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한국 영화 클리셰의 집합체,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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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12:23 | 최종 업데이트 2019-12-24 12:31

<백두산>은 한국 영화의 단점들을 몽땅 끌어다 모았다. <신과 함께> 시리즈로 주가를 올린 덱스터 스튜디오는 한국 영화 기술의 수준을 보여줄 요량인지, 건물 붕괴부터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까지 온갖 재난 시각 특수효과(VFX·Visual Effects)를 선보인다.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은 빼어난 영상미를 자랑하겠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너무 힘을 준 탓에 인공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잠수교에 쓰나미가 몰려오는 장면은 미국의 B급 영화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영화는 도입부 장면부터 지구 종말을 그린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2012(2009년)>처럼 VFX를 양껏 선보인다. 평양과 서울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건물이 무너지고 도시가 마비된다. 도심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재난 상황을 10년 전 <2012> 만큼 보여준다. 이어 특수부대 EOD 대위 조인창(하정우)이 차를 운전해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오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는 <샌 안드레아스(2015년)>와 겹친다.

과한 VFX 말고도 단점은 차고 넘친다. 먼저 백두산 폭발이란 소재를 활용한 시나리오가 억지스럽다. 백두산 폭발로 닥친 재난을 핵폭발로 막는다는 발상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영화적 상상력인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난데없이 딴죽을 거는 것이 아니다. 백두산 폭발은 충분히 현실적인 소재다. 국내 화산·지진 전문가들은 백두산을 활화산으로 판단한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언제든지 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939년 첫 기록 이후 1925년까지 총 31번 분화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두산 주변에서는 최근에도 분화 전조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2003년 백두산에서 균열·붕괴·산사태가 이어졌고, 2004년에는 계곡 숲에서 지표로 방출된 유독가스로 인해 말라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이 관찰됐다. 위성 위치 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한 분석 결과, 2002~2007년 천지 주변이 10㎝ 이상 부풀어 오른 것이 확인됐다. 충분히 현실에서 발생 가능한 설정은 개봉 전 미디어를 통해 <백두산>의 홍보 콘텐츠로 활용돼왔다.

전유경 청와대 민정수석(전혜진)은 지질학자 강봉래 교수(마동석)를 찾아 최악의 재난을 막을 계획을 세운다. 72시간 내 예정된 더 큰 추가 폭발을 막으려면 백두산 아래 갱도에 핵을 터뜨려 마그마를 분출시키는 것이다. 정부는 북한에 남아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핵탄두를 분리해 백두산에서 폭파시키겠다는 국정원 작전을 승인한다.

전역을 앞둔 조 대위는 만삭의 아내 최지영(배수지)이 미군과 함께 무사히 한국을 탈출하게 해준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작전에 투입된다. 그런데 침투조가 탄 비행기는 화산재 때문에 불시착해 전멸하고, 살아남은 조 대위 팀이 임무 전체를 도맡게 된다. 작전의 키를 쥔 북한 무력부 소속 리준평(이병헌)을 만나지만 둘의 공조는 삐걱대다가 결국 합심해 임무를 완수한다.

가장 큰 문제는 백두산 폭발을 막을 해결책이 1990년대 할리우드의 B급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핵폭발이라는 점이다. 맞불로 백두산 폭발을 잠재운다는 발상인데, 영화에서 핵폭발을 가져온 이유는 북한을 등장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재난+북한’ 소재 영화의 클리셰는 한국 영화의 진부한 흥행 공식 중 하나로 통한다.

그런데 굳이 북한의 등장을 위해 핵을 가져올 필요가 있을까는 의문이다. 영화 결말에서 핵이 터지면서 한반도 전체를 뒤흔들던 백두산 폭발은 그치고 공포에 떨던 국민은 안심한다. 방사능 피폭의 우려도 없이 평화를 되찾는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구조 위에 전형적인 일파만파 점입가경의 공식으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다. 작정한 듯 기획한 시나리오는 빈틈이 너무 많고, 태생적으로 클리셰적 한계도 지니고 있다.

기승전결의 각 단계로 이어질 때마다 지루해지면 볼거리를 하나씩 터트리고, 정해진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억지로 플롯을 연결하는 것은 <해운대(2009년)>, <더 테러 라이브(2013년)>, <터널(2016년)>, <타워(2012년)>, <판도라(2016년)>, <감기(2013년)>, <연가시(2012년)>, <신과 함께(2017년, 2018년)>와 흡사하다. 남·북이 힘을 합쳐 고난을 이겨내는 모양새는 <PMC: 더 벙커>, <의형제(2010년)>, <공조(2017년)>와 유사하다.

흥행 보장을 위한 고질적인 클리셰는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영화는 중반 이후엔 데자뷰처럼 짐작 가능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핵을 놓고 다투는 미·중 간의 공방전과 그 사이에서 남북을 대표하는 하정우-이병헌의 브로맨스는 영화 중반부터 예상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동안 숱하게 봐온 클리셰가 범벅된 영화가 흥행한다는 점이다. <백두산>은 개봉 나흘 만에 누적 관객 수는 200만 명을 돌파했다. 영화의 관습적인 클리셰들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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