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25-끝) 왜 아직 김수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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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황규관 시인이 연재한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25회로 끝이 납니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김수영이 떠난 지 50년이 지났지만, 그가 남긴 진동은 아직 멈추지 않고 있다. 과연 그가 생전에 어떤 영향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김수영이 남긴 사후 영향력이 단지 문학 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대한민국 지성사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아마도 이같은 현상은 그가 보여준 산문정신의 개가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남긴 산문은 지금 읽어도 그 생생함을 잃지 않고 있거니와 시인 특유의 직관과 통찰이 산문 전편에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김수영의 시는 오늘날 어떻게 얼마만큼 받아들여 지고 있는 것일까? 김수영에 대한 석·박사 논문이 넘쳐나고 있는 현상과는 별개로 그의 시가 시 자체로 읽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못 의문이 든다. 여기서 말하는 ‘시 자체’는 당연히 예술(주의)적 접근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미 김수영 자신이 시에 대한 그러한 관념 자체를 벗어버린 지 오래되기도 했다.

사후 50년이 지나서도 김수영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냉정하게 그 이유를 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김수영이 구축한 시적 양식은 그의 사후 곡해되어 계승되어온 측면이 있다. 예컨대 황현산은 「김수영의 현대성 혹은 현재성」의 마지막 단락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한국의 젊은 시인들은’-인용자) 김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사소한 것들에 주의를 흩뜨리면서도 현실이 시적 가치를 띠는 계기에 정신과 감각을 집중한다. 그들이 가볍고 변덕스럽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교양의 틀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모한 모더니스트로 폄하되는 것은, 김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모험을 모험의 지식으로 뒤쫓는 모험가들, 저 아류 모험가들의 안전한 모험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인들은 한때 자신들을 ‘미래파’라고 부르려 하였다. 미래파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지만 그 말이 빈말은 아니다. 시가 미래를 전망하는 지점은 현실이 은유적 힘을 얻는 알레고리적 계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쩌면, 김수영이 보기에는,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뛰는 날에 사는 것이겠지만 여전히 “도시의 피로”에서 배운다. 그들은 현실이 가볍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말로 현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의 젊은 시인들”, 즉 이 글이 씌어질 당시의 “미래파”가 왜 마지막에 호출되는지 의아한 것도 의아한 것이지만, “미래파” 시인들을 김수영의 계보 안에 위치시키려는 비평적 욕망인 여실히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 당시의 “미래파”가 갖는 문학사적 공과와는 상관없이 그러니까 논리적 비약에 다름 아닌데, 중요한 것은 논리적 비약에 있다기보다 김수영 시의 양식적 특징만을 뽑아 김수영이 끼친 영향을 일면화시킨 점이다. 이는 김수영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인용 구절의 “도시의 피로” 자체가 김수영의 시에서는 하나의 알레고리인데 황현산은 그 뜻을 직역하고 말았다.

한국 근현대시사에서 김수영이 갖는 독특함은 양식적 특징 자체가 아니다. 김수영의 특징은 양식으로 드러난 “꽃”이 아니라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는 과정에 있다. 그 과정에서의 고투가 현실을 새로 쓰려는 열망과 만났을 때 김수영의 “꽃”이 가능했던 것이다. 김수영은 자신의 산문 「체취의 신뢰감」에서 《사계》 동인들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감히 말한다. 고통이 모자란다고! ‘언어’에 대한 고통이 아닌 그 이전의 고통이 모자란다고.

그리고 그 고통을 위해서는 ‘진실의 원점’ 운운의 시의 지식까지도 일단 잊버리라고. 시만 남겨 놓은 절망을 하지 말고 시까지도 내던지는 철저한 절망을 하라고.” 동시에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火焰)”(「모더니티의 문제」)이라고도 했다. 김수영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시를 시 이전의 혼돈 상태로 전회시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역설적이게도 “지성의 화염(火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지성의 화염(火焰)”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뒤떨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이다. 이 자각이 “현대시의 양심”이며 “시적 인식”이다. 그리고 “시적 인식이란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지점에서 바로 그의 ‘반시론’이 시작된다.

