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허은] (1) 임청각 종부, 여성 독립운동가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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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1:35 | 최종 업데이트 2019-10-14 17:00

“그러면 서울에서 봅시다. 저는 서울에 있어요” 면으로 만든 옅은 청색 자켓을 입고, 세련된 다아이몬드 무늬 모자를 쓴 노신사가 말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지 않은 탓에 귀 주변으로 드러난 새하얀 머리카락이 기품을 더했다. 5월 21일, 경북 안동 병산서원에는 그처럼 기품 있는 노신사 수십명이 모여 오랜만에 인사를 나눴다. 양장을 한 이들 사이사이에 두루마기를 걸친 이들도 보였다. 그들 중 다수는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운동에 나섰거나, 몰락한 제국의 귀족이었다.

▲5월 21일 경북 안동시 병산서원에서 이항증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노신사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총을 들고 일본 순사를 처단하기도 했고, 일본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 일로 옥고도 치뤘다. 할아버지 역시 조국을 되찾으려 동분서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의지를 드러냈다. 증조할아버지는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독립운동가다.

그래서 노신사는 임청각의 종손, 석주 이상룡의 증손자, 석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같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의 이름은 이항증(80). 오랜시간 여러 호칭으로 불린 그에게 최근 또 다른 호칭이 덧붙여졌다. ‘임청각 종부 허은의 아들’. 5월의 푸른 하늘과 함께 병산서원을 찾은 건 ‘허은의 아들’ 이항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머님에 대해서 취재를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시간을 좀 내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들은 흔쾌히 연락하라며 명함을 건네왔다. (사)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의 직함이 적힌 명함에서 그가 품고 있는 역사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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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5일, 이항증은 어머니를 대신해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을 찾았다. 나라를 되찾은 걸 기념하는 일흔 세번째 기념식이 그날, 그곳에서 열렸다. 아들은 가장 앞줄로 안내됐다. 식장으로 들어서는 대통령과 일곱번째로 악수했다. 앞선 사람들이 악수하는 사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박수를 쳤다.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만났던 인연을 기억했는지 손을 맞잡으며 입술을 앞으로 쭉 내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대신해 훈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애족장, 어머니가 떠난지 21년 만의 일이다.

▲허은 지사의 아들 이항증

“여성의 독립운동은 더 깊숙이 묻혀왔습니다.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중삼중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광복을 위한 모든 노력에 반드시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예우를 받게 하겠습니다. 정부는 여성과 남성, 역할을 떠나 어떤 차별도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해 낼 것입니다”

그날 대통령은 어머니 같은 여성을 더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말처럼 아들의 어머니를 포함한 여성의 독립운동은 깊숙이 묻혀왔다. 1949년부터 2019년 현재까지 1만 5,689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그중 여성은 444명, 2.8%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여성과 남성, 역할을 떠나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하겠다는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는 2%(2017년 기준) 수준에 머물렀다.

아들의 어머니도 깊숙이 묻혀온 역사였다. 아버지 이병화와 할아버지 이준형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던 1990년에도 어머니 이름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해에 역대 가장 많은 3,614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다. 81명은 여성이었다. 올해(85명)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여성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됐지만, 어머니는 언급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되려 “과거 행적을 인정받는 세상이 온 것만 해도 여간 다행이 아니다”며 남편의 유공자 포상을 기뻐하는 회고를 남겼다. 어머니는 숨을 다하는 1997년까지 아버지의 아내, 할아버지의 며느리, 증조할아버지의 손자 며느리로 살다가, 사후 21년 만에 온전히 ‘허은’으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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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사님. 지금 형무소 앞에 있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독립문 쪽으로 내려오세요. 그쪽에 서 있어요”

안동 병산서원에서 짧은 만남 후 이항증을 다시 만난 곳은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번지다. 3만평이 넘는 드넓은 부지는 1992년부터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이곳 한켠에는 망해가는 조선을 개화된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던 젊은 개혁가들이 드나들던 건물이 있다. 독립관, 일제는 그 이름이 불경하게 ‘독립’을 운운하자 철거해버렸다. 지금의 독립관은 1997년 새로 복원됐다. 복원된 독립관 아래에는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가 사용하는 사무실과 교육관 시설이 있다. 미래를 그리던 건물이 과거를 기리는 공간으로 거듭난 셈이다. 독립관 앞에서 일행을 맞은 그는 유족회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1939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느 해라고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겠느냐만, 그가 태어난 해에도 어머니 허은은 힘들고 어려운 한 해를 보냈다. 허은 스스로 “항증이 낳은 지 한 달 조금 더 지났으나 어린 것 한 번 돌아볼 여가도 없었고 마루끝에 잠시 앉아 볼 틈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1932년 증조부 이상룡의 죽음으로 만주에서 고향땅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와 얼마되지 않아 증조모도 돌아가시게 되었다. 조부모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병약했던 조모는 그가 태어나고 얼마지나지 않아 중풍으로 병석에 누웠다. 허은은 조모를 위해 한 달에 세 번 꼴로 개고기를 고았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99칸 대저택 임청각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공식적으로 임청각은 이제 그들 가족의 소유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일제가 그들 가족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만주 이주 초기, 조부는 독립운동과 만주 정착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차례 안동에 잠입했다. 자금은 안동 재산을 처분하는 것으로 마련할 수 밖에 없었고, 임청각 역시 처분 목록에 있었다.

