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초등학생에게 물었다. “한자병기 교과서, 어떻게 생각해요?”

“초등학생 교과서를 초등학생이 쓰기 쉽게 만들어주세요.”

19:25

한글날이 금요일인 덕분에 마치 명절이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연휴다. 학생들도 교사도 추석연휴가 끝나자마자 한글날이 며칠 남았는지부터 세어봤더랬다. 10월 3일 개천절이 토요일이서 이번 한글날은 학생들이 손꼽아 기다린 날이다. 학교를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게 반가운 마음에서겠지만 그렇지않더라도 여러 기념일들 중에 한글날은 단연 학생들에게 그 의미가 깊은 날이기 때문이다. 개천절은 너무 멀고 추상적이고 3.1운동 기념일은 마냥 반가워하기 힘든 기념일이지만 한글날은 기리는 이유도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이며 학생들에게도 정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좋은 일이니 말이다. 초등 저학년들도 한글날의 의의와 한글창제의 기쁨, 세종대왕에 대한 감사함을 이맘때면 스스로 표현한다.

하지만 이번 한글날은 마음 편하게 ‘여러분, 한글사랑을 실천합시다’라고 말하기 힘들다. 교육부가 올해 연초 발표한 내용 때문이다. 1970년에 폐기한 교과서 한자병기정책을 2018년부터 초등학교에서 다시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발표 직후부터 논쟁은 뜨거웠다. 학생들의 학업부담이 과중해지는 점을 지적하며 소설가 조정래는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는 아동학대’라고 주장했고 인성교육과 인문학교육을 이유로 찬성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10개월 동안의 논쟁 속에서 정작 그 교과서를 사용할 초등학생들의 의견을 물어본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학교에서 소풍 한번 갈 때도 요즘은 설문조사를 하는데 학자들의 주장이 아니라 실제로 한자교육의 필요성이 있는지 정책수요조사 한번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여러분, 한자병기 교과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음은 대구의 한 초등학교 5학년 한 학급을 대상으로 2015년 10월 8일 설문지로 질문하였고 그중 19명이 응답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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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직 배우지 않았지만 5학년 국어 교과서에 있는 글 하나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가) 부분은 한글전용으로, (나) 부분은 한자 병기 방식으로 적어 읽어보고 어떤 느낌이고 정보를 이해하는 것에 차이가 있는지 비교하게 하였다. 우려와 달리 생각보다 이해도의 차이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한글 전용 부분을 더 잘 이해한 학생이 42%로 나타났지만 (가)와 (나)의 이해도가 비슷하게 나타난 학생이 역시 42%였다. 오히려 한자 병기 부분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은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의견은 선명하게 갈라졌다. 글(나)처럼 한자를 함께 적어 교과서가 만들어진다면 한자 공부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72%의 학생들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또한 어느 방법으로 교과서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84%의 학생들이 한글전용방식을 선택했다. 무엇보다 한자공부가 스스로에게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한두번 조차 없었다고 대답한 학생이 65%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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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교과서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과연 교과서를 쓰고 있는 학생들인가?

왜 한글전용 교과서를 원하는지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한 학생이 이렇게 썼다.

“초등학생들은 잘 쓰고 있는데 갑자기 바꾸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할 말이 없었다. 반박이 불가능한 이유다. 그렇다. 초등학생들은 지금 교과서에 대해 한자가 필요하다 말한 적이 없다. 초등학생들이 지금 교과서로 공부하는데 한자를 몰라 이해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아니 사실, 학생들은 교과서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말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세상의 모든 물건들이 평가받는 시대다. 우리가 사서 쓰는 모든 물건들에 대해 우리는 구매평을 남기고 리뷰를 쓴다. 학교도 평가받고 교사도 평가받는다. 서비스업종 노동자들은 매일 매일이 평가다. 그런데 교과서는? 한국의 교육 역사상 교육정책과 교육과정, 교과서를 학생들에게 평가받은 적이 없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도 마찬가지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물건 산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여기 저기서 나서서 A/S 하겠다고 난리다. 뭘 고치려면 정작 그 물건을 쓰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첫 번째일텐데 말이다.

