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과 함께] ④ 밥을 멈추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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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다. 학교 비정규직 급식 노동자들이 위생복을 벗고 거리로 나온다. 힘들게 싸워 올린 교통비, 식대 등 복리후생비가 최저임금에 포함되는 바람에 월급은 오히려 낮아졌다.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기본급을 올려 세계에서 압도적인 임금격차를 다소 줄여달라고 한다. 정부가 먼저 약속한 공정 임금과 정규직 전환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대구의 한 고등학교 급식조리실에서 조리원들이 학생들에게 줄 음식을 만들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40℃가 넘는 조리실에서 250℃ 튀김 솥에 돈가스를 튀긴다. 하루 몇 번은 갈아입는 위생복은 아침부터 땀범벅이 되어 소금꽃이 핀다. 피로와 두통은 커피믹스와 게보린으로 막아낸다1.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뜨거운 솥에 화상을 입는다. 손목, 어깨, 허리 성한 곳이 없다. 뿌연 조리실에서 탈진해 기절하고, 끓는 물이 쏟아져 입은 하반신 화상으로 숨지기도 한다. 1인당 140명의 밥을 책임지고 있어 웬만한 부상은 참고 넘어가거나 일 끝나고 치료받는다. 일은 힘든데 사람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살던 엄마들이 2019년, 다시 밥을 멈추는 까닭이다.

1964년, 생존의 밥
태일 엄마는 식구들의 밥을 더 이상 차릴 수가 없었다. 1964년 2월 설날, 아침밥도 못 먹고 집을 나섰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내수공업 재봉일은 불안정한 제조업이었다. 여러 번 망한 남편은 술독에 빠진 지 오래였다. 기성회비를 못 내 개학이 지나도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재봉일이 끊겨 월세가 밀리자 남산동에서 내당동으로 이사했다. 흙벽돌 단칸방이었다. 아이들 교과서는 배움의 꿈과 함께 아궁이에 들어가 재로 변했다.

남편의 술주정과 자포자기는 깊어갔다. ‘세간살이’를 하나둘 술로 바꿔 마셨다. 불기 없는 냉방에는 결국 이불만 남았다. 이소선은 서문시장 노점에서 옷을 받아 돌아다니며 팔아주는 행상으로 하루 7~80원2을 벌었지만 여섯 식구가 밥을 먹기엔 부족했다. 다 같이 굶어죽겠다 싶었다. 아이들한테 돈을 벌어 부치겠다고 말했다. 서울행 기찻간 화장실에서 주워 핀 담배꽁초는 이소선의 속을 뻥 뚫어주었다.

보름 후, 태일은 엄마를 찾아 울며 보채는 다섯 살 막내 순덕이를 업고 서울로 간다. 남대문 근처 거리는 영하의 추위가 점령하고 있었다. 작은아버지네에서 대보름 잡곡밥을 먹고 나올 때 손목시계를 훔쳐 판 600원으로 기차를 탔다. 남대문에서 꽃 파는 아주머니들이 팥죽 먹으라고 60원을 모아주셨다. 밥때는 아무리 거르고 때워도 맹렬한 속도로 돌아왔다. 잠자리는 땅콩 굽는 화덕가 길거리였다. 순덕이가 아팠다. 밥값이랑 순덕이 약값으로 남은 돈은 바닥에 흘린 휘발유처럼 사라졌다. 학생복 상의를 겨우 30원에 팔아 평화시장 근처 대학천시장으로 간다. 곧 미아보호소에 맡길 순덕이의 배를 채워주려는 것이다. 백반을 시킨다. 30원짜리 1인분 한 상이다. 당시 서울 짜장면 한 그릇에 40원이었으니 아주 푸짐하지는 않았겠다. 그마저도 1인분이라 태일은 한 숟갈 정도 먹는 시늉만 했겠다. 추운 늦겨울 거리에서 메리야스만 걸친 태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호송차에 순덕이를 태워보내고 헛헛한 걸음으로 거리를 걷는다. 그제야 태일이도 춥고 배고프다. 대도백화점 담배 가게로 불쑥 들어가 사정한다. 딱한 처지를 듣고서 아주머니는 200원의 거금을 준다. 몇 번씩 인사를 하고 나와 우선 헌 학생복 상의를 70원에 사 입는다. 100원짜리 구두통을 산다. 그러고도 남은 돈으로 우동 한 그릇을 사 먹는다. 간만에 노숙을 면했다. 무허가 하숙집에서 잠을 잤다. 이후 혼자 다닐 수 있는 상황에서 태일은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서울역에서 동대문시장까지 리어카를 밀어주면 30원을 받는 뒤밀이를 할 때 주린 배를 채우느라 먹던 밥은 15원짜리 비빔밥. 얼마 안 되는 보리밥에 벌겋고도 시커먼 고추장 한 술, 약간의 캬베츠(양배추)를 비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던 그 당시 숙소는 주로 서울역 뒤 야채시장 시멘트바닥 지푸라기 침대였다.

