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이여성] (4) “살아 있었다면 서훈준다고 해도 안 받았을 것”

[인터뷰]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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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9 10:11 | 최종 업데이트 2019-10-14 14:25

“이여성이 살아 있었다면 서훈은 준다고 해도 안 받았을 거다”

약산 김원봉 서훈 논란 정치쟁점화가 한창이던 지난 6월, 이여성(李如星, 1901~?)을 취재하던 중 만난 한 연구자가 한 말이다.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여성은 해방 이후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좌우합작운동 나섰다. 이여성은 1947년 여운형 암살, 이어진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 옥살이를 했다. 이여성은 출소 후인 1948년 월북했다. 특별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분단이 굳어지는 분위기와 남한 사회 내 좌익 계열 탄압 분위기를 따져보면 월북이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여성은 북한에서도 숙청됐다. 남북에서 모두 추방당한 이여성을 연구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해방 전 남한에서 이여성은 사회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 때문인지 당대 신문 기사나 저명인사들의 회고록에 등장하고, 자신이 쓴 기사와 저서도 다수 남아 있다. 이런 기록을 기반으로 이여성 관련한 연구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다. 연구자 중에서도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는 이여성의 생애, 사상, 예술론까지 집대성했다.

신용균 교수는 좌우합작운동 실패, 단독정부 수립은 민족 분단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신적 분단마저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정신적 분단 상태에서 한국 사회는 점점 극단화됐고, 이여성이 그러했듯이 “다른 것을 추구하면 제거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한편, 분단을 극복하려는 다른 축의 힘도 있었다. 신용균 교수는 “그 힘이 4월 혁명, 5월 광주, 6월 항쟁, 지금의 촛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다시 이여성이 추구했던 ‘좌우합작’, ‘경제적 평등’, ‘정치적 자유’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이여성에 대해 연구하게 된 계기는?
=민주주의, 민족 통일, 분단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왔다. 해방 공간에서 소외된 사상을 살펴봤더니, 극좌와 극우의 사상만 남더라. 여운형과 김규식이라는 중도 좌우파의 사상은 잊혔다. 그들의 풍부하고 많은 경험과 사상이 남북한 모두에서 상실됐다. 여운형을 추적하다 보니 이여성이 나오더라. 여운형의 참모 역할이었는데, 볼수록 흥미로웠다. 다방면에 재능이 있고,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편향되지 않았다. 르네상스적 인간이다.

이여성의 인간적 모습은 어땠을까?
=양반 가문에, 무관직을 지낸 부유한 집안이었다. 결정에 망설임이 없고, 판단만 내리면 그대로 실행한다. 보성학교 재학생일 때 동맹휴업을 주도했는데, 그런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다. 창원현감을 지낸 아버지 이경옥 몰래 토지 문서를 내다 팔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만주로 갈 때 땅 팔아서 6만 원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지금 가치로는 수십억 정도인데, 아마 실제로는 아버지가 지원했을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자신감, 재능, 성격 등에 영향을 줬을 거다.

▲이여성의 아버지 이경옥의 제적 등본

그런 쟁쟁한 가문이 지금에는 왜 아무런 흔적이 없는가
=좌익이고 월북을 했다. 이쾌대도 월북했다. 10년 전쯤 논문을 쓸 때, 그때는 조사하러 가면 그쪽 지역 사람들은 좌익에 대해 묻는 것조차 적대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여성은 북한에서도 아직 복권되지 않았다. 동생 이쾌대는 복권됐다. 북한에서 나오는 미술가 편람을 보면 이쾌대는 있는데 이여성은 없다. 북한에서는 복권되지 않으면 관련 이야기 자체를 찾을 수 없다.

이여성은 약소민족에 애착 갖고 연구를 했다. 조선 독립과 연관 지어서 연구했을 것 같다. 유사하게 당시 공산주의 방향도 반제국주의 흐름이 있었다. 이여성의 사상을 민족적 사회주의라고 규정했는데, 그 특징은 무엇인가?
=어떻게 독립할 것인가에 관심 있으니 자연스럽게 약소민족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을 거다. 공산주의의 핵심이 계급 관계인데, 이여성은 이 관점을 제국주의 국가와 약소민족의 관계로 원용한다. 코민테른이 민족주의자를 배제해야 한다는 12월테제를 발표했을 때에도 유지했다. 신간회 해체에도 이여성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여기서 차이점이 생긴다.

