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운동가들] 전장연을 싫어하던 그의 1년차 장애운동

#대기업, 창업 건너 대구장차연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대구는 배울 사람이 많다. 잘 다져진 땅 위에 빌딩 짓고 싶어”
#끊임없이 공부하는 수밖에…“과제는 계속해서 생길 것”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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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때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사회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운동가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줄어듭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애를 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인과 싸우기 위해 운동가들을 몽땅 폄훼하기도 합니다. 운동권이라는 어원은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운동가를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용어였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기득권으로 살아가지 않았고, 또 일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오늘날까지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운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들도 있습니다. 2024년, <뉴스민>은 매달 1980년대 사회운동을 시작한 운동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운동가들의 삶과 더 나은 공동체를 바라는 운동가의 고민을 듣기로 했습니다.

지난해 6월,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공식 출범했다. 보도자료에는 ‘18년의 기다림’이란 수식이 붙었다. 장애인 단체들의 연대체 격이던 대구장차연은 비영리 임의단체 등록에 맞춰 상임활동가를 뽑았다. 그렇게 박동균은 활동보조 제도화, 희망원 투쟁,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지역 인권운동 연대까지 치열한 투쟁과 굵직한 성과를 만들어 온 단체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박동균(30)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를 소개한 이는 그를 ‘리그오브레전드(롤) 마스터’라고 했다. 온라인 게임 ‘롤’을 수준급으로 잘한다고. 그에게 시각장애가 있다는 정보와는 매치되지 않아 갸웃하게 했다. 한편으론 18년의 기다림이란 수식과 대비되는 1년이란 활동 경력이 어떤 이야길 해줄 수 있을까 우려도 됐다. 우려와 궁금증, 복잡한 심경을 안고 박동균이 일하는 대구장차연을 찾았다.

▲17일 오전 420장애인차별철폐대구투쟁연대가 연 ‘420장애인차별철폐의날 대구대회, 장애인도 시민으로 함께 사는 대구로’ 집회에서 사회를 보는 박동균. (사진=박동균)

#대기업, 창업 건너 대구장차연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박동균은 어릴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적당히가 아니라 아주 열심히 했다. 시각장애가 있는데도 게임을 많이 하니까 부모님은 낮은 등급의 컴퓨터를 사줬다. 동균은 직접 부품을 알아보고 조립을 하면서 게임을 계속했다. “어쩌면 오기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고 동균은 기억한다.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는데 사회복지사가 될 순 없었다. 운전이 필수인 직종인데, 시각장애 때문에 운전면허를 딸 수 없었다. 구직활동을 하다가 서울 소재 대기업에 취업했다. 프린트기, 복합기 같은 기계 AS와 관련된 일이었다. 일을 배우다 보니 신경 쓰이는 클레임들이 생겼다. 노인이나 지적장애인 등 신체적‧언어적 한계 때문에 매뉴얼만 보고 기계를 사용하기 어려운 이들로부터 오는 전화였다. 그들은 ‘와서 설치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규정상 AS를 나가게 되면 출장비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용자가 이용방법을 따라 하지 못해서 출장을 가게 된 경우는 소비자 과실로 분류된다.

유선이나마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다 보니, 동균은 남들보다 상담에 걸리는 시간이 길었다. 쳐내야 하는 물량을 채우지 못하니 실적 압박이 들어왔다. 부장에게 “출장 규정을 바꾸거나, 매뉴얼을 쉽게 바꿔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어렵다는 답만 돌아왔다. 요령껏 여유가 있다는 판단이 들면 최대한 설명을 했다.

“정의롭거나 특출나게 잘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게 어떤 건지 파악해서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드물게 입사 6개월 차부터 ‘고맙다’는 피드백을 받았어요. 우수사례로 뽑혔지만 동시에 부서에선 실적 압박이 들어왔어요. 그런 양가적인 조직 논리와 바뀌지 않는 시스템이 답답해서 8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박동균은 시간과 품을 들여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이 시기에 확고해졌다. 운전면허시험장 인턴, 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의 장애인 동료상담가로 일하다가 2022년 직접 비영리단체 ‘장애공감 네트워크 쌤쌤’을 만들었다. 대구를 기반으로 장애인식 개선과 관련된 캠페인 활동을 했다.

