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버닝쑨대국밥집에서 버닝선대인까지, “싹 다 불태워라” /이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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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인 경제평론가가 진행하는 유튜브 프로그램 이름이 ‘버닝선대인’이었다. 김용민 PD가 운영하는 채널인 ‘김용민TV’에서 새로 만든 경제 프로그램이다. ‘선대인’의 이름과 연결하여 ‘버닝선대인’이라고 지었지만 비판을 받고 현재는 ‘주간 선대인’으로 이름을 바꿨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순대국밥집 사진(왼쪽)과 경제평론가 선대인 씨가 제작한 동영상 프로그램 갈무리(오른쪽)

해프닝으로 넘어가기엔 그리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 ‘버닝썬’이라는 이름은 ‘클럽 내 여성 성폭력’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강간, 매매, 폭력 등 나아가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끔찍한 성폭력이 경찰과 연예 산업 등 권력과 유착하여 벌어지는 현상을 전해주는 열쇳말이 되었다. ‘버닝썬’은 조직적인 성폭력을 은폐하는 하나의 거대한 물리적 장소이며 자본의 개입을 암시한다. 가볍게 넘길 구석이라곤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이 사안이 누군가에게는 낄낄거리는 언어유희의 소재일 뿐이다.

특히 김용민의 경우는 이와 같은 ‘실수’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이름 잘 지었다며 뿌듯하게 여겼을지 모른다. 김용민은 처음에 페이스북으로 이 프로그램을 “선대인 소장이 자기 한 몸 불태워 만든 경제뉴스”라고 소개했다. 박근혜를 비판하는 패러디라며 내놓은 그림 ‘더러운 잠’처럼, 원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패러디는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익히 잘 알려진 사건인 미 국무장관을 강간하자는 발언부터 나꼼수 비키니 사건까지 김용민은 모두 강한 비판을 받았다. 한두 번은 실수지만 매번 비판을 받았음에도 반복적으로 이런 ‘실수’가 일어난다면 과연 실수인가. 그는 이번 사건에 대해 “생각이 짧았다”며 사과했다. 사람이 생각이 짧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짧은 생각이 반복되면 이는 더 이상 ‘생각이 짧은’ 차원이 아니다. 이 짧은 생각들이 연결되고 모여서 그의 세계관을 이미 이룬 셈이다. 왜 생각하지 않는가. 이는 생각이 짧아서가 아니다. 생각하지 않음. 다시 말해 생각할 필요 없는 위치에 있음을 과시하는 일종의 권력 행위다. 이 사회는 그토록 생각이 짧아도 ‘시사평론가’라는 직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버닝. ‘불타는’, ‘타오르는’ 등의 의미인 이 버닝은 무언가를 불태워 없애버리는 어떤 열정이며 힘이다. 버닝은 소멸되는 대상과 태우는 힘 모두를 암시한다.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제목도 ‘버닝’이다. 이 영화 속에서 모호하게 사라지는 젊음은 여성이다. 젊음을 다루고, 시사를 다루는 등 모든 사회 현안에서 여성은 그야말로 ‘버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게 웃긴가.

▲영화 ‘버닝’ 포스터 [사진=영화 ‘버닝’ 페이스북]

‘버닝선대인’이라는 작명은 바로 강간이 ‘문화’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성폭력이 놀이이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안이 아니기에 이러한 이름으로 장난을 할 수 있다. 불태워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여성들을 산 채로 불태워 없애버리던 의식이 바로 ‘마녀사냥’이었다. 은유로서의 ‘불태움’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불태움’. 이 불태움은 오늘날까지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

3년 전 한 여성이 공용화장실에서 살해되었다. 이런 일은 늘 있지 않았나. 여성의 분노 앞에 이렇게 심드렁한 목소리가 치고 들어온다. 늘 있었던 일이라며 폭력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이 폭력에 익숙해진다. 그렇기에 여성에게 폭력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또한 폭력을 명명할 권리를 빼앗으려 한다. 강남역 근처의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 살인사건을 두고 현재에도 나무위키는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이라는 이름을 고수한다. 여성 대상의 폭력을 두고 이처럼 이름을 빼앗고 교란시키려 한다.

저질의 낄낄거림이 반복되고 이에 맞서는 일이 매우 피곤하다. 그럴수록 ‘압제자의 언어’를 전복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를 꼭꼭 씹어본다.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
단어들이 지도이다.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에서 리치는 남성중심적인 역사와 신화 속으로 파고들기 위해 언어의 해저 속으로 내려간다. ‘아이들 대신 분서를’에서는 “압제자의 언어를 가르치느니 차라리 불에 태워버리자”고 외친다. 불에 태워버리자! ‘이방인’에서 “나는 너의 죽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살아있는 정신이다”라고 말하며 여성이 생존자로서 만들어낼 세계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렇게 여성의 몸은 전쟁터가 아니라 정치적 힘이 되어 간다.

누군가에게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남긴 ‘강남역’과 ‘버닝썬’이라는 이름을 유희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이들과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결코 같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언어 사용자다. ‘압제자의 언어’를 분쇄시키려는 리치는 ‘공동언어에 대한 소망’을 품는다.

듣지 않는 이들과 과연 ‘공동언어’ 사용이 가능할까. 냉소가 밀려올 즈음 “나의 정치의식은 저항과 실패의 결과로 인하여 생겨나고 확장되면서 내 육체 안에 있다”는 리치의 ‘최루탄’이 날아온다. 이토록 여성의 언어를 들고 싸우려는 다른 여성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정신을 유지할까 싶다.

리치의 말대로 “글을 쓰는 모든 여성은 생존자”이다. “나는 살아남아 무한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부재하는 명사, 동사이다.” 압제자의 언어는 바로 여성의 생존을 방해한다. 오직 ‘이제는 말할 수 없는’ 죽은 여성의 이름을 활용한다. 그렇기에 ‘장자연 사건’에 여성단체는 뭘 했느냐 빈정거리는 목소리와 버닝썬으로 말장난을 즐기는 목소리는 넓은 교집합을 형성한다. 여성단체는 뭘 했냐고? ‘생존자의 언어’는 이러한 말장난을 용납하지 않는다. 여전히 여성들은 열심히 ‘방사장’을 호명한다. 호명에 응답하지 않는 권력에게 ‘뭘 했느냐’ 물어야 한다.

버닝쑨대국밥집에서 버닝선대인까지, 이 압제자의 언어를 “싹 다 불태워라” (BTS의 ‘불타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