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코로나19로 드러난 시장경제 바이러스 /최인철

18:44

코로나바이러스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기 전인 2월 중순 방문교수 신분으로 미국 텍사스 대학이 소재하고 있는 오스틴으로 왔다. 유학 시절 7년을 보낸 곳이라서 익숙한 곳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는 이곳마저도 낯선 곳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내가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와 달리 미국 사람들도 감염자와 사망자가 수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그 분위기가 바뀌었다.

특히, 3월 13일 미국 정부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이후 코로나바이러스는 일찍이 볼 수 없는 방향으로 미국의 일상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대형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물과 두루마리 화장지 등 생필품이 사라져버렸다. 만일에 대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재기로 일찍 동이 나버린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서도 서로에 대한 경계와 공포심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나 나와 같은 동양인들에게 그 경계심의 도가 더 높아진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텍사스에 있지만, 개방적 분위기의 오스틴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들이다. 간간이 들려오는 코로나바이러스를 빌미로 한 동양인들에 대한 혐오 범죄와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거리낌 없이 쏟아져 나오는 ‘차이나 바이러스’란 표현 속에서 나와 같은 동양인들은 더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지금의 미국 상황보다 훨씬 심각했던 한국의 대구에서도 없었던 모습들이 세계 최강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우연히 접한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 버니 샌더스의 연설이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샌더스는 미국인들이 이 역병에 대해 보이는 공포와 과민반응은 미국의 열악한 의료체계에 있음을 역설했다. 또한 그 뒤에 숨어있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문제점이 근본 원인임을 지적했다. 8700만 명 정도가 의료보험의 혜택에서 소외된 미국의 현실이 미국의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보편적 의료보험체계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의료보험은 철저히 시장의 원리에 따라 운영된다. 당연히 가지지 못한 자의 다수가 값비싼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고 의료혜택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살인적인 미국의 의료수가는 많은 이들에게 병원을 그림의 떡으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려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중국 우한에서 정부의 배려로 미국으로 돌아온 미국 시민이 병원에서 2주간 격리된 후 집으로 돌아오니 4천 불에 가까운 병원 청구서가 날아와 있었다는 이야기는 미국 사람들에게는 결코 해프닝으로 끝나는 농담거리가 될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진단되어 입원해서 퇴원했는데 병원비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한국 국민들의 이야기는 미국사람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미국 의료체계의 문제점은 어제오늘 회자된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의료 기술과 의료진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그 혜택은 일반인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다.

2018년의 보고에 따르면 조사된 미국 여성 유방암 환자들의 33퍼센트가 의료비용을 이유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를 포기하거나 연기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환자들이 의료비용이 무서워 병원으로 가기를 꺼리니 병원의 병상 수나 의사의 수도 따라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의료비용을 지출하지만, 선진국 중 가장 열악한 의료 인프라를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근본 원인은 돈이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문제인 의료 시스템에 철저히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돈이 결정하는 질서와 돈을 벌 수 있는 자유만이 철저히 신봉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원칙이 미국 의료시스템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폐해는 바이러스처럼 도사리고 있다가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고난의 상황에서 그 본색을 드러낸다.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라는 바이러스의 잠복기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질병의 대유행은 개인의 문제가 개인에게서 해결될 수 없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무리 본인 스스로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하더라도 내 이웃들이 그 병에 걸려 있다면 본인도 그 병에서 자유로워 질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역병의 대유행은 우리가 평소에 너무나 당연시 생각해 오던 개인주의적 사고와 관념을 조롱하며 그 기초가 얼마나 허무한 공상 속에 자리 잡은 모래성이었던가를 깨닫게 해준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그의 소설 ‘페스트’의 주인공을 통해 그러한 개인주의적 삶이 결국 부조리의 합리화를 위해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가공의 신화였음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어쨌든 모두 이 질병에 연관된 당사자들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혼자만의 힘으로 이 세상에 있는 소위 내 것이라는 것을 구축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미국은 이제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역병의 창궐로 셧다운이라는 초유의 상태에 돌입했다. 많은 주들이 회사도, 학교도, 식당도 문을 닫으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상대적으로 감원과 해고가 더 자유로운 미국 사회에서 이는 곧 많은 저소득층의 사람들이 수입원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 전 미행정부는 미국의 모든 성인에게 이천 불씩을 지급하겠다는 대책을 내어놓았다.

한국에서도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일정의 금액을 국민에게 지급하려는 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정책이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포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그 폐해를 감추기 위한 일시적 가면에 불과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당장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혹 지금의 위기는 모면한다고 하더라도 더 큰 역병이 돌아오면 또 어찌할 것인가?

유일한 대비는 돈이 지배하는 질서를 허물고 인간의 삶이 우선이 되는 경제로의 전환만이 그 답이다. 이는 비단 미국에만 적용될 것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