모닝커피, 식후커피 등 많은 이가 일상에서 즐기는 커피를 누리지 못하는 장애인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커피 한 잔 공감 한 잔’이라는 캠페인을 기획한 게 대표적이다. ‘NOT SAME BUT SAME’이라고 새긴 유리잔을 나눠줬다. 우리는 모두 다르면서도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뿌듯하고 재미도 있었지만 돈이 되진 않았다. 마침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상근활동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시민단체나 운동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고, 접점도 없었어요. 공고를 보고 전화해서 ‘지원해도 되냐’ 물었더니 ‘하면 되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면접을 보고 채용이 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대기업에서 자본주의 관점으로 일과 사람을 보다가 점점 일이 갖는 가치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한 번 살다가는데,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싶었어요. 왼쪽 눈은 보시다시피 의안이라 아예 안 보이고요. 오른쪽 눈은 진행성이라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요. 지금은 시력이 0.1 정도 수준이에요.”

동균은 얼마 전 병원에서 오른쪽 눈의 선천성 백내장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선 최악의 경우에 실명까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눈 속에 가짜 렌즈를 만들어 넣은 상황이라 안경을 쓸 수도 없다. 휴대폰 화면에 글자를 최대로 키워 놓거나, 업무용 컴퓨터의 모니터를 사무실에서 가장 큰 걸 쓰는 방식으로 그때그때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 있다.

#“대구는 배울 사람이 많다. 잘 다져진 땅 위에 빌딩 짓고 싶어”

▲인터뷰는 15일 오후 대구장차연 사무실이자 대구사람센터 사무실 한 켠에서 진행됐다.

사실 박동균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을 싫어했다. 2021년 전장연이 지하철 이동권 투쟁을 시작할 때 ‘21세기에 왜 저렇게 민폐를 끼칠까. 지하철만이 유일한 이동수단이 아닌데, 시민들이 공감하지 않는 방식은 오히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안 좋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장애인인 동균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럼 동균은 ‘반대한다. 대부분 장애인도 반대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연히 한 댓글을 봤어요. ‘지하철 투쟁 전에도 여러 경과가 있었지만 나아진 게 없다. ‘저렇게까지’ 해야만 뉴스에 나오고 시민에게 알릴 수 있는 거다. 너도 솔직히 말하면 관심 없었지 않냐. 비장애인은 오죽하겠냐’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좀 궁금해졌던 것 같아요. 그동안 장애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투쟁해 왔을까. 면접에선 ‘집회 시위를 하다가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괜찮냐’고 물어보시길래 ‘해야 하면 해야죠’ 그랬어요.”

박동균은 지난해 3월 입사한 뒤 2주 정도 빠른 속도로 일을 배웠다.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도 여러 번 받았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활동가는 일을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다만 장애운동 영역 속에서도 대구장차연은 정책이나 제도를 다루기 때문에 공부가 많이 필요했다.

“공부랑은 담을 쌓았는데 지난해부턴 책을 열심히 읽었어요. 변재원 작가의 책 ‘장애시민 불복종’을 최근엔 읽고 있어요. 집회 사회를 볼 일이 많아서 공부의 필요성을 더 느껴요. 입사한 지 2개월 만에 집회 사회를 보라고 시키시더니, 그다음부턴 크고 작은 행사 집회를 제가 다 보게 됐어요. 사회를 보려면 내용을 잘 알아야 하잖아요. 공부를 안 하고선 잘 할 도리가 없어요.”

박동균은 기자회견이나 집회의 사전·사후 보도자료를 쓴다. 연대단체의 발언 요청에 나가거나 프로그램 기획, 회계 보고, 자료 관리, 홈페이지·SNS 관리 같은 업무도 한다. 업무량이 적지 않지만 대구에는 ‘배울 사람이 많다’는 장점이 있다.

“대구의 특징이라면, 제 위치에선 배울 사람이 많다는 점이 있죠. 예를 들면 정책은 전근배(대구사람센터 활동가), 정무적인 협상은 조민제(장애인지역공동체 사무처장), 상황 판단은 노금호(대구사람센터 대표), 조직은 박명애(장애인지역공동체 대표)가 있어요. 의지가 있는 사람 입장에선 이 사람한테는 이걸, 저 사람한테는 저걸 배우기 좋아요. 물론 대구가 ‘빨간당’이 집권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긴 하죠. 활동이 순탄치는 않지만 장애 단체 활동의 기반은 잘 만들어져 있어요.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장애 파트는 서울 다음이 대구라고들 하더라고요.”