그런데 “새로운 진실(즉 새로운 리얼리티)”을 발견하는 일은 시인에게 주어진 현실을 괄호치고는 불가능하며, 김수영은 평생의 시 작업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었다. 김수영 시의 양식적 특징이 독특한 것은 그의 사유의 독특성과 표현 방식의 독특함에 앞서 그가 인식한 현실이 그렇게 간단치 않아서였다. 산문적 인식(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왜냐하면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며”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침공(侵攻)적이고 의식적”(이상 「시여, 침을 뱉어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수영 시의 특징을 논할 때, 김수영의 산문적 인식을 소거하는 것은 위험한 접근이며 김수영의 시를 형해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김수영을 비판적으로 넘어서기 위해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이것은 저 해묵은 ‘리얼리즘/모더니즘’ 구도를 벗어나는 새로운 문제이다. 김수영이 한국 모더니즘 시사에서 어떤 진경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주었지만, 그의 모더니즘을 지탱해준 것은 리얼리스트로서의 정신이랄까, 지성이었다. 즉 그의 모험은 단지 형식을 향한 모험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모험이었다. 그가 하이데거의 ‘릴케론’에서 배운 것도 바로 존재를 향한 모험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를 향한 모험은 무엇이었던가.

더욱더 모험적인 자들(시인들-인용자)은 보호받지 못한 존재의 불행(das Unheile)을 세계적 현존재의 온전한 행복(das Heile)에로 향하게 한다. 이것이 말해야 할 것이다. 말함에서 그것이 인간에게로 전향해 온다. 더욱더 모험적인 자들은 노래하는 자들의 [삶의] 양식을 가진 더욱더 [참답게] 말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노래하는 방식은 모든 계획적인 자기관철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욕망(Begehren)이라는 의미에서의 의욕이 아니다. 그들의 노래는 가까이에 세워놓아야 할 [제작될] 어떤 것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 노래 속에서는 내면세계공간 자체가 스스로 마련되고 있다. 이렇게 노래하는 자들의 노래는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러한 직업적 용무도 아니다.

하이데거적 모험은 바로 “열린 장”을 몰아세우려는 자기관철 의지를 벗어나려는 모험이다. 그것은 “욕망”도 아니고, ‘획득’도 아니고, 단순한 의욕도 아니다. “용무”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존재자가 자신을 발생시킨 존재로 끊임없이 “전향”하는 것이다. 김수영이 물론 하이데거의 지침(?)을 시에 그대로 반영시킨 것은 아니다. 언제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김수영의 시는 사물과 사건을 해석하고 내면화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되지 사물과 사건 그 자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김수영이 처한 현실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세계와 현실에 대한 그의 인식은 너무도 일반적인 것 같지만 너무도 보편적이며 그것이 작품으로 현실화될 때는 또 그 독특함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김수영이 뭐라 했던가? “시인의 지성은 우선 세계를 걸쳐서 우리나라로 돌아와야 한다.” “작은 눈으로 큰 현실을 다루거나 작은 눈으로 작은 현실을 다루지 말고 큰 눈으로 작은 현실을 다루게 되어야 할 것이다.”(「평균 수준의 수확」)

‘김수영의 현실’은 바로 우리의 근대사에 다름 아니었으며, “설움”과 “비애”를 그에게 그치지 않고 안겨준 역사적 시간 속에서 그가 무엇을 발견했고, 발견한 것을 어떻게 표현했느냐로 돌아와야 비로소 우리는 김수영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사상된 김수영의 시는 ‘존재론적’으로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을 외면한 양식의 계승은 결국 김수영을 대상화,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몰아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김수영이라는 “열린 장”을 “모든 계획적인 자기관철에서 벗어나” 대하는 것은 바로 그가 통과한 현실과 함께 그의 시를 읽는 일이다. 이것이 또 하나의 민중주의적 관점이라 비난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김수영이 역사에서 발견한 것은, 역사를 예나 지금이나 구성하고 있는 ‘민중’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김수영에게서 무거운 역사주의나 비장한 민중주의를 찾으려는 노력은 허사에 가깝다. 그가 발견한 민중은 고통을 넘어, 아니 고통을 살면서 아름답고 쾌활했다. 이게 김수영의 민중이었으며, 전쟁과 혁명 그리고 그 폐허에서 방황한 다음에 얻은 명랑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으로 구성된 일종의 ‘씨’였다. 그 ‘씨’는 현실화된 존재가 아니라 잠재적인 존재였지만, 언젠가는 서로 “사랑에 미쳐 날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에서 역사에 대한 예민한 인식과 그를 통한 새로운 역사 인식을 삭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역사 속에서 자유를 갈망했고 혁명을 살았으며 사랑을 발명했다. 이 사실을 접어둔 채 말하는 그의 자유와 혁명과 사랑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낭만적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의 모험도 바로 자유와 혁명과 사랑을 향한 모험이었지, 예술주의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이러한 모험이 “더욱더 모험적인 자”로서 추구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노래’로 남았던 것이다. 그의 노래는 그러니까 실존 상태(존재자)에서 존재를 향한 모험, 존재를 구획하는 언어를 통한 모험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봤을 때 하이데거의 영향이 아니라 본래적인 그의 태도였다. 그 태도가 혹 하이데거를 불러들인 것은 아닐까?

