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을 위한 욘수 철학] (7) 둥근 지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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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7:40 | 최종 업데이트 2018-06-20 17:42

[편집자 주: 현재 지방대 철학과를 다니고 있는 예비 실업자, 취업란에 마땅히 쓸 것 하나 없는 한국의 평범한 이십대들 중 하나로, 이런 자기 팔자를 어떻게든 뜯어 고치려고 노력 중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욘수’가 격주 수요일마다 대화로 풀어가는 철학 이야기를 연재한다.]

6. 섬의 로빈슨은 영국의 로빈슨과 달라져야 한다.

섬에 혼자 던져진 로빈슨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이미 난파한 배의 잔해들을 주워 모아 섬을 작은 영국으로 뒤바꿔 놓을 생각’ 말이다.

나는 이런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로빈슨 스스로가 깨닫게 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미셸 투르니에-

남: 18세기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보면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프로크루스테스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처럼 묘사돼.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아 혼자서 무인도에 살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문명사회에서 사는 것처럼 매분, 매초 시간을 재고 자신이 정한 일과에 따라 살아가지.

사람이 시간을 재고 정해진 일과에 따라 사는 건 자신이 남들과 살기 때문이야. ‘사회에서 남들과 만날 약속시간을 정하기 위해서’ 시간이라는 단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따르는 거고. 즉, 시, 분, 초 같은 단위의 시간들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정해져 있는 것이지 자연에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럼 로빈슨 크루소가 자신 혼자 사는 무인도에서 시간을 재고, 시간에 따라 일과를 진행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로빈슨이 표류하기 전 문명사회에 살던 자신과 무인도에 혼자 살게 된 자신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서이지. 자신이 남과 맺는 관계가 달라지면, 자신의 존재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거야.

나: 존재가 달라진다고?

남: 쉽게 예시를 들어볼게. ‘나’ 너는 너라는 사람이 어떻게 정의된다고 생각해?

나: 글쎄... 나는 한 번도 내가 누군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남: 네가 처음 태어났을 땐, 부모나 보호자에 의해 너의 존재가 정의되었을 거야.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아이라는 식으로 말이지. 하지만 네가 부모나 보호자 외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너라는 존재는 달라지기 시작해.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학생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직장동료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수록, 다른 경험을 할수록, 너는 이전의 너와 다른 사람이 되어가지. 즉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존재는 달라지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도 달라져야 하는 거야.

‘로빈슨 크루소’의 로빈슨 크루소는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문명사회에서 배운 것들을 무인도에서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그래서 야생 염소들을 잡아 우리에 가두고, 밭을 갈아 밀을 기르고, 섬 전체를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선언해 스스로를 총독으로 임명하지.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대니얼 디포는 이런 로빈슨 크루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진정한 문명사회의 인간은 사회와 단절되어 혼자 살게 되더라도 야생에서 문명사회를 만들고, 심지어는 야생의 인간(프라이데이)을 문명인으로 교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거야.

신(하느님)에 의해서 이런 문명인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 대니얼 디포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 유럽 문명인조차 사실은 유럽 문명사회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만들어지고 다른 사회, 다른 자연환경과 만남을 통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거지.

그런 저자의 의도에 따라,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를 자신을 변화시킬, 자신과 다른 새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자신이 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섬을 자신처럼 변화시키려 해. 한 마디로 섬을 커다란 로빈슨 크루소로 바꿔버리려는 거야.

7. 디포의 로빈슨, 투르니에의 로빈슨

프라이데이: 로빈슨, 너는 왜 너와 다른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

로빈슨 크루소: 내가 너를 이해하면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생각은 ‘옳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내가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지

남: 섬에서 살게 된 이상, 변해야 할 사람은 ‘프라이데이’가 아닌 ‘로빈슨 크루소’이지. 평생 문명사회 안에서 살다가 갑자기 야생 사회에서 살게 된 사람은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로빈슨 크루소’이니까. ‘방드르디’의 저자인 미셸 투르니에는 이 점을 지적하며 프라이데이, 그러니까 방드르디를 주체적인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묘사했어.

로빈슨의 노예가 되고 그의 가르침을 순종적으로 따랐던 프라이데이와 달리, 방드르디는 로빈슨이 수십 년에 걸쳐서 만든 창고와 집을 폭파시켜 버리지. 그리고는 자신의 거침없고 자유로운 행동들을 보여주며, 섬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순간, 순간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면 그만이라는 것을 로빈슨에게 보여줘.

로빈슨처럼 문명사회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그 안에서 살기 위해 시간, 사유재산과 같이 사회에서 정한 규율을 따르며 살아야만 하지. 그런 규율을 따라야만 ‘규율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에서 살 수 있으니까. 즉 우리가 옳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관념들은 어디까지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그 자체가 옳은 것은 아닌 거야.

‘방드르디’에 등장하는 로빈슨은 원주민 방드르디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하며, 그 사실을 알게 되지. 그래서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모든 관념들 또한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된 거야.

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들은 사실 옳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지.

어쨌든 그 사실을 알게 된 뒤, 로빈슨은 더 이상 창고를 짓거나, 담장을 만드는 일에 집착하지 않아. 섬에서 살면 더 이상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일에 집착하는 대신 로빈슨은 야생 염소의 두개골로 악기를 만들거나, 염소의 가죽으로 연을 만들어 날리는 등 방드르디와 함께 즐겁게 놀지.

섬에서 갇힌 25년 동안 자신의 재산을 만들기 위해 끝없이 일하고, 동시에 원주민들에게 잡아먹힐 두려움에 떨던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 크루소’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만을 하며, 섬에서 사는 것 그 자체를 즐겨. 자신의 옳음을 남에게 강요하지 보단, 남을 이해하려 함으로써 ‘방드르디의 로빈슨’은 낯선 장소에서도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었던 거야.

나: 그럼 ‘남’, 왜 ‘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로빈슨은 섬에서 표류 된 25년 동안 공포와 불안감에 떨면서도 자신의 옳음을 고집한 거지? 네 말대로면 나와 다른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 내게 자유와 행복을 주는데도 말이야.

남: 내 생각에 그 이유는 로빈슨이 평평한 지구를 믿는 사람들과 같은 두려움을 가져서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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