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원작 아류가 되지 않으려면, ‘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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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일본에서 개봉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리메이크한 한국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배우 정유미의 데뷔작인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년)>으로 호평을 받은 김종관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장애 여성 조제는 배우 한지민이, 츠네오는 한국 이름 영석으로 바뀌어 남주혁이 연기했다.

이 영화를 놓고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다. 일부는 한국판 <조제>가 원작 소설과 영화에 비해 한층 밝아졌고 주제 의식 또한 보편적으로 나타낸 애니메이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처럼 다른 상상으로 참신하게 풀어낼 것이라고 반가워한다. 반면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 이야기를 남다른 시선으로 풀어낸 수작을 흉내 내는 데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한국에서 유독 유명한 탓이다. 특히 일본영화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원작 소설은 1984년 발표됐다. 지난해 별세한 일본 대표 여류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이다. 그는 일상과 남녀 관계의 미묘한 분위기를 포착해 경쾌한 필치로 묘사했다. 일본판 영화는 개봉 당시 큰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탄탄한 작품성과 섬세한 영상미로 입소문을 타며 유명해졌다. 평단와 대중의 반응도 무척 좋은 편이다.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한 노파가 끌고 다니는 낡은 유모차와 마주친다. 유모차에는 그의 손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가 타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손녀를 산책 시켜 주고 있던 것이다. 츠네오는 이들의 귀가를 돕게 되어 식사를 대접받는다. 이들이 살고 있는 판잣집에 들어선 츠네오는 망설이다가 따끈한 쌀밥과 계란말이를 먹고서는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이후 츠네오는 조제의 삶에 조금씩 비집고 들어간다.

밥을 얻어먹으려 종종 판잣집을 찾던 츠네오는 조제에게 밥값으로 헌책을 구해다 준다. 장애인을 위한 복지사업 혜택을 받게 해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조제의 독특한 매력에 점점 빠져든다. 하지만 할머니는 츠네오와 점점 친해지는 조제를 걱정해, 둘의 사이를 훼방 놓는다. 그렇게 조제와 단절되어 지내던 츠네오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되고 조제를 찾아간다. 둘은 연인이 되어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츠네오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지방의 부모에게 인사시키기 위해 조제와 여행을 떠나지만 도중에 마음을 바꾼다. 츠네오의 동생은 “형, 지쳤어?”라고 묻는다.

여행 후 츠네오와 조제는 예정된 것처럼 헤어진다. 조제는 츠네오를 담담하게 떠나보내고, 츠네오는 자연스럽게 집을 나선다. 집 밖에서 기다리는 옛 여자친구 카나에(우에노 주리)의 얘기를 듣던 츠네오는 갑자기 무릎을 꺾고 통곡한다. 츠네오의 독백이 깔린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지만, 사실은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사랑을 삶의 종착역으로 본다면,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면, 츠네오가 참 미울 수 있다. 삶을 바쳐 옆을 지키겠다고 결심하지만 이내 허겁지겁 달아나기 때문이다. 조제의 장애 자체에도 지쳤지만 자신과 조제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끝내 견디지 못했다. 세상 모든 게 변하는데 애정이 식은 츠네오를 비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조제는 불행하지 않다. 할머니의 의해 갇힌 삶을 살았지만, 츠네오를 만나면서 세상에 한 발짝 내딛게 됐다. 낡은 유모차에 숨어 세상을 훔쳐보던 조제는 얼굴을 드러내고 전동휠체어를 타게 됐다. 모텔에서 곯아떨어진 츠네오 곁에서 조제는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영화는 츠네오와 조제의 이야기는 불행 속에서 의미를 찾고 이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츠네오와 조제가 이별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결말이었다면 환상에 머무른 ‘착한’ 영화에 그쳤을 것이다.

영화의 장점은 장애인에게 동정과 연민의 감정부터 들이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자는 영화에서 장애의 고통을 전면으로 배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애 문제를 미화한다고 지적한다. 장애를 정면에서 끌어안아야만 될까? 조제의 삶이 고통스럽기만 하고 조제의 불편이 사실적으로 다 그려졌다면 오히려 영화의 서사를 망쳤을 것이다.

영화에서 조제는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다. 연인이 언젠가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마저도 기꺼이 수용한다. 장애가 누구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조제의 자존감은 높다. 츠네오가 곁에 있을 땐 그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와 헤어진 뒤에는 혼자 장을 보러 나가고 담담하게 요리도 한다. 츠네오와 보냈던 시간이 조제에게는 세상과 마주할 용기를 준 것이다.

한국판 <조제>는 한국인 입맛에 맞는 코드를 심는 리메이크가 아니기를 바란다. 원작과 너무 달라도 팬들에게 원성을 사거나, 너무 똑같아도 한국적 감성이 부족하다고 대중에 외면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보다는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를 이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