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청진 출신 금순 씨는 과거를 되찾고 싶다

[추석 앞둔 북한이탈주민] (3) 대구시 이금순(가명)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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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6 09:26 | 최종 업데이트 2018-09-26 09:26

[주=북한이탈주민들은 추석에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한다. 북한은 1988년 추석 당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다. 추석이면 묘지에 성묘 행렬이 늘어지는 풍경도 보였지만,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는 점차 행렬의 규모도 축소됐다. 배급 체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이웃과 음식을 나누거나 놀이를 하는 문화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추석을 ‘민족의 대명절’로 여기는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조상 섬김을 중요하게 여기는 북한 인민에게 추석은 여전히 중요한 날이다. 최근 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며 북한과의 교류 확대에도 기대감이 모이는 상황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심정은 어떨까. <뉴스민>은 대구·경산시에 사는 북한이탈주민 세 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20일 저녁, 텔레비전으로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보고 있는 이금순(40대, 가명) 씨에게 남편이 불쑥 말했다.

“이제 고향 가볼 날이 머지않았다”

남편이 괜히 금순 씨의 기분을 띄워 주려는 것 같았다.

“그걸 어찌 아나?”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살던 금순 씨는 성묫길이 집에서 멀지 않았다. 버스 타고 내려 걸어서 두시간 정도 거리였다. 부모님과 함께 묘지에 도착하면 도로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이를 등에 업은 아저씨, 광주리에 음식을 담아 머리에 인 아주머니도 보였다. 북한에서는 아무리 굶을 때라도 추석이면 쌀을 사서 산에 올랐다.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 관계가 개선되고 있지만, 금순 씨는 당장 통일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먼저 양국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부터 시작하길 바란다. 이북에는 금순 씨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어머니는 금순 씨의 탈북으로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기 때문이다.

금순 씨는 고향에 갈 수 있다면 성묘를 하고, 아버지와 오빠의 일기장부터 찾아볼 생각이다. 문학석사 학위를 얻은 금순 씨는 일기장에 담긴 시를 연구하고 싶었다. 이들이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고, 한국에서 접한 북한학 사료도 많이 부족해 보였다.

▲북한이탈주민 이금순(가명) 씨

고향 청진은 희망과 자신감 가득했던 곳
지식인 집안도 고난의 행군 거치며 가난 면치 못해
돈벌기 위해 중국 연변으로…해결되지 않는 ‘불법체류’

70년대 청진시는 웬만한 남한 땅보다 발전된 곳이었다. 70년도 중반 청진에서 태어난 금순 씨는 어린 시절 북한을 ‘최고 전성기’로 기억하고 있다. 청진항은 물자 수송이 활발했다. 김책제철소는 철강을 쏟아냈다. 블럭불가담(비동맹) 운동에 참여한 북한이 공산품을 수출할 길도 열려있었다. 아파트가 올라갔다. 아버지는 공학자였고, 어머니는 의사였다. 지식인도 무산계급이지만, 사회적인 존경을 받았다.

금순 씨는 어려서부터 도서관에서 독서를 즐겼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러시아 문학과 영미문학도 접했다. 작가나 기자가 되어볼까 하는 꿈도 꿨다.

11살 되던 해, 군대 간 오빠의 일기장을 봤다. 오빠가 쓴 시가 있었다. 어머니가 당직을 서면서 아버지에게 쓴 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애 이야기도 봤다. 어머니는 환자들에게 항상 깍듯한 예의를 갖췄다. 어머니는 금순 씨에게 ‘사람은 다 똑같은 거다’라며 예의를 가르쳤다. 금순 씨는 긍정적이고 자신감에 충만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금순 씨는 제철소 운전공으로 배치됐다. 여덟 시간 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다른 노동자와 문화 차이가 힘들게 다가왔다. 기계 운전공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일이 늘지 않아 실수가 잦았고, 상호비판에서 지적받았다. 타자기가 없어 각종 문서를 작성할 때 수기해야 했던 시절, 글씨를 잘 쓰는 것을 간부가 알아챘고, 현장 일보다는 수기 작성을 하며 한숨 돌릴 때도 있었다.