오늘날 왜 아직 김수영인가, 하는 문제는 단지 그가 남긴 시적 양식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대하는 그의 존재 양태, 태도, 윤리, 투쟁 때문이다. 그가 실험적이었다면 그 실험은 투쟁을 통한 실험이었다. 혁명 직후에 말한 ‘시의 투박함’은 현실이 이미 시였기에 특별한 양식이 불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혁명이 짓밟히고 나서는 다시 혁명을 현실에 파종하는 것이었다. 이 제한적인 실천이, 그러니까 시적 실천에 집중한 점이 어쩔 수 없는 김수영의 한계라면 한계이고 위대함이라면 위대함이다.

그렇다면 김수영을 다시 읽으면서 유념해야 할 것은 그의 시 이전이다. 시 이전을 인식하는 김수영의 태도가 언제나 문제인데, 그는 “인식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백 번, 천 번, 만 번이라도 되풀이해 말하고 싶다”(「시적 인식과 새로움」)고 했다. 자기 시의 비밀은 자신의 번역에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김수영 시의 비밀은 바로 ‘현실 인식’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는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했다. 남들이 ‘끝’이라고 믿었던 데에서 그는 언제나 다시 시작하려 했다. 그게 설령 “헛소리”라고 할지라도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를 믿었기 때문이다. “시의 기적”을 말이다.(「시여, 침을 뱉어라」)

오늘날 우리는 극대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제 자본주의가 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자본주의의 극대화는 내부 착취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를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게 사실 그 단계적 특성은 이제 항시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4차산업혁명이라고? 이런 망상도 사실은 그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역량을 이미 상실해버렸다. 혹자들은 자본주의의 극대화 앞에서도 시는 더욱 필요할 것이며 이제 시만이 유일한 탈구 지점이라고 한다. 도대체 시가 무슨 힘으로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사실 이미 시는 한낱 나무 그늘 아래서의 농담이 된 지가 꽤 되었기 때문이다. 시는 얼마 안 가 자본주의의 신경 구조로 완전히 편입될 것이다.

이럴 때 등장 가능한 것이 일종의 ‘반시(反詩)’인데, 이것도 단지 미학적 전회로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시는 무엇인가? 그것은 묻는 일이다. 당신이 말한 사실이 진실인가? 당신이 떠드는 도덕이 진리인가? 당신이 나에게 던진 돌멩이는 정말 당신 것인가? 당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가 물음이라는 말은 당연히 많은 의혹을 살 것이다. 시는 다르게 보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말해지곤 한다. 다르게 본다는 것은 여러 관점으로 본다는 말과 같은 것이지 엉뚱하게 보는 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왜 다르게 봐야 하는가? 시인의 역할은 오로지 세계와 삶의 진실을 발견해야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로 향하는 도정에서 도덕과 상식, 그리고 정의는 부차적인 문제로 떨어질 수 있다. 도리어 그것들이 진실을 가로막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것들은 역사를 거듭하며 단단해진 습속들과 가치들이니까.

니체가 철학의 과제를 ‘시대를 거스르는(Unzeit)’ 것이라고 했을 때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겨냥해서일 것이다. ‘시대를 거스르는’ 사업의 흐름에 김수영이 있었다고 말하면 독단일까? 만일 시가 반시가 되려면, 그것은 기정사실을 파문하는 일에 동참하는 일이어야 하고, 그러면서 사랑을 배우는 일이어야 한다. 이게 김수영이 남긴 활어(活語)이다. 그런데 김수영이 ‘백의’와 간통을 했듯, 오늘날의 시도 자본주의와 간통을 해야 하는 걸까? 이것은 답을 요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문제를 생산하는 문제일 뿐이다. 시는 바로 이런 문제를 생산하는 문제여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김수영에게서 배울 수 있다. 물론 김수영에게서만 배울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김수영식의 문제가 아직도 일렁이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그의 유산을 탕진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을 다 탕진했을 때, 김수영은 드디어 ‘시인들의 시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를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있게 하는 것은 후대의 과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