▲임청각 가옥매매증서

여러차례 임청각 매각을 시도하던 조부는 1913년에 공식적으로 임청각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1913년 음력 6월 21일자로 체결된 매매증서에는 임청각을 900원에 이종하, 이석, 이태 등 3명에게 매각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들 모두 고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다. 이때 조부는 임청각 뿐 아니라 주변 밭 10뙈기, 집 뒷산도 같이 매각했고, 100원을 더 받았다. 이렇게 마련된 돈은 만주에서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를 만들고 운영하는데 쓰였다.

문중에서 그들 가족을 문전박대한 건 아니었다. 증조부 3년상을 임청각에서 치룬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분별없이 찾아와 괴롭히는 일경들이었다. 3년상을 치루는 내내 일경들은 임청각을 제집 드나들듯 하면서 가족들을 감시하고 괴롭혔다. 일경은 집안 조상들 산소 비문에 단기로 연호를 적어놓은 것까지 트집 잡았고, 증조부 3년상 제문까지 검열했다. 일경의 괴롭힘에 조부는 사람을 시켜 단기 연호를 쪼아 없앴다.

결국 가족들은 그가 태어나기 5년 전에 지금은 호수 아래 가라 앉은 ‘돗질’로 이사했다. 당시 행정구역상으론 안동군 월곡면 도곡동이라고 했다. 조상 묘소와 재사(齋舍)가 있어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증조부가 몸을 피했던 곳이다. 생활은 궁핍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고향땅으로 돌아와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수시로 집을 비웠고, 수시로 경찰에 붙잡혀 들어갔다. 대구경찰서와 안동경찰서에는 아버지 방이 따로 있다고 할 정도였다. 집안 건사는 온전히 허은의 몫이었다.

“남자들이 독립운동을 하고 기록을 남긴걸 보면 꼭 자기 자랑 같이 해놨는데, 일반인들이 볼 때 그 양반들이 대관절 밥은 어떻게 먹고, 옷은 어떻게 입고, 생활은 어떻게 하며 살아 나갔다는 자세한 기록이 없었어. 최근에 와서 김동삼 선생 며느리 이해동 여사가 ‘만주생활 77년’ 그래가지고 글을 써 낸단 말이야. 우리집 어머니, 허은 여사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써가지고 그때 여자들이 생활한 걸 그대로 기록해놨어. 여자들이 옷 깁는 것도 해주고, 단추도 달아주고 말이야, 남의 집 일도 해주고 이래가지고 독립운동가를 먹여 살린 사람들이 여자들이었다고”

‘독립운동가를 먹여 살린 사람’ 그의 표현을 빌리면 허은은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허은은 한 평생을 이름 없이 살았다. 그저 이병화의 아내, 이준형의 며느리, 이상룡의 손자 며느리였다. 허은은 1993년, 아흔을 넘긴 후에야 회고 작업을 시작해 자기 이야기를 풀어냈다. 1995년 그 결과물이 책으로 엮여 나왔고, 2년 뒤에 숨을 거뒀다. 그 이야기도 대부분 아내, 며느리로서의 삶을 담담히 풀어낸 것이었다.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도 없었지만, 그래서 허은이 어떻게 ‘독립운동가를 먹여 살려 왔는지’가 잘 드러났다.

▲허은 지사는 2018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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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를 먹여 살린 사람’으로서 허은의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은 드넓은 만주 벌판에서 붉은 땅거미가 내려앉는데서부터 시작한다. 1930년 봄의 일이다.

멀리 지는 해가 보이고, 붉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들녘에 두 여성의 숨소리만 거칠게 들린다. 한 여성은 척 보기에도 나이가 많다. 혈색도 그리 좋진 않다. 그에 비하면 다른 여성은 젊다. 키가 크진 않지만 단단하고 당차 보인다. 젊은 여성은 돌이 됐을까 싶은 아기도 들쳐 업었다. 아이는 순하게 업혀 잠을 자고 있다.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앞만 바라보며 계속 걷는다. 이야기 나눌 여유는 없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집에 이르려면 마음이 바쁘다.

