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한국 정치, 세대 교체와 성분 교체 / 박권일

14:32

총선이 다가오자 세대 교체론과 청년 정치에 대한 기대가 치솟는다. 심지어 노인 정치의 선두주자격인 정당조차 청년 후보에게 파격적인 가산점을 준다고 한다. 그런 뉴스를 보면 기대가 되기보다 머리와 가슴이 더 차게 식는다. 지난 수십 년의 경험칙으로 이 모든 게 그저 ‘쇼잉(보여주기)’임을 알기 때문이다. 선거 때만 되면 ‘젊은 피’니 ‘참신한 새 정치’를 운운하지만, 기성정치는 스펙 좋거나 말 잘 듣는 청년 몇몇 구색으로 넣고 뿌듯해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 또 같은 짓을 반복할 것이다. 한국은 그렇게 ‘역동적으로 불변하는’ 사회다.

핀란드의 신임 총리 산나 미렐라 마린 씨가 34세 여성이란 뉴스가 큰 화제였다. ‘우린 언제나 저런 정치를 보게 될까’ 한탄하며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 사람들을 향해 ‘총리의 나이에만 주목하지 말고 핀란드라는 나라가 젊은 정치인을 키워내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며 정치인 재생산 구조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가운데)가 지난해 핀란드 퀴어퍼레이드에 참석한 모습.(사진=산나 마린 트위터)

정치인 재생산 구조가 더 본질적 문제라는 주장은 타당하다. 한국에선 34세 샐러리맨이 회사에서 부장이나 본부장 직함만 달아도 ‘파격’이란 소리가 나온다. 고위 공직에 오른다면 말할 것도 없다. “새파랗게 젊은 애가 뭘 안다고” 소리가 당장 튀어나올 게 뻔하다. 이런 한국적 상황을 바탕에 깔아놓는다면 당연히 34세 총리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사건이다.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대파격이다.

하지만 핀란드에서는 그렇게까지 놀라운 사건이 아니다. 물론 핀란드에서도 드물게 젊은 총리이긴 하나 그렇다고 무슨 정치신인이 갑자기 총리가 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핀란드에서는 15세부터 정당 선거에 참여할 수 있고 많은 청소년이 10대 중반에 이미 현실정치를 접한다. 그렇기에 꾸준히 정당 활동을 했다면 30대 중반에 경력 20년의 중견 정치인이 되는 셈이다. 핀란드만이 아니라 유럽 사민주의 국가에서 30대 장관은 너무 많아 뉴스거리조차 못 된다.

또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별이다. 마린 총리는 여성이면서 성 소수자로 동성 반려자와 함께 아이 한 명을 기르고 있다. 총리 개인뿐만 아니라 그가 꾸린 내각 전체에도 주목해야 한다. 마린 내각 전체 19명 장관 중 12명(63%)이 여성이다. 부총리 겸 재무장관에 32세의 카트리 쿨무니 씨, 교육장관에 32세의 리 안데르손 씨, 내무장관에 마리아 오히살로 씨 등 최연소 총리보다 더 젊은 장관들이 주요 부처 장관으로 임명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여성 장관 비율이 평균 20%대임을 감안하면, 핀란드는 두세 배나 되는 셈이다. 이 역시 핀란드에선 엄청난 파격이라 하기 어렵다. 핀란드는 1906년 유럽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나라로서, 그동안 수많은 여성 의원, 장관, 총리를 배출해왔기 때문이다.

눈여겨볼 점은 또 있다. 마린 총리는 가난한 싱글맘 가정 출신이다. 생활고가 심해 15살부터 빵 포장회사에서 일하고 잡지 배달을 해야 했다. 어렵게 진학한 대학의 학비 대출금을 갚기 위해 대학을 다니며 영업사원 일을 병행했다. 마린 씨는 노동계급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노동자였다. 그는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핀란드의 복지체계와 용기를 준 교사들 덕분입니다.”

이런 점들을 모두 고려하면, ‘젊은 정치인을 키워낸 시스템’에만 주목하는 건 지나친 축약이고 왜곡일 수 있다. 단지 젊은 정치인을 많이 공급하는 거로 따지면 일본이 오히려 한국보다 나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지역구라는 이유만으로 아들과 손자가 손쉽게 의원으로 당선되곤 한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세습정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새로 당선된 정치인은 젊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평범한 서민을 대변할까? 한국 정치는 물론 지금보다 훨씬 젊어져야 하지만 단순히 생물학적 젊음을 정치개혁의 목표로 오인해선 곤란하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엘리트-자산가-장·노년층 남성’으로 획일화된 지금의 정치 주도집단을 근본적으로 바꿔내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 정치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세대 교체’라기보다 ‘성분 교체’다.

오해 말자. 이는 세대 교체를 정치 개혁과 동일시 말라는 뜻이지 세대 교체가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분 교체’와 ‘세대 교체’는 대립하지 않는다. 그 둘은 같이 가며 또 그래야 한다. 세대 교체는 성분 교체의 효과적인 지렛대 내지 출발점으로 활용될 수 있다. 늙은 기득권 집단은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종종 그 공포심을 공적 지면에 배설한다. “18세는 ‘포퓰리즘 면역항체’가 없으니 선거권을 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 같은 자가 좋은 예다.(“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2019.12.20.)

김광일의 논리로 치면, 유튜브 가짜뉴스를 맹신하며 성조기 들고 다니며 폭력을 일삼는 노인 전원의 선거권은 박탈되어야 한다. 그들은 ‘포퓰리즘 면역항체’가 없는 수준을 넘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심신미약’ 상태 아닌가. 그러나 민주주의자는 그런 식으로 반박해선 안 된다. 그것은 우열의 논리로 인간을 차별하는 엘리트주의이며 반민주주의인 까닭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자는 권리를 확장하는 사람이며, 평등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권력의 자격을 문제 삼기보다 권력의 독점을, 즉 권력 구조를 문제 삼는다. 또한 그렇기에 민주주의자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일치를 꿈꾼다. 민주주의의 이런 본질을 어떤 학자보다 명석한 언어로 깨우쳐준 이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시인 준 조던이다.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은 우리다.(We are the one we’ve been waiting for.)”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