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읽기, 쓰기, 그리고 ‘교양’에 관하여 /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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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1:08 | 최종 업데이트 2019-10-14 12:07

3년 전부터 대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왔다. 호구지책이었지만 하려고 들면 그보다 잘 버는 일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그만두지 못하고 이어오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일반 성인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와 독서 강의도 병행하고 있다.

실토하자면 나는 흔히 말하는 ‘좋은 선생님’과 거리가 멀다.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아 사람 만나는 일을 부담스러워했고, 지금도 여전히 혼자 놀거나 글 쓰는 게 가장 편하다. 그럼에도 내가 강의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배우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 다니며 고액 과외를 하던 시절엔 미처 알지 못한 기쁨이다.

나의 글쓰기 강의는 종종 독서 강의가 되고, 독서 강의는 또 종종 글쓰기 강의로 변한다. 수강생들도 가끔 ‘이게 대체 독서 강의인지 글쓰기 강의인지 헷갈린다’고 말하곤 한다. 수업이 그렇게 되는 건 필연적이다. 실은 그 둘이 한 몸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자주 보고 영화에 대해 평하다 보면 결국 영화를 찍게 된다던가. 글도 마찬가지다. 남의 글을 읽다 보면 자기 글을 쓰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글쓰기가 최종단계는 아니다. 글쓰기는 다시 책 읽기로 돌아가야 한다. 더 나은 사유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글쓰기 수업에서 문장과 단어를 윤나게 갈고 닦는 일은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적확한 단어, 생기 넘치는 문장, 일관된 논리. 그걸로 족하다. 탁월한 통찰이나 보석 같은 비유가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건 어쩌다 만나는 선물 같은 거다. 그러나 내용을 집어삼킬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은 위태롭다. 그것은 사유를 수사로 대체하게 만드는 독이기 쉽다.

문장의 미학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게 독이듯, 교양에 대한 지나친 갈망도 독이 되곤 한다. 나는 수업 첫 시간에 단언한다. 책은, 달리 말해 ‘교양‘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책은 단 한 명의 영혼도 바꾸기 어렵다고. 독서 편력은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거의 말해주지 못한다고. 우리는 흔히 ’교양‘, 인문 교양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곤 하는데, 과연 그러한 선호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왔는지 냉철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교양주의(敎養主義)는 근대 시기 일본에서 만들어진 단어로, 처음에는 입신출세주의의 안티테제로서 등장한다. 여기서의 ‘교양’은 중국, 한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유학 경전 및 고전문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유럽의 인문고전에 대한 교양(Bildung)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근대 이후 한국의 ‘교양’과 ‘교양주의’ 개념은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그 의미와 수용의 맥락 역시 그대로 답습되었다. 특권적 지위를 누렸던 도쿄제국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교양주의가 퍼져나간 것처럼, 경성제국대학교의 교양주의 역시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입신출세주의의 반작용이자 그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 교양주의는 처음부터 강한 엘리트주의를 내장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교양주의는 입신출세주의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었고, 예외적 경우들을 제외하면 단지 그 노골성을 완화해주는 문화적 장신구로 기능하게 된다.

교양주의는 이내 ‘교양물신주의(敎養物神主義)’로 변형한다. 교양이 출세와 지위경쟁의 도구이자 물신(fetish)이 된 것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교양주의는 그렇게 한국에서 입신출세주의와 더욱 강하게 일체화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한국에서 독서와 교양의 효용에 대한 지나친 강조, 서양 고전에 대한 맹목적 숭배 등은 진리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계급적 구별 짓기와 과시 열망의 표현에 불과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숄 남매와 하이데거.

지식과 교양이 아무리 넘쳐난다 해도, 그것이 세계의 고통을 경감하는 데 쓰이지 못한다면, 혹은 세계의 악을 증대시키는 데에 일조한다면 그 지식과 교양은 없느니만 못한 것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치의 야만에 맞서 정치적 책임을 다한 유일한 사례로 백장미단(Weiße Rose)의 숄 남매를 꼽는다. 이 남매는 히틀러를 ‘대학살자’로 표기한 전단지를 뿌리고 나치 반대 운동을 공공연하게 선동하다 처형당한다. 당시 독일에서 유대인을 숨겨주거나 나치에 동조하지 않는 등의 개인적으로 저항한 이들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숄 남매와 백장미단은 개인적 저항을 넘어 ‘집단적 저항’을 만들어내려 했다. 바로 그랬기에 아렌트는 오직 이들만이 “정치적 책임을 다했다”고 평한다.

이 남매의 교양은 어땠을까. 나치에 부역한 ‘존재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줄줄 암송할 수 있었던 아돌프 아이히만보다도 책을 많이 읽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숄 남매는 교양이 표방하는 가치를 완전한 형태로 실현해 보였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 더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 것은 교양이 부족해서, 책을 읽지 않아서가 아니다. 집단적 실천으로 나아갈 계기를 찾지 못하거나 애초부터 찾을 생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럼 왜 책을 읽는가? 세상과 나를 바꾸기 위해서다. 모순으로 들릴 수 있을 게다. 방금 책이나 교양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순이 아니다. 세계의 변화는 책에 적힌 지식들에 의해 일어나는 게 아니지만, 우리는 책을 통해 타인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책을 매개로 살아 숨 쉬는 타인을 만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또한 바로 그 이유에서 책은 특권적 사물이 아니다. 책은 유튜브, 영화, 웹툰처럼 세상에 숱하게 널린 여러 매개(media) 중 하나일 따름이다.

수업에서 나는 지식축적에 대한 조바심이나 강박을 버리라고 말한다. 축적만 하고 생산하지 않는 독서, 계속 ‘먹기만 하고 싸지 않는’ 독서, 영원히 ‘훌륭한 저자 선생님’을 흠모하기만 하는 ‘교양 대중’의 고상한 독서는 환상을 만드는 독서이자 병든 독서이고, 끝내는 죽은 독서가 되고 만다.

그럼 살아있는 독서란 무엇인가? 단적으로 그것은 ‘읽은 것 이상을 창조하는 독서’다. 책을 읽는 행위는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만나는 행위로 이어져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무슨 책을 얼마나 읽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읽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고, 무엇을 썼는가다. 어설프든 설익었든 누군가를 만나고 그 우발적 만남이 무언가를 생산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독서. 그것이 책읽기의 본령이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놓지 않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조금씩 깨닫게 될 것이다. 책이 어떻게 다른 매개보다 더 낫고, 어떻게 비슷하며, 어떻게 못 한지를. 그리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말하고 써야 할지도 차츰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깨달음, 혹은 감각들이 우리를 더 많이 연결시키고 더 자유롭게 만든다. 독서를 신비화하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는 이런 균형감각을 통해 자유로워진 독자는 자연스럽게 좋은 ‘저자’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책이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내가 꿈꾸는 읽기와 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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