90년대 중반을 지나며 북한 경제가 나빠지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의사라고 배급을 더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보살펴 준 환자들은 물고기나 옥수수를 전해줬다. 답례품은 식량으로도 썼지만, 조금 남겨 장마당에도 팔곤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은퇴하고부터는 답례품도 끊겼다.

배급이 끊겼다. 북한 전역이 기근으로 고통받기 시작했다. 어느 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금순 씨는 일이 끝났는데도 앉아 있는 직장 동료를 툭 쳤다. 굶으며 일했던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비참한 시기였다.

언니와 오빠는 출가했기 때문에, 금순 씨가 식량을 구해야 했다. 2001년, 금순 씨는 또래와 함께 두만강을 넘어 연변으로 향했다. 중국에서 일하면 돈을 준다고 들었다. 연변에 도착한 금순 씨는 친구들과 시골집에 들어갔다. 숨어든 시골집에서 신랑을 만났다. 북한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했는데 신랑이 ‘나랑 같이 살자’고 설득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금순 씨는 중국에 정착했다.

어머니가 걱정됐지만, 신랑이 걱정을 덜어줬다. 중국인인 남편은 여권을 발급받아 청진에 갔고 거기서 금순 씨의 어머니를 만나 소식을 전했다. 금순 씨는 북한에서 굶어 죽은 것으로 처리된 것도 들었다. 워낙 무연고로 매장되는 시신이 많았기 때문에 시신 확인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중국에서 억척스럽게 일했다. 농사를 짓다 도시로 나왔고, 제조업 회사, 식당에서 일했다. 돈을 버니 신바람이 났다. 북한에서는 월급이 없었다. 쌀 1kg에 2원(元)50전(角)하던 시기, 일당으로 50전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도시마다 쌀이나 생필품 가격 차이가 있었다. 금순 씨는 사업을 발전시켜 상인이 됐다. 단골이 생길 정도로 사업이 흥했다. 유통 과정에서 부패해 상품 가치를 잃는 경우도 생겼다. 현지 생산도 시도했고, 금순 씨는 결국 중국인 수십 명을 고용한 공장 사장이 됐다.

형편은 나아졌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신분 문제였다. 탈북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웠다. 공안에 잡혀가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될 수 있었다. 먹고 살기가 어려울 때는 몰랐지만,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고 보니 마음 상태에 눈길이 갔다. 외롭고, 불안했다. 그때 금순 씨는 한국행을 고민했다.

중국에서 신뢰를 쌓은 사람에게 한국에 갈 방법을 들었다. 북송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에 가기로 했다. 남편에게 말했다. “혹시 연락이 안 되면 북송된 줄 알아라. 북송되는 순간 자결하겠다.” 금순 씨는 고비사막을 넘어 주몽골한국대사관에 도착했다. 난민으로 받아들여졌고, 2007년 한국에 입국했다.

북한이탈주민 차별도 이겨내
남북한 교류 확대로 고향 찾기를 꿈꾸다

척박한 곳에서 절박하게 살았기 때문에, 한국 정착도 두렵지 않았다. 이방인으로서 차별과 부당함이 있더라도 이겨낼 자신감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서른다섯에 대학에도 들어갔다. 중국에서는 불법체류 신분이라 기회가 없었다. 생활비는 중국어 과외로 충당했다. 첫 과외비는 12만 원. 하얀 봉투에 담아 텔레비전 위에 올렸다. 그 돈은 쓰지 않고 바라보며 행복을 느꼈다.

한국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신문을 섭렵했다. 한국 7080세대가 자주 부르는 가요를 공부하고, 성경책을 읽고, 고전영화를 찾아봤다. 한국은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사회였다. 석사 학위를 따고, 인문학 강사가 됐다. 신분도, 경제적 상황도 안정됐다.

이제 금순 씨의 소망은 과거를 되찾는 일이다. 북한학 공부를 하며 사료의 부족함도 느꼈다. 고향에 남아 있는 오빠와 부모님의 일기장이 생각났다. 남북관계가 좀 더 안정되면, 안전하게 일기장을 구할 방법을 찾고 있다. 일기장은 당대 북한 사회를 잘 알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될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고향 생각에 잠긴 금순 씨. 과거를 찾는 것은 곧 잃어버린 ‘나’를 찾는 길. 이제 금순 씨는 그 길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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