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버티며 살아남는 사람들에게, ‘버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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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라. 이겨라.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다.” 직장인의 애환과 현대인의 삶을 바둑에 비유했던 웹툰 <미생>에서 오상식 차장이 장그래에게 남긴 말이다. 전쟁터로 비유되는 직장은 오늘 하루 버티면 또다시 이겨내야 내일이 남아 있다. 영화 <버티고(vertigo)>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서영(천우희)의 일상을 보여준다. 마치 관객에게 “버티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 같다.

초고층 빌딩 사무실에서 계약직 디자이너로 일하는 서영은 이명과 어지러움에 시달린다. 회사에서 가슴 졸이던 서영은 가족에게서 안식을 얻지 못한다. 재가한 엄마는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 사소한 불평을 늘어놓거나 돈을 요구한다. 유일한 위안은 직장 상사 진수(유태오)와의 은밀한 연애를 통해서다. 차장인 진수는 사내에서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업무능력, 세련된 매너 등으로 주목받는 인물이다. 서영은 진수와의 연애를 통해 고달픈 삶에 대해 위안을 느낀다.

하지만 진수와 관계는 불안정한 계약직 생활만큼이나 불안하다. 위태롭게 이어가던 서영의 일상은 조금씩 균열이 나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게다가 재가한 엄마마저 서영을 찾아와 신세 한탄을 늘어놓으며 괴롭힌다. 자신의 모든 게 무너진다고 느끼던 서영은 문득 창밖에서 로프에 매달린 채 자신을 지켜보는 남자 관우(정재광)와 마주한다.

<버티고>는 현기증을 뜻하는 영어 Vertigo와 ‘버틴다’는 우리 말뜻 모두를 내포한다. 중의적인 제목은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관통한다. 불안정한 사회적 신분, 답답한 연애, 심란한 가족 사이에서 지친 현대인의 심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특히 불안정한 소리와 흔들리는 시야 등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서영의 감정과 심리를 오롯이 전달한다.

믿고 있던 관계들이 차례로 무너질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파장을 가만히 바라보는 카메라는 보이는 것보다 많은 감각들을 전한다. 답답하고 억눌린 심경을 형상화하는 방식은 독특하면서도 섬세하다. 스펙터클한 사건도 없고 묘사도 전반적으로 미니멀하지만 한 개인의 심리를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 배우 천우희는 떨리는 눈빛과 목소리, 동작 하나하나에 응축된 감정을 담아 서영을 표현해냈다.

영화는 매일 다른 날씨 상황으로 달라진 하루를 보내는 서영의 심정을 대변한다. 이를 통해 날씨와 그날의 그들에게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 유의 깊게 감상할 수 있다. “오늘 하루도 몹시 흔들렸지만 잘 견뎌냈다. 거리는 튼튼하니 이제 안심이다.” 흔들리는 고층 건물에서 온종일 일하는 직장인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다. <러브픽션>(2011)을 연출한 전계수 감독의 신작이다.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기이하게 비틀리고 기울어진 세상에서 하루를, 또 내일을 버티며 살아남는 사람들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