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돋보기] ‘이성교제 금지, ~다·까 실천’ 초등학교 안내문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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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겨자 먹기. 아이를 키우면서 열두 번도 더 내뱉어 보는 말이다. 산부인과에서 제공하는 추가 의료 서비스부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도 울며 겨자 먹기였다. 어린이집연합회나 유치원연합회가 아이를 볼모로 잡고 정부를 상대로 세 싸움을 하면 휴가를 내거나, 원장 뜻대로 동의서에 서명해야 했다.

아이가 학교에 진입하고, 아이를 볼모로 하는 틈에서 해방된 줄 알았다. 하지만 3월 개학날 받아 오는 안내장을 보면 무늬만 공교육이 아닌가 싶다. 준비해야할 학습준비물이 무려 28종. 규격도 엄격하다. 준비물 중 바구니의 용도는 사물함 내부 정리용이다. 규격은 가로 15cm, 세로 20cm, 높이 15cm 내외이다. 필통은 천으로 된 것만 된다고 했다. 플라스틱이나 철필통은 학습에 방해가 되어 허락하지 않겠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새학년 첫날 받아온 안내문.

교과서 정리용으로 플라스틱 책꽂이도 준비하란다. 한 번 교실에 두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물품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학기가 시작되면 학부모가 부담하고 준비해야 한다. 체크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워나가면 10만 원이 훌쩍 나간다. 아이가 둘이면 곱절이다.

물품 준비도 준비지만, 학생생활지도 협조와 관련된 안내장의 문구도 이해하기 곤란한 영역이 많다. 샤프는 자제하라, 핸드폰 휴대를 원칙상 금지하며, 휴대해야 하는 경우 부모와 교사의 허락을 받고, 등교 후 교사에게 제출을 해야 한다는 규제도 있다.

답답함을 단체 대화방에 올리니, 다른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친구들의 더 답답한 내용들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성교제를 금지한다, 화장을 금지한다, 귀를 뚫지 마라, 휴대폰은 무조건 압수다 등의 안내까지 다양하기 그지없다.

다양한 학교의 안내문을 읽고 있자면 이게 교육의 3주체의 일원으로 학생이 생활할 수 있는 학교가 맞는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녹색어머니회와 도서 도우미 등의 학부모 참여 중에 하나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아이에게 이야기했다고 하며 아이는 동의서를 건넨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의 새학년 준비물.

깨알같은 글씨로 수도 없는 안내와 지시사항이 가득한 안내문을 받아들고 잠시 분노하지만, 다시 울며 겨자 먹기로 이리저리 준비하고, 대충 눈을 감았다. 한편으로 딱풀 뚜껑과 몸통에 이름 스티커를 붙이라 안내하고, 바구니 규격까지 정하는 일이 교사에게도 쉽지 않은 노동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삶을 이렇게 깨알 같이 규제하는데 신경 쓰느라 얼마나 노고가 크실까 걱정 아닌 걱정도 생긴다.

왜 이 모든 것을 유엔아동권리협약에 가입한 대한민국이 의무교육 대상인 공립초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깊어지다가도 울며 겨자 먹기라는 속담을 되뇌며 보따리를 꾸리고 있다.

부디, 공교육답게 국가가 딱풀이나 가위, 지우개, 볼펜정도는 예산으로 지원해주고, 아이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교육 인식이 마련될 날이, 학부모들이 나서서 아이 교통지도를 해야만 안전한 환경이 아닌 날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순간부터 집으로 오는 순간까지 온전히 지켜줄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오기를 바라면서 울며 겨자 먹지 않는 교육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