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마르크스와 최저임금법 /이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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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가 탄생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주요 일간지와 각종 매체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재조명하는 다양한 특집을 준비해서 선보였다. 흥미롭게도 내가 접한 특집들 대부분은 ‘고전’으로서 『자본』이 가지는 가치를 이야기하기에 바빴다. 마르크스의 천재성이 상찬을 받고, 반공주의 한국에 마르크스를 소개한 ‘용감한 선구자들’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통찰을 따라 배울 것을 주문하는 목소리들이 드높았다.

그런데 이렇게 뜨거운 마르크스 재평가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집권 여당이 정치적인 적대자라고 호언해온 야당들과 힘을 합쳐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를 골자로 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몇 달 전부터 논란이 되었지만 설마 집권 여당이 본인들 스스로 야당들과 각을 세워온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을 쉽사리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설마 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진보를 자처하던 국회의원들도 말 잔치만 했을 뿐, 정작 “소득 주도 성장”에 대한 어떤 전망이나 대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촛불이 보여준 민주주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집권했다는 여당이지만, 노동자의 편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는 자본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본심이 폭로된 것이다. 물론 그 속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에게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하는 이런 극단적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책임 있는 수권 정당”이 노동운동세력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런데도 최저임금 인상을 먼저 들고나온 당사자임에도 정작 개정안 통과가 목전에 닥치자 보여준 민주당의 행보는 분명 정치적 자아의 분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개정안을 통과시킨 뒤에 이 분열을 메우려는 집권 여당 지지자들이나 ‘어용 지식인들’의 궤변을 도처에서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과연 이런 장면과 마르크스의 『자본』을 고전이라고 추켜세우는 장면은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자본』을 고전으로 대하고 마는 그 태도야말로 어쩌면 “소득 주도 성장”을 이야기하면서도 현실을 핑계로 손쉽게 자신들의 전망과 대의를 포기해버리는 이른바 한국 진보의 본질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행태의 결과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비판해온 정치적 반대자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반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는 정치적 상상의 폐색이다.

▲5월 2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에게 다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왼쪽 사진=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자), 칼 마르크스(오른쪽 사진)

이 도저한 탈정치성은 지금 한국의 의회와 정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일방적인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를 변혁해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신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 민주주의를 촛불이라는 스펙터클에 가둬버린 채 마르크스의 『자본』처럼 박제로 만들어버리려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드루킹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미 이들은 정치를 ‘공작’의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정치적 요구를 과잉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내편’ 아니면 모두가 적이라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유물이 되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은 극단적 자본주의로 인해 대다수 노동자들이 신음했다.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애덤 스미스나 로버트 오웬 같은 이들도 고통받는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 핵심에 바로 임금 문제가 있었다. 애덤 스미스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의 교육을 대책으로 제시한 것과 달리 오웬은 개인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집단적으로 적절하게 노동시간을 분배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우리도 잘 알듯이 청년 마르크스는 오웬의 해결책을 급진적이라고 칭찬하면서도 본인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대안을 내세웠다.

오늘날 한국은 과연 19세기 영국과 얼마나 다를까. 사실상 이번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의 진실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진보를 자처하고 있는 집권 여당에게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그리고 집권 여당이 보여주고 있는 대응방식도 과거 참여정부 시절의 악몽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노동계가 귀족노조라서 생트집을 잡는다는 억지는 그만 부리자. 마르크스가 임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봤던 까닭은 그들이 자신들의 임금 인상만을 위해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노동계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