#끊임없이 공부하는 수밖에…“과제는 계속해서 생길 것”

박동균은 그 기반 위에서 빌딩을 잘 짓고 싶다. 지금의 고민은 전문성이다.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선 활동가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어떻게 분석해서 방법을 제시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이동권을 요구하려면 지금의 제도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하잖아요. 대구에 저상버스가 몇 대인데, 실운전되고 있는 건 그중 몇 퍼센트인지 수치를 제시해야죠.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우린 특별교통수단을 기다리는 데 30분이 소요된다. 비장애인은 그 30분을 기다리지 않는다. 하루 30분에 1년 365를 곱하면 엄청난 시간이다. 우리도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게끔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설득해야 돼요. 그러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해요. 다만 확신을 갖지 않도록 경계도 해야 하죠. 결국 끊임없이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요.”

어려움은 시시각각 느낀다. 단체의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장애운동의 방법적인 면에서 더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같은 고민은 항상 박동균의 머릿속을 떠다닌다.

“대구장차연을 구성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10년 이상 활동했거든요. 그들이 겪은 상황과 사람을 잘 모르니 초기엔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어려웠어요. 어떻게 보면 세대 차이고, 극복할 수 없는 부분 같아서 더 어렵기도 했죠. 그래서 한 번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어렵다고 말씀드렸어요. 용어에 대한 고민이 있으니 풀어서 설명해달라고 하니, 그 뒤부턴 업무 지시나 회의 과정에서 한 번 더 설명해 주세요.”

아무래도 박동균의 지금 가장 큰 어려움은 신체적인 부분이다. 일을 하면 몰아붙이는 성격이다 보니 건강을 돌아보지 못한 건 아닌가 최근들어 걱정 되기 시작했다. 전맹 시각장애인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활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든다. 동균의 고민을 들은 노금호 대표는 “장애운동을 하는 녀석이 장애가 심해진다고 활동을 고민한다”며 혼을 냈다.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없으면 만들면 된다고도 덧붙였다.

“장애를 받아들이는 걸 ‘장애에 적응한다’고 하잖아요. 그게 아직 어려워요. 한편으론 이젠 집회에 나가면 더 장애를 드러내고 직설적인 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17인치 무거운 노트북을 안 들고 다녀도 되니까 등이 좀 편하겠다거나, 나들이콜을 탈 수 있으니 교통비를 덜겠다거나.”

이런 생각이 들자 박동균은 ‘내가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구나’ 다시 한번 느꼈다. 생각의 전환 과정은 동균의 부모님도 거쳤다.

“처음엔 빨갱이도 아니고 왜 저기 가서 팔뚝질을 하고 그러냐. 하는 건 좋은데 앞에 나가서 하진 말아라 하셨거든요. 걱정이 많으셨죠. 그러다 제가 뉴스에 나와 인터뷰 하는 모습을 보셨어요. 그게 생각을 전환하신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장애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선 뭐든 하기 어렵고 힘들어할 거란 생각을 갖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안 돼, 못 해’란 말을 많이 하셨는데 ‘TV 나오는 것 봤다. 말 잘하네’라고 하시더라고요.”

활동가 박동균의 동력은 어디서 나올까. 단체도, 사람도, 활동도 좋다고 말하며 동균은 덧붙였다.

“항상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봤던 것 같아요. 대기업에서 전화로 도움을 줬던 사람, 운전면허연습장 안내데스크에 앉아서 적어야 할 항목을 알려주던 사람 등 내게 도움을 청한 사람들을 생각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박경석 전장연 대표님께 배운 말인데 단 한 명이라도 목소리를 내면 그게 10명이 되고, 그게 1,000명에게 닿는다고 해요. 탄압이 심하고 변화가 더딘 것 같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다 보면 다음이 있겠죠. 과제는 계속해서 생길 것 같아요. 없으면 만들어야 하고요.”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