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해를 넘긴 역병, 1579년 설날의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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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우리는 역사를 기본적으로 ‘다름’의 관점에서 본다. 후진적 정치제도와 발달하지 못한 과학적 지식,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낸 특유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보면서, 그나마 ‘다르다는 사실’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입시 중심의 역사 교육으로 인해 왜 다른지에 대한 이해보다 다른 상태만을 외우게 하면서, ‘다른 사실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만 역사를 보게 했다. 물론 역사는 일차적으로 ‘다름’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조금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의외로 ‘다름 속에서 다르지 않은 현실’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거대사 중심이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기록해 둔 일기류 기록들 속에서는 나와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442년 전인 1579년 설날은 코로나19의 기세에 덮여 있는 2021년 설날보다 더 을씨년스러웠다. 안동과 예안, 봉화 등지에서는 1578년 찬바람이 일면서 시작된 전염병이 해가 바뀌어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행여 역병이 해를 넘길까 싶어 연말에 구나驅儺(한 해의 액운을 털어 버리고 새해를 맞기 위해 연말에 행하던 의례)까지 치렀건만, 해가 바뀌면서 전염병의 기세는 오히려 더욱 거세지고만 있었다.

금난수琴蘭秀(1530~1604)는 당시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이황李滉(1501~1570)의 직전제자로, 예안을 대표하는 사족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명망이나 양반으로서의 위치도 전염병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영민하기 이를 데 없어 애지중지했던 막내아들 금각이 전염병에 걸린 것을 시작으로, 새해 첫날에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여종 석금과 옥섬이가 앓아누웠다. 금난수는 지난 연말부터 전염병을 피해 가화음 재사에 거처하고 있었던 터라, 가족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함께 새해를 맞이하려는 모든 계획들은 물거품이 되었다.

▲전란에 역병으로 먹을 것이 떨어져 소나무 껍질을 벗겨 끼니를 이었다.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금난수는 병에 걸리지 않은 첫째와 둘째, 셋째 아들을 멀리 떨어진 잇손의 집으로 피난하게 했다. 금난수 자신도 고산에 있는 서재로 옮기고, 대신 자신이 머물던 가화음 재사에는 병에 걸리지 않은 다른 가족들이 머물게 했다. 병든 여종 석금과 옥섬은 본가에 격리시켜 머물게 했고, 아직 채 병이 낫지 않은 막내아들은 끝동의 집으로 옮겼다. 새해 첫날부터 가족들이 모이기는커녕,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병자를 격리하고 사람들을 피난시키면서 나름 대책들을 세웠지만, 설 다음날부터 딸 계종季從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전염병이 대책보다 더 빠른 지름길로 와서 금난수의 집을 덮치고 있었다. 금난수의 아내는 어쩔 수 없이 아픈 딸 계종을 데리고 석금과 옥섬이 치료받고 있는 본가로 가야 했다. 병자들을 모으고, 딸의 간호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뒤 고산의 서재로 딸 종향從香마저 돌림병이 옮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종향의 병세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고 했지만, 돌림병의 기세로 보아 언제 악화될지 몰라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아들과 두 딸, 그리고 가까이에서 그들을 간호하면서 보살폈던 여종 2명에게 밀어닥친 전염병을 막기에 여념 없는 틈을 타 비극적인 일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금난수의 집일을 보고 있던 손동의 처 금이와 여종 수비가 끝내 전염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을 챙기던 와중에 독립적으로 떨어져 생활하고 있었던 종들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 그들은 그들 생애 마지막 설날을 가장 힘겹게 연명하다 결국 생명줄을 놓아 버렸던 것이다. 금난수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안타까움 마음도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은 이내 공포로 번져갔다.

1579년 새해, 금난수는 전쟁과 같은 상황을 보내고 있었지만, 조선 전체의 역사로 보면 그 만의 특별한 상황도 아니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500년 역사에서 전염병이 발생한 연수는 무려 160년으로, 대략 3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다. 심지어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부터 100년간인 1691년까지는 평균 2년마다 한 번씩 발병해서 50년을 전염병과 함께 동행해야 했다. 금난수가 남긴 《성재일기》에서도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이듬해인 1593년 역시 전쟁으로 인한 참혹함보다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홍역으로 인한 참혹함을 더 크게 기록하고 있다.

비단 조선시대만의 일은 아닐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선시대 남아 있는 기록만 가지고 보면 역병의 발생은 대체로 유사한 사이클을 형성하고 있다. 한 해가 시작과 함께 닥쳐온 보릿고개는 한 해를 절망스럽게 시작하고, 보리를 수확하고 벼를 심어야 할 시기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닥치면 그해 가을은 궁핍에 찌든 백성들을 흉년이 앞서서 기다리곤 했다. 손에 쥘 것 없는 가을의 절망 끝에 세금과 환곡의 횡포가 더해지면, 쌀쌀해지는 바람을 타고 전염병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조선의 전염병은 기근과의 동행이 길어지면서 출현하고, 그 강도는 기근의 강도와 비례하기 일쑤였다.

1579년 전염병은 그마나 다행스럽게도 금난수 가족들의 목숨까지 앗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해 전염병이 약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염병에 채 대응할 수 없었던 손동의 처 금이와 여종 수비는 끝끝내 전염병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일정 정도 의식주만이라도 해결할 수 있었던 양반들과 달리, 기근이나 궁핍한 삶으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져 있었던 조선시대 약자들의 경우에는 같은 병에도 쉽게 희생되었다. 게다가 기근은 구휼을 통해 그나마 공동체가 함께 대응했지만, 전염병은 공동체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 개인들을 병원체로 인식하고 타자화시키면서, 공동체의 힘 자체를 와해시키는 결과를 불러오곤 했다. 이 경우에도 공동체의 힘이 필요 없는 계층이야 문제될 것이 없지만, 공동체의 힘에 의해 겨우 목숨을 연명해 가던 사람들은 이를 이길 힘이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400년도 더 지난 지금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염병은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을 따라 흘러 다니고, 공동체의 관심에서 소외되었던 곳에서 대규모의 희생이 발생하고 있다. 작년 코로나19로 인해 한국 최초의 사망자가 나왔던 청도 대남병원의 환자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상황을 제대로 알릴 수도 없었던 약자들이었고, 전쟁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낳고 있는 미국에서도 여전히 희생자들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전염병은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이 어디인지를 잘 보여주는 리트머스지 역할을 해 왔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곧 코로나19는 종식되겠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로부터 소외된 계층을 남겨두는 순간, 또 다른 미증유의 재앙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공동체와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 있음을 이번 코로나19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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