당시 밥은 ‘생존의 밥’이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표 자체였다. 이소선은 식구들의 밥을 벌기 위해, 밥을 멈췄던 거다. 서울 가서 남의 밥을 챙겨 돈을 벌어 식구들의 밥을 이어가려 했지만, 한식집 ‘도원’ 주방에서 일하다 쓰러졌다. 하혈이 심했다. 번 돈보다 치료비가 더 들었다. 태일은 신문을 팔아 밥을 사려 했지만, 동생을 업고는 불가능했다. 동생을 미아로 만들고서야 밥을 벌 수 있었다.

▲일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가 찍은 1965년 청계천 모습. [사진=서울시]

남은 식구들은 차례로 서울에 올라왔다. 태삼이는 거지가 되어 동냥밥을 먹었다. 순옥이는 아버지와 올라와 시장통 합숙소에서 지냈다. 중부시장 좌판에서 밀가루 수제비를 먹다가 태일이가 불러 쳐다보았다. 싼 밥집은 가족들이 만나는 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1964년, 태일이 열일곱 되던 해, 식구들은 서울 여기저기서 촘촘한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밥을 먹고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사람들의 밥을 챙기지 않았다. 밥은 알아서 먹는 것이었다. 밥의 영양소와 건강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밥을 넘기지 못하는 몸
국민소득 3만불의 풍요가 무색하게 한국 청년들의 흙밥 또한 여전히 그렇다. 2016년 5월,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혼자 고치다 사망한 김군의 가방에서 컵라면이 나왔다. 2017년 제주 생수공장 제이크리에이션에서 일하던 실습생 이민호는 토요일에도 생산이 잡혀 집에 못 오게 되면, 구좌 읍내까지 나올 수가 없어 마트에서 컵라면과 햇반을 사서 끼니를 때웠다.

▲고 김용균 씨가 남긴 유품. [사진=태안화력 대책위]

2018년 12월, 태안화력 발전소에서 숨진 김용균의 사물함에서 그의 엄마는 컵라면 세 개와 홈런볼 한 봉을 꺼내었다. 개봉되지 않은 인스턴트 음식들은 엄마 품으로 그들 대신 돌아왔다. 어떤 이는 생전에 서로 알지 못하던 청년들의 부모가 만나 함께 싸우는 것을 ‘컵라면의 연대’라고 불렀다.

김용균은 수십 군데 면접 끝에 2018년 9월, 한국발전기술에 입사했다. 원청인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본부 트랜스파워에 배치되어 석탄설비운전 비정규직으로 일을 시작했다3. 구미에서 사내하청 비정규직으로 오래 일한 엄마 김미숙의 아들은 비정규직이 되었다. 엄마는 아들이 한 달 반 만에 구미에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떴다. 예비군훈련 덕이었다. 아들이 나타났다. 초등학교 때가 생각났다. 엄마가 좋아하는 은행 열매를 구린 냄새도 개의치 않고 봉투 한가득 따오던 아들이었다. 훌쩍 커버린 아들의 양손에는 부모의 건강식품이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300만원이 채 안 되는 40여일 치 월급을 넉넉하게 허문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강골은 아니었지만, 키 177에 75킬로그램은 나가던 아들이 너무 말라 있었다. 잔뜩 먹일 생각에 밥 두 그릇을 퍼줬는데 반 공기밖에 못 먹었다. 한 주에 두세 번 시켜먹던 통닭도 입에 대는 둥 마는 둥했다. 걱정되어 물어보니 위가 작아져 그런다고 대답했다.

사고 후에 알고 보니, 몸의 균형이 깨지는 시간표로 일했다. 4조 2교대 주간, 야간, 휴일 패턴으로 반복, 변형되는 근무는 일상을 교란시켰다. 몸의 리듬이 깨져 잠을 깊게 못 잔다. 매일 다른 시간대에 억지로 얕게 자다 보면 피로는 몇 배로 누적된다. 의외의 시간에 잠이 쏟아진다. 수면장애다. 새벽이 깊어질수록 집중력이 떨어져 사고 위험이 늘어나는 야간 노동은 국제적으로 2급 발암물질로 규정되어 있다4. 교대, 야간, 주야 혼합 근무는 저마다 몸에 안 좋은데, 그의 일터는 그 모두를 섞어 일을 시켰다. 여가를 누리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불규칙한 일과 일 사이 시간은 질 낮은 몽롱한 휴식과 부실한 인스턴트 음식으로 채워졌다. 김용균은 한 달 반 만에 엄마가 차려주는 그리운 집밥마저 꿀떡꿀떡 넘기지 못하는 몸이 되어 돌아와 식탁에 앉았던 것이다. 두 달 후, 그는 비정규직 노조와 함께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는다. 비정규 노동 최전방의 위험과 고단함,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안전, 안 지켜지는 약속을 알게 된 단호한 눈빛으로 정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열흘 후 김용균은 그런 몸과 마음으로 홀로 새벽 근무하다가 혼자서는 멈출 수 없는 고속 벨트에 끼여 몸이 부서졌다.

