能な限り時局産業への転換を図り、有機ガラスをはじめ、安全ガラス、ガラス繊維その他一連の軍需用ガラス、並びに臭素、窒化ソーダなど、重要な軍需資材の生産に総力を結集して、時局に寄与したのであった)"라고 기록했다.

일본 패전 후 재벌해체···미쓰비시카세이(아사히글라스 전신) 분화
한국전쟁 특수로 다시 재기
“조선 동란은 생각지도 못한 복”

패망 후 일본에는 연합군사령부(GHQ)가 들어와 농지개혁, 노동개혁, 재벌해체 정책을 펼쳤다. 일본 재벌은 가족-본사-직계기업-관계회사라는 수직적 구조였고, 정점에는 모든 계열 기업을 지배하는 지주회사가 있었다. 아사히글라스(당시 미쓰비시카세이, 三菱化成)도 제한 회사 지정, 지주회사 정리위원회 대상 지주회사로 지정, 재벌 직계 회사 지정 조치를 받았다. 미쓰비시 재벌 직계회사였던 아사히글라스는 미쓰비시 본사가 해체되면서 아사히글라스 내 주요 임원으로 있던 미쓰비시 본사 관계자들이 대거 사임한다.

미쓰비시카세이는 연합군사령부의 재벌 해체 정책에 따라 회사를 분할하는 재건 정비 계획을 세웠다. 결국, 미쓰비시카세이는 니혼카세이(日本化成)공업, 아사히글라스(旭硝子), 신광레이온(新光レイヨン)으로 분화됐다. 1950년 5월 29일, 아사히글라스가 새롭게 출범하며 창립 총회가 열렸다. 6월 1일, 미쓰비시카세이는 해산했다.

새롭게 출발한 아사히글라스는 한국전쟁 특수를 겪으며 급성장했다. 아사히글라스는 1952년 전쟁특수 수입이 8억 달러를 넘어, "국제수지에서 막대한 외화 획득이 가능했다(国際収支において多大の外貨の獲得を可能にした)"라고 기록했다. 당시 수입은 총 외환 수입 중 약 40%를 차지했다.

특수뿐만 아니라, 군수품 가격을 올려 초과 이익도 얻었다. 아사히글라스는 "군수품 가격이 조금 높아도 미군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한국에 가깝다는 지역적인 이유만으로 다른 나라보다 고가에(군수품을) 팔 수 있었다(特需は、もちろん軍需品であるだけに価格が少しぐらい高くとも、米軍は気にしなかったし、韓国に近いという地域的理由だけで、他の国に比べ割高であろうとも売込むことができた)."라고 설명했다.

아사히글라스는 한국전쟁 특수를 겪으며 "조선 동란은 우리나라 경제에 새로운 바람이자,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일으켰다(このように朝鮮動乱は、まさしくわが国経済にとって、「神風」であり、思いがけない幸いをもたらしたのであった)"라고 기록했다.

2004년 아사히글라스는 경상북도 구미시에 진출했다. 경상북도·구미시는 아사히글라스에 조세감면, 임대료감면 등을 약속했고, 아사히글라스는 땅 34만㎡ 무상임대, 국세 5년 면제, 지방세 15년 감면 등의 혜택을 받았다.

2015년 5월 29일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업체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한 달 뒤 6월 30일, 아사히글라스는 사내하청 노동자 178명을 모두 해고했다. 경상북도·구미시는 해고 사태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국의 중앙노동위원회는 아사히글라스의 도급계약 해지가 부당노동행위라고 판정하고 고용노동부는 아사히글라스에 해고노동자 직접고용을 명령했지만, 아사히글라스는 이행하지 않고 불복 소송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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