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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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09:57 | 최종 업데이트 2018-07-16 09:58

권총과 엽총이 거의 동시에 발사되었다. 남자는 여자를 향해 권총을, 여자는 남자를 향해 엽총을 들었다. 고꾸라진 사람은 남자였다. 여자가 더 빨랐다. 이들은 부부다. 부부가 서로에게 총을 겨눠 남편은 죽었고, 아내는 남편을 살해한 죄로 법정에 선다. 남편을 죽인 아내인 재니는 어떻게 될까. 게다가 이들이 흑인이라면 미국 사회에서 어떤 심판을 받을까.

조라 닐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1937)의 한 장면이다. 이 소설은 오프라 윈프리가 TV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2005년 할 베리가 주연한 이 영화의 조감독으로 참여한 사람은 <문라이트>로 세련된 연출미를 보여준 배리 젠킨스 감독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플로리다를 배경으로 한다. 플로리다 출신인 젠킨스는 바다로 둘러싸인 무덥고 축축한 플로리다의 달빛 아래에서 푸른색으로 보이는 ‘흑인’의 성장기를 잘 담아내었다.

▲TV 드라마로 제작된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Their Eyes Were Watching God)’의 한 장면. [사진=https://www.imdb.com]

스페인어 사용자가 20%나 되고, 흑인이 17% 정도인 플로리다는 비교적 다양한 언어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카리브해의 반도인 플로리다는 스페인에 이어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845년 미국의 주가 되었다. 중미와 남미에서는 미국으로 진입하는 위치이며 미국 내에서는 주류 사회에서 ‘탈출’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백남준이 거주하다 타계한 지역이며 어른스트 헤밍웨이와 테네시 윌리엄스가 한때 거주하며 작품을 생산했던 곳이다. 특히,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집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겨울에는 따뜻한 플로리다에서, 여름에는 그가 본 미국의 서부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하던 와이오밍에서 보내며 사냥을 즐기던 헤밍웨이는 1930년대에 플로리다 남쪽 키웨스트에 정착했다. 이 시절 쓴 소설이 <부자와 빈자>이다. 그 후 1940년대 말부터 키웨스트에 거주하며 작품을 남긴 작가가 테네시 윌리엄스다. 당시로는 드물게 동성애자임을 감추지 않고 살았던 윌리엄스는 자신의 파트너 프랭크 멀로와 함께 뉴욕과 키웨스트를 오가며 살았다. 윌리엄스의 키웨스트에 거주하던 시절 쓴 작품 중 하나가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다.

미국의 굵직한 작가들이 굵직한 작품을 남기며 사랑했던 창작의 장소이자 휴양지인 플로리다. 이 플로리다를 배경으로 흑인 여성이 소설을 쓰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플로리다주 중부에 해당하는 올란도(Orlando)에서 북쪽으로 15분 정도 차로 달리면 이튼빌(Eatonville)이 있다. 19세기 말부터 마을이 형성된 이튼빌은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자치 도시였다. 조라 닐 허스턴이 이 지역에서 자랐으며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의 주요 배경도 이튼빌이다. 올란도의 팽창으로 이튼빌의 과거 흔적은 현재 많이 사라졌다. 지금은 대도시 올란도의 위성도시라는 위상에 머물러 있다.

이튼빌에는 해마다 연초에 조라(Zora!) 페스티벌이 열린다. 바로 조라 닐 허스턴의 이름에서 따온 축제다. 1990년 이튼빌에서 첫번째 페스티벌이 열릴 때 <컬러 퍼플>의 작가 앨리스 워커(Alice Walker)가 연설했다. 조라 닐 허스턴을 재발견하도록 일조한 사람이 바로 앨리스 워커이다. 그는 그동안 무덤도 없던 허스턴의 무덤을 찾아다녔고, 그 과정을 글로 남겼다. 역사 속에서 많이 지워진 흑인 여성의 목소리를 복구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워커가 실제로 허스턴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20세기 초 흑인문화부흥기를 일컫는 할렘 르네상스 시기에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 같은 거장과 함께 활동했고 여러 작품을 생산했지만, 많은 여성 작가들이 그렇듯이 허스턴도 사후에 한동안 잊혀졌었다. 60~70년대 여성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흑인 페미니즘이 부상하며 허스턴은 재발견되었다. 소수자 운동은 이렇게 지워진 목소리를 되살려내고 역사를 재구성한다.