교육정책과 교육과정, 교과서를 평가하는 대신 학생들은 국가수준 성취도평가-일제고사를 치룬다. 학생들이 높은 성적을 내면 교육정책과 교육과정, 교과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고 학생들 성적이 낮으면 교육정책과 교육과정, 교과서는 실패한 것이다. 그 다음 교육과정 개발에 대한 피드백 자료도 학생들의 성적이다. 학생들이 교과서를 사용하기에 편한지, 교과서를 읽고 싶은지, 교과서의 설명이 부족하거나 어렵지는 않은지 등 수없는 평가요소가 성적 하나로 평가된다. 학생은 그저 교육과정을 수용하는 스펀지일 뿐이다. 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써놓기만 하면 한자교육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발상도, 역사교~과서가 고치면 학생들의 역사인식이 바뀔 거라는 믿음도, 그 모든 변화에 대해 기초적인 정책수요조사 한번 하지 않은 교육부도 모두 학생을 말할 줄 모르고 생각할 줄 모르는 스펀지로 여기는 것이다.

한자병기 교과서에 대한 초등학생들의 생각

한자병기 교과서가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학생들이 당연히 짜증을 낼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짜증을 냈다. 왜 그러냐고.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반응도 있었다.

“그러면 외국인들도 한자 공부 해야겠네요? 더 힘들텐데 어떻게 해요?”

그 학생이 말하는 외국인은 같은 학교에 있는 이주가정(다문화가정) 학생들이었다. 한자병기 교과서가 이주가정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어서 당황했다. 교육부는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도 이주가정 학생들의 한글교육지원예산은 축소되고만 있는데. 앞서 이야기한 정보 찾기에서도 유사한 시사점이 있었다. 성적이 높은 학생과 성적이 낮은 학생은 한글전용으로 쓰인 부분과 한자병기 부분의 이해도가 비슷하게 나타났지만 성적이 중간계층인 학생의 경우에는 한자병기 부분에 대한 이해도가 확연히 떨어졌다. 즉 한자병기 교과서가 모든 학생들이 교과서를 어려워하게 만들기 보다는 학력격차가 더 벌어지고 성적이 중간계층인 학생들을 부진학생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정책이든 그 출발은 그 정책이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집단의 요구와 평가에 있어야 한다. 백성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훈민정음 창제의도를 다시금 생각하며, 한자병기 교과서이든 역사국정교과서이든 계속되는 교과서 논란에 학생들의 의견이 빠져있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지 더 느껴지는 한글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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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가 책에 같이 있다면 한자 공부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 나라 글자를 쓰라고 이미 만들어져 있는데 쓰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초등학생들은 가만히 쓰고 있는데 갑자기 바꾸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한자가 있으면 글의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제발 한자로 바꾸지 마세요. 읽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이해가 안 가요.”

“왜 학생들에겐 물어보지 않고 마음대로 합니까? 그럼 한자의 날도 만드시죠? 왜 세종대왕님이 힘들게 만드신 걸 다른 나라 글자랑 섞어서 하세요. 저희는 힘든데.”

“나는 한자를 많이 알고 여기 적힌 한자도 다 안다. 천자문도 다 외운다. 하지만 한글로 적혀 있는 글이 더 익숙하다.”

“초등학생 교과서를 초등학생이 쓰기 쉽게 만들어주세요.”

“(한자도 함께 쓰자는) 의견도 타당하지만 그것은 어른들의 의견일 뿐 초등학생의 의견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초등학생들도 권리가 있습니다. 어린이! 학생! 청소년!들이 배우는 것이라면 어른들끼리 정하지 말고 물어봐주세요.”

“한자는 못 알아들어서 공부를 할 때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글 나(한자 병기 지문)도 좋지만 글 가(한글 전용 지문)이 더 읽기 편하다.”

“한자를 쓰면 교과서 만드는 사람도 더 어렵고 외국 아이들이 한자도 써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국어는 한글을 배우려고 하는 것인데 한자가 있으면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글 나(한자 병기 지문)처럼 바꾸면 한글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자를 글에 넣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