두 사람은 매일, 매시간 쉴틈이 없다. 논일 하는 사람들 먹일 밥을 준비해 놓으면 그들도 밭일을 시작한다. 이들이 처음 발 디뎠을 때 만주는 황량한 벌판에 불과했다. 땅은 넓지만 볍씨 뿌릴 논은 찾을 수 없었다. 억새풀 베어낸 자리를 논으로 만들고, 그것도 부족하면 저습지도 수전으로 만들었다. 논으로 쓰기 마땅찮은 땅은 밭으로 썼다. 봄이면 옥수수며 콩, 팥이나 고추를 심어 기를 수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집에는 또 다른 여성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증손자들을 돌보고 있다. 아들은 병이 나 몸져 누웠고, 손자는 아비 약을 지으러 나섰다가 경찰에 붙잡혀갔다. 야밤에 손자 대신 중국인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온 집안을 뒤지고, 온갖 것들을 가져갔다. 그중에는 고향 땅에서 소중하게 챙겨온 임청각 흑옥도장도 있었다. 집안의 가보 같은 물건이었다. 그녀는 매일 밤 정화수를 떠놓고 도장이야 어떻게되도 좋으니 손자만 무사히 돌아오길 빌었다.

셋 중 가장 어린 여성은 고된 몸으로 매일 밤 기도하는 그녀를 돕는다. 그녀의 지극정성에 감복하면서 ‘일이 죽나 내가 죽나 둘 중에 하나’란 생각으로 견딘다. 사실 그녀의 손자는 자신의 남편이기도 하니 그녀의 기도는 자신의 기도이기도 했다. 다행히 남편은 붙잡혀 간지 세 달 만에 큰 탈 없이 풀려났다. 어린 여성은 두 분 윗고부의 지극 정성 덕분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 귀엔 아직도 서간도 바람소리가> p133~135 재구성)

이 무렵 집안 남자 세 사람은 여전히 독립운동으로 바쁘거나 아팠다. 증조부 이상룡은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다가 1926년에 물러나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합치는 일에 몰두했지만, 1929년 무렵엔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됐다. 1930년경엔 이미 70세를 넘겨 연로한 증조부는 낚싯대를 들고 나가 소일하거나 동지들을 만났다. 마찬가지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조부는 1930년 무렵부터 병을 얻어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았다. 아버지는 연로한 어른들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 왕성하게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들의 뒷수발은 온전히 집안 여자 세 사람 몫이었다. 집안 남자들 뿐 아니라 집안 남자들이 지도하는 독립운동 단체를 후원하는 일도 이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농사를 짓기도 했고, 여차하면 직접 개간을 하기도 했다. 허은 스스로도 “개간에는 이력이 났다”고 회고할 정도다.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허은을 비롯한 여성들의 역할을 ‘후방 독립기지’라고 표현했다.

“만주라는 공간에서 독립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여성의 후원이 없다면, 사실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각종 모임을 할 때 여성들이 음식을 제공하는 장면들이 허은의 회고록에 나오고 있습니다. 1919년에 만들어졌던 서로군정서 같은 경우는 굉장히 많은 대원들이 거기에 훈련을 받고 전쟁터로 나갔단 말이죠. 그랬을 경우에 이들의 옷을 깁는다거나 입히는 역할들은 여성이 할 수 밖에 없는거죠. 허은의 회고록을 보면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옷을 깁기 위해 산더미처럼 솜 무더기를 쌓아놓고 옷을 기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요”

강윤정 부장은 그 시절 수많은 여성들 가운데 허은을 비롯해 고성 이씨 집안 아내들의 행적에 주목했다. 강윤정 부장은 친정에서부터 혼인 후 시댁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가(家) 또는 양반가(家)의 환경도 허은의 행적을 설명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설명한다. “항일투사의 집안에 태어나 항일투사의 집으로 시집가게 된 것도 다 주어진 운명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라의 운명 때문에 한 개인의 운명도 그렇게 되었겠지” 그 조건은 허은도 인식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적 조건이었다. (계속)

#참고문헌
강윤정, 『만주로 간 경북 여성들』, 한국국학진흥원, 2018.
이준형, 『동구선생문집上』,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2016.
허은 구술,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1995.
김희곤, 「이준형의 독립운동과 임청각의 수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63』, 2018.
김희곤,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과 사상」, 『내일을 여는 역사 69』, 2017.
이명영, 「국운과 인간운명에 관한 사례연구」, 『사회과학 26』, 1986.
조선희, ‘일제하 무장 항일운동의 상징, 이상룡’, <한겨레>, 1990.10.5
‘평화가 경제다,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식 : 문재인 대통령 경축사 전문 풀영상’, <KTV>, 2018.8.15

#도움
강윤정 전)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현 안동대 사학과 교수)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관장
이항증 (사)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박하경, 이기쁨, 현유림, 최지혜(20대 여성 집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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