흑인 남성 작가들은 흑인 여성 작가들의 문학이 비정치적이라고 여겼다. 여기서 정치/비정치의 구별은 남성 중심의 시각이다. 흑인 남성이 다루는 문학에는 흑인과 백인의 권력관계는 있어도 흑인 사회 내부의 젠더 권력은 탈락한다. 여성의 자리를 가정에 머물게 만들면서 그 가정 안 문제와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를 비정치적인 ‘사랑 타령’ 정도로 취급한다. 자신을 때리고 착취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이러한 폭력의 근원을 생각하는 일이 왜 정치적이지 않단 말인가. 허스턴이 흑인 여성으로서 느낀 감정은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의 초반에 잘 담겨 있다.

“백인 남자는 자기 짐을 내려 놓고는 흑인 남자더러 그걸 들라고 하지. 어쩔 수 없으니까 흑인 남자는 짐을 집어 들긴 하지만 그걸 짊어지고 나르지는 않아. 그냥 자기 여자 식구들한테 짐을 넘긴단다. 내가 아는 한 흑인 여자들이 이 세상의 노새란다.” (25쪽)

재니의 할머니가 백인 주인에게 착취당했다면, 더 이상 노예 신분이 아닌 주인공 재니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남편들을 경험한다. 첫번째 남편은 아내를 그저 집안의 일꾼으로만 본 채 무관심하게 대한다. “당신한테 정해진 자리가 어디 있어? 내가 당신을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당신 자리지.” 여자의 자리를 남자의 옆자리에 둔다.

두번째 남편은 자신의 사회적 권력을 이용해 아내를 더욱 통제하며 ‘예쁜 인형’으로 취급한다. “여자들과 아이들, 닭과 암소들에게는 대신 생각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해. 그럼, 분명히 그것들은 스스로 생각할 줄을 몰라.” 여자와 동물, 아이는 남자 인간의 지배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여기는 이 남자는 재니가 스스로 생각하거나 남들 앞에서 말하는 행동을 늘 통제한다.

세번째 남편은 재니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독자인 나는 그의 세번째 남편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역시 재니에게 폭력의 흔적을 남기며 자신의 소유물임을 표시한다. “그녀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은 그녀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그에게 심어주었다. 그것은 절대 무자비한 폭행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재니의 몸을 몇 군데 살짝 때렸을 뿐이었다.”

전반적으로 세번째 남편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읽히는 구석이 곳곳에 있다. 작가의 이러한 시각은 아무래도 시대적 한계가 아닌가 싶다. 이는 그 남자가 ‘그나마’ 재니와 대화가 되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남자가 대신 생각해 주는 말 없는 인형으로 여자를 취급했던 전 남편들에 비하면 세번째 남편 티 케이크는 재니의 말을 많이 들어줬다.

이제 재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살인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지만 법과 문화적 판결은 죽은 사람의 ‘색깔’과 성별, 죽인 사람의 ‘색깔’과 성별에 따라 달라진다. 남편이 아내를 죽였을 때, 아내가 남편을 죽였을 때, 흑인 남성이 백인을 죽였을 때, 흑인 여성이 흑인 남성을 죽였을 때, 모두 다른 판단이 따른다. 한국에서 법은 부부 사이에 일어난 살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평생 구타하던 남편이 평소처럼 때리다가 아내를 죽이면 상해치사이지만, 평생 맞던 아내가 남편을 죽이면 살인이다. 남편을 죽인 아내들은 단 한 번도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미친개에 물린 뒤 광기에 사로잡혀 ‘왜 나와 한 침대에서 자지 않냐’며 총을 겨눈 남편에게 대항해 재니는 방아쇠를 당겼다. 재니의 행위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며 재니를 지지한 사람들은 백인 여성들이었다. 살인죄를 주장하며 무섭게 재니를 비난한 사람들은 흑인 남성들이었다. 물론 배심원은 백인 여성도 흑인 남성도 아닌, 흑인을 위해 대신 생각하고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하는 백인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백인 남성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흑인 남자를 죽인 흑인 여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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