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돋보기] 인격권을 외면한 보도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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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정치인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언론은 속보경쟁을 하듯 사망 원인과 장소, 방법 등에 대해 수도 없이 많은 기사를 쏟아 냈다. 고인에게 혹은 가족들에게 죽음만큼 더 아프고 슬픈 일이 더 어디 있을까? 하지만 끊임없이 올라오는 기사는 그 심정을 더 괴롭혔다. 비단 이 정치인 문제는 아니다. 2008년 유명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에 있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방법을 시간대별로 그래프까지 그려 보도해댔다. 남은 가족과 지인의 고통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은 보도 경쟁이 연일 지속됐다. 확인되지 않은 사망 원인과 악의적인 루머까지 언론을 타고 전해졌다. 결국 고통받던 지인과 가족들의 죽음으로 이어진 사건도 있었다.

이미 14년 전 마련한 ‘자살보도권고기준’이 있다. ▲사망원인을 자살로 추정하거나 단정 짓는 것 ▲기본적인 것 외에 자살자의 개인정보를 언급하는 것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는 것 ▲자살 관련 사진이나 동영상을 게재하는 것 ▲제목에 자살을 언급하는 것 등에 대하여 유의하여 기사를 작성하도록 하는 기준안이다. 이 기준안은 아직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언론 보도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수도 없이 생산되고 있다.

“(속보)경찰, ”##당, 000의원 투신 자살“
“##당, 000원내 대표 투신 현장”
“000의원 투신자살에 ##당 멘붕”
“##당, 000원내 대표 서울 □□아파트에서 투신자살”

심지어는 심폐소생술을 실시한 시간, 사체를 덮은 천의 색깔, 투신한 장소의 구체적 명칭과 해당 정치인의 가족 중 누가 거주하고 있으며, 가족의 현재 상황뿐만 아니라 현장 사진까지 선명하게 촬영해 보도했다.

▲23일 TV조선은 고인의 시신 이동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사진=TV조선 보도 갈무리]

얼마 전 태국 동굴에서 12명의 소년과 코치가 9일간 실종 상태에 있었다가 발견된다. 그리고 다국적 구조대가 투입되어 결국 전원 구조되는 기쁜 소식이 온 세계에 전해졌다. 세월호를 겪은 우리기에 아마 다른 이들보다 더욱 간절히 이들의 생환을 기도했을 것이며, 기도한 만큼 그들의 생환 장면이나 생존 환경에 대한 궁금증도 컸을 테다.

하지만 태국 언론은 야속하리만큼 구출장면을 한 장도 내보내지 않았다. 철저하게 보도를 통제하였으며, 생환 이후에도 이 기적 같은 이야기 주인공들의 인터뷰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일부 외신이 이 와중에도 인터뷰를 감행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특종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여론의 질타를 먼저 맞아야 했다.

2017년 판문점에서 총격을 받으면서 탈출한 북한 병사가 있다. 곧바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모든 국민의 관심은 북한 병사가 생존할 것인지, 총상 정도가 어떤지에 대해 몰렸다. 그러던 중 생뚱맞게 북한 병사의 몸 안에 있는 기생충에 대한 담당의사의 브리핑이 전해졌다. 병사의 총격과 생존과는 전혀 무관한 기생충의 종류와 상태가 언론을 통해 전국민에게 전달되었다. 덕분에 21세기에 드물게 기생충에 대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인간은 존재 자체에 있어서 존엄하다. 아니 존엄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인이 되는 순간에도 언론은 망자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과도한 보도 경쟁으로 인한 자극적인 기사는 국민의 알권리 충족이라는 면에서도 구차한 컨텐츠다. 망자도 이러할진대, 살아 있는 자, 앞으로 삶을 영위해 가야 하는 이들에 대한 인격권은 더더욱 지켜줘야 하는 가치이다.

모든 권리는 홀로 서 있을 수 없다. 때로는 공존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북한 병사 1명의 인격권(내가 본의 아니게 사고를 당해 누워 있는 경우 내 몸에 있는 기생충의 종류와 특성이 전국민에게 브리핑 된다는 것을 상상을 해보시라)과 5천만 국민의 알권리가 충돌한 경우라도 1개의 인격권과 5천만 개의 알권리 중에 우리는 어느 권리를 우선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끈을 놓아버린 이들에게 마지막까지 지켜줘야 하는 권리가 있다면 바로 그들의 존엄을 보장하는 인격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