이여성의 사상적 특징은 어떤가?
=이여성 사상의 요소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다. 의회를 통해 합법적 선거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를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해 사민주의 경향도 있다. 통일 방법론은 좌우합작과 신간회 이후의 민족유일당을 통한 통일을 추구했다. 민족주의자에서 출발한 이여성은 일본 유학 중 대정민주주의(다이쇼데모크라시, 大正デモクラシー)를 접한다. 후에 무산정당 운동에 주목하게 된다. 합법적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고, 의회에서 입법을 통해 사회주의를 한다는 것이다. 이여성은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따져봤다. 의회를 통해야 한다는 방법론은 건국 과정에서 좌우합작을 통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지금 진보정당이 대체로 사민주의를 추구한다. 이제야 사민주의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이야기가 이미 해방공간에서 있었던 것이다. 이걸 복원하는데 반세기가 지났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1947년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발족했다. 임시위원단 대표단에는 시리아, 인도, 호주, 캐나다, 엘살바도르, 중화민군, 필리핀, 프랑스, 우크라이나가 참여했다. 남북 총선거 실시를 위해 임시위원단은 공산주의자들과 면담을 시도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해당 문서에 면담자들의 정보가 나와 있다. 김원봉, 이관술, 백남운 등과 함께 이여성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이여성은 경찰의 감시를 받지 않고, 서울 모처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나와 있다.

당시 중도파들의 사상이 힘을 받지 못하고 쇠퇴해서, 그 부재가 현대 한국 사회의 특징에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2차 세계대전 후 신탁통치를 받으며, 좌우익이 협력했다. 이후 10년 뒤 독립했다. 한국과 다르다. 해방 후, 통일국가 건설이 과제라면 여기에 구심력과 원심력이 작용했다. 구심력은 독립 국가를 세우자는 힘이었고, 원심력은 극좌, 극우 양극단이었다. 구심력이 약했다. 결국 분단을 초래했다. 분단은 우리 사고방식마저 바꿨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이분법적 사고다. 공존, 합의, 타협, 협상. 이게 없어지고 극단적 주장만 남았다. 지난 반세기의 일이다. 다른 걸 말하면 제거된다. 이여성은 북한에서도 제거됐다. 민주주의자니까 그렇다.

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정신적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이 있었다. 4월 혁명, 5월 광주, 6월 항쟁, 그리고 지금의 촛불까지도 이어진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다. 해방공간에서 김규식, 여운형이 이야기했던 정치적 자유, 경제적 평등, 좌우합작, 남북합작. 이런 것이 지금에 와서야 겨우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 남북합작, 공조와 합의라는 구심력이 힘을 받지 못한 것은 한국사회의 비극이다. 이걸 다시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피땀을 흘렸나.

해방 후의 모습과 지금 사회의 모습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꼭 지금 사회가 사상의 자유 측면에서 꼭 발전했다고 볼 수도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해방 공간에 보배 같은 수많은 사상이 나왔다. 극단을 빼고 배제하는 사회가 되면서 우리의 풍요로운 경험이 묻혔다. 이걸 다시 복원해야 한다. 북한,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 처벌받던 시기도 있었다. 내가 59년생이라서 일제시대, 해방, 이런 것이 내게도 역사일 뿐이다. 역사는 역사로 보고 객관적으로 보면 된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했고, 북한에서 고위직을 했으면 둘 다 사실로 보면 된다. 이여성도 마찬가지다. 추종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보면 된다. 역사를 정치적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역사로 무엇인가를 정당화하면 안 된다.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면 왜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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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요인검거는 치안교란의 혐의", 동아일보, 1947.8.14
"유명인 죽음 마케팅 '사의찬미' 대성공 두려웠던 日이 발표한 노래는?", 김문성 국악평론가, 동아일보, 2018.2.8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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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오 칠곡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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