엄마, 배가 고프다
전태일은 번민 끝에 평화시장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평화시장에서 쫓겨난 뒤 1년 동안 막노동판과 삼각산 수도원 공사장에서 몸을 혹사시키며 일했다. 입을 꾹 다물고 생각하고 글을 쓰며 지냈다. 평화시장에 돌아오니 1년의 공백 덕에 취직이 되었고 친구들을 다시 모아 ‘삼동친목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의 냉소와 조롱’은 완강했다. 수기에는 맥락이 끊긴 여러 조각의 메모가 있다. 한 메모에서 태일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호의호식하는 아버지(사장)는 점심값을 200원 쓰면서, 자녀들(여공)은 하루 세끼 50원을 쓰는 것이 빈부의 법칙이냐고 항의하고 있다. 적당한 빵과 휴식을 달라고 노트에다가 휘갈겨 쓰면서 태일이 쓴 마지막 줄의 요구사항은 ‘진수성찬이 아닌 검은 빵과 한 컵의 물’이었다.

▲경향신문 1970년 10월7일자 기사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 석간 ‘평화시장 기사 특보’ 이후 품었던 태일과 친구들의 희망은 하나씩 무너진다. 10월 8일 삼동회의 요구에 시장 업주들은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고 한다. 태일을 찾아온 근로감독관 임정삼은 회원들이 다들 취직하면 1주일 안에 해결하겠다고 거짓 약속을 한다, 10월 20일 노동청 국정감사를 겨냥한 데모도, 10월 24일 오후 1시의 집회도, 11월 7일의 집회도 모두 사전에 정보가 새어 무산된다. 도와주는 줄 알았던 형사도, 모범 청년에게 상을 주겠다는 근로감독관도 사실은 정보를 캐어 주저앉히려는 정권 말단의 부속품들이었다.

태일은 자기 밥을 멈추기로 한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제안한다. 11월 12일 아침, 마지막이 될 집밥을 먹는다. 전날부터 방을 깨끗이 정돈하고 아끼던 검정 바바리코트를 준비해둔 태일은 식구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어머니 이소선은 납작보리와 쌀을 섞어 지은 밥에 김을 차려냈다고 회상했다. 그날 아침을 먹고 출발해 시위를 준비하느라 외박을 한다. 세상을 떠난 13일 밤 병원에 누워 갈증을 호소하던 태일이 숨을 거두기 직전 남긴 마지막 말을 혹시 들으신 바 있는가. 그 말은 바로 “엄마, 배가 고프다”였다.

평등한 허기를 불평등하게 대하는 한국사회의 전통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1위인 우리 사회의 임금 격차는 밥의 차이로 귀결된다. 80일 넘게 출근하지 않고 개혁 입법을 가로막아도 1,000만 원 넘게 월급 받는 국회의원들이 다니는 한 식당 밥값은 85,000원을 호가한다. 그들이 농성하면서 먹는 도시락은 25,000원짜리이다. 식구들과 밥을 먹기 위한, 급식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파업은 욕을 먹는다. 구미 반도체 부품공장 KEC 노동자들은 십년 간 100원 오른 1,700원짜리 급식을 먹는다. 급식판에는 유통기한을 코앞에 둔 우유가 놓여 있다. 노동자들은 모욕감을 느낀다. ‘격차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 영양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먹고살게 되었다는 평균 수치는 가난한 밥상을 은폐한다. 누군가의 저임금과 초라한 밥은 누군가의 초과 이윤과 기름진 밥상의 결과요 원인이다. 3년 전 청와대에 차려지던 송로버섯, 샥스핀을 기억한다.

▲구미 반도체 제조공장 KEC 노동자들의 점심 식단 [사진=KEC지회]

공장 새마을운동에서 박정희는 여공들에게 빈곤은 태만과 무지의 결과라며 근면을 강조했다. 이 시대 청년들은 헬조선을 지나 흙밥을 먹으며 열정 페이로 수십 곳에 원서를 내고 다닌다. 개인의 노력만을 요구하는 ‘능력주의’의 밥에서 존재를 긍정하는 ‘존엄의 밥’으로 가는 길은 얼마나 먼가. 엄마들이, 청년들이 밥을 멈춘 여러 가지 사정들을 살펴보았다. 그 사정들은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연결되어 있다. 비정규직 급식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은 학교와 가정의 건강한 밥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3일간 파업에 작은 박수와 함성을 보태러 내일 집회에 나가야겠다.

  1. 2017년 학교비정규직 집회에서 낭송된 정경희 님의 ‘밥선생님의 하루’라는 시에서 인용하였다.
  2. 1964년 짜장면값이 35~40원 정도였다. 이 연재를 하면서 1960년대 중반 물가에 곱하기 100을 하면 어느 정도 요즘 생활 물가와 비슷하게 이해되었다.
  3. 한국전력공사의 자회사 중 하나인 한국서부발전의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에 입사했다. 회사 설명이 길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시대 위험이 외주화되어 비정규직에게 긴 이름만큼 전가되어 있다는 뜻이다.
  4.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에서는 야간교대 노동을 2A급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발암성이 높은 순서대로 1급, 2A급, 2B급, 3급, 4급 순으로 나누었다. ‘달빛 노동 찾기(신정임, 정윤영, 최규화 기록, 오월의 봄, 2019’, ‘노동과 건강’ 잡지에서 내용을 참고해 추가 조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