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일하지 않을 권리’로부터 소외된 이들 /박하경

11:51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인권’과 ‘생존권’이 충돌할 때 무엇이 더 우선시되어야 할까?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장애인거주시설 인권침해 현황’에 따르면 시설 내 장애인을 강제 구금해 침대에 묶어놓는 등 반인권적 조치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장애인거주시설 보호사들은 이러한 장치가 장애인 생존권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말한다. 꼭 먹어야 하는 약물을 거부하는 경우, 씻기를 거부하는 경우 등에는 장애인들의 신체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이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신체의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은 당장 눈앞의 현실을 외면한 공허한 울림이다.

“내가 일하겠다는데 정부가 무슨 권리로 막냐”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이후 일부 노동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정부를 향한 볼멘소리는 이 같은 인권과 생존권 간 충돌의 연장선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OECD 국가 중에서 두 번째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한국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도입됐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되레 많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 급여체계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기본급보다 초과수당 및 특근수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근무시간이 줄면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임금 또한 줄어든다. 상황이 이런 탓에 산업단지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모자라는 임금을 ‘투잡’ 또는 ‘쓰리잡’으로 채워야 한다. 실제로 지난달 ‘투잡’의 대명사로 불리는 대리기사 숫자는 11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3만 명가량 늘었다.

결국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인해 노동자 간에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급여 체계가 안정되고 노조 조직력과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대기업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에 더해 ‘일하지 않을 권리’, 즉 저녁이 있는 인간적인 삶도 챙겨가지만 급여 체계가 불안정하고 노조 조직률이 10%가 채 되지 않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일하지 않을 권리’ 이전에 ‘일할 권리’마저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일하지 않을 권리’가 보다 인간적인 삶을 누리기 위한 조건이라면, ‘일할 권리’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내가 일하겠다는데 정부가 무슨 권리로 막냐”는 것은 ‘행복추구권’과 같이 인간으로써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권리추구가 아니라 그 이전에 나와 내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아우성이다. 때문에 이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당장의 생존과 맞닿아 있는 공포의 발로다.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인권’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인권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권리의 향유를 막는 눈앞의 정치적·경제적 장벽을 제거해야만 다수가 이에 공감할 수 있다.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권리 확보 이전에 미시적이고 가시적인 일상을 보다 세밀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결국 주 52시간 근무제는 노동에 ‘매달려야만’ 생존이 가능한 사회 시스템을 정책적으로 해체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과 직접 돈을 주는 복지정책은 근로 의욕을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동시에 기업계의 입김에 휘말려 최저임금 인상과 동시에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확대된다. 이러한 경제적 안전망 부재 속에선 정부가 아무리 노동 친화적 법안을 추진한다 한들 지금처럼 소수만 만족하는 반쪽짜리 정책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OECD 지표로 보나, 과도한 업무로 과로사하는 여러 개별 사례들로 보나 우리나라 평균 노동시간을 줄여야 함은 자명하다. ‘일하지 않을 권리’가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시점이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전히 소외되는 이들을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인간의 존엄과 맞닿아 있는 ‘일하지 않을 권리’가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가 되지 않도록, ‘일할 권리’가 일자리를 찾고 지키려는 투쟁으로 점철되어 ‘일하지 않을 권리’와 충돌하지 않도록 세심한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노동 친화적 정책’이 노동자 모두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