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이 주요모순이다.

[기고] 이론의 공동화에 빠진 노동운동, 시민사회의운동

15:21

바닥에서 긴다! 통상 운동의 현장성을 강조할 때 활동가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가끔 매우 보수적 언술일 수 있다. 정확하게는 ‘바닥에서 기면서 공부도 열심히 한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가끔 그 분야에서 아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보수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 그리고 뭔가 ‘낯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위험시한다. 가끔 그러한 행동은 자신이 새로운 조류를 거부하고 자기의 방식을 지키려는 보수적 태도에서 비롯한다. 비판하면 그 말을 문제 삼지 않고, 그 사람의 자격을 운운한다. 그것도 왜곡된 정보에 의해. 그럴 때 주위에서 보는 사람은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낀다. 성실하지만 보수적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패권적 모습까지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은 ‘내적 연관’이다. ‘연관의 법칙’이라는 말도 의미는 같다. 현장과 비현장을 차별화하고 각자를 파편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장성이 중요하다는 말이 현장성‘만’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가진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물들을 연관 없이 떼어놓고 보는, 부르주아들의 사고방식에 가깝다. 예를 들어본다면, 『자본론』은 부르주아들이 모두 떼어놓은 것, 즉 파편화한 경제이론들을 ‘연결’한 것이다. 변증법적 사고방식에서는 그 대립적인 것들 사이의 내적 연관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맑스는 실천적 유물론의 창시자다. 이론이 실천과 결부되지 않을 때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즉,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맑스 사상의 핵심 중 하나다. 대체로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론을 위한 이론, ‘이론주의’에 빠진다. 맑스는 이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겔 사상을 제대로 계승하면서도 실천적 유물론이 빠져 있음을 비판한다. 현실을 이론적으로 비판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청년헤겔학파에게도 반기를 든다. 유물론은 인식했는데 변증법을 놓치고, 사랑과 우정이라는 인간애에서 사회변혁의 길을 찾고자 했던 포이어바흐에 대해서도 배울 것은 배우고 비판할 것은 비판한다. 그의 일관된 관심은 세상을 실제로 바꾸는 실천이었다.

그는 그 길을 ‘추상적 이론’, 비하하면 ‘이론을 위한 이론’에서 찾지 않고 현실에 실존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찾는다. 노동자는 ‘현실’이며 이들의 ‘현재 행동’과 ‘예상되는 행동’에 대한 ‘경험’에서, 이를 ‘추상’하여 이론을 만든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마오쩌둥. 1938년. [사진=http://www.ibiblio.org]
▲글을 쓰고 있는 마오쩌둥. 1938년. [사진=http://www.ibiblio.org]

이제 실천이 철학의 주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다. 맑스는 실천에 토대한 이론을 만들어 노동자의 변혁적 실천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론과 실천의 구체적 관계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마오쩌둥이 중국의 변혁적 특수성 가운데에서 이론화한다. 마오는 『모순론』에서 “일반적으로 생산력, 실천, 그리고 경제적 토대는 주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유물론자가 아니다. 하지만 생산관계, 이론, 그리고 상부구조의 측면도 일정한 조건에서는 주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마오가 이러한 이론을 만든 실천적 이유는, 혁명의 물질적 조건이 매우 취약한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인 중국에서도 농민들의 힘으로 사회변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들은 혁명을 성공시켰다.

마오는 여기에서 모순이 고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기계적 유물론,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이며, 모순은 상호연관 되어 있고 서로 역전되며 전화한다고 한다. 주요 모순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이 이론은 실천적으로는 민족통일전선을 정당화 한다. 외침을 받을 때는 제국주의와 민족과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 되기 때문에 민족부르주아와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도 크다. 주로 경제결정론적인 사고에 빠지기 쉬운 경향에서 의식과 상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토대가 미흡한 중국에서 사회변혁이 가능함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마오의 이러한 사고는 서양의 68혁명의 이론적 자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역전되는 사고방식은 이론과 실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오늘 한국의 노동운동, 사회운동, 시민운동은 이론이 주요 모순이며, 이론의 빈곤이 운동의 정체를 가져오는 주된 원인이다. 제대로 된 변혁이론을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 반복되는 실천들은 공허할 수 있다. 이론의 빈곤은 경제주의로, 민중주의로, 좌파계급주의로, 즉 레닌이 그토록 경계했던 좌우익 기회주의로 빠지고 만다.

그리고 이론이 빈곤한 사회운동·시민운동은 사실상 부르주아의 교란에 놀아날 수 있다.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의 각종 운동 모두에서 이론의 공동화 현상은 심각하다. 집회장에서 치열한 투쟁적 실천에도 불구하고 공허하고 형식적인 선동이 난무한다. 결국, 열심히 일해서 타도대상에 유익한 활동을 하는데 그치고 있다. 부르주아들이 유포시킨 ‘말장난들’에 장단을 맞춘다.

도대체 이를 어찌할 것인가?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활동가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경험을 쌓을 것을 당부한다.

“사회 민주주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국제적인 운동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민족적 쇼비니즘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는 또한 청년기의 나라에서 시작되고 있는 운동은 다른 나라의 경험을 체현할 때에만 성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이를 위해서는 그 경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독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현대의 노동 운동이 얼마나 거대하게 성장하여 그 가지를 상상해 보기만 해도, 이 같은 과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풍부한 이론적 역량과 정치적 (또한 혁명적) 경험을 쌓아야 하는 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풍부한 이론적 역량과 정치적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경제투쟁, 정치투쟁, 사상투쟁을 3대 투쟁이라고 했다. 당연히 사상투쟁 영역은 이데올로기, 이론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론은 먼저 선진 나라의 경험들, 그리고 자기 나라의 역사적 경험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하며, 개인적 담론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자신과 자신들의 특수한 경험을 이론화하여 보편화시켜야 한다.


왜 글을 쉽게 쓰지 않느냐, 노동자들도 이해할 수 있게 써달라는 주문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 이론이란 어려운 것이다! 공부해서 이해하라! 왜냐하면,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결코 어렵지만은 않다. 인터넷에서 찾아만 봐도 대부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공장과 회사에서 훈련된 인내심 하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절실한 필요성’이다. 노동자야말로 어려운 이론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해서 ‘혁명적 지식인’이 되겠다는 결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희망이다!

공부하지 않는 활동가들에게 우리 운동의 미래를 맡겨서는 안 된다. 경험에서 비롯한 개인적 담론에 빠져 횡설수설하거나, 파편적으로 독서를 하고 그 지식들의 내적 연관성을 파악해내지 못하는 독서가적 태도도 옳지 않다. 이러한 태도는 모두 부르주아 사회를 정당화하는데 기여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내면을 꿰뚫고 그 내적 연관을 파악하며, 그 고통의 심연에서 허덕이는 인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질 때만, 우리는 현실의 질곡을 벗어날 수 있는 이론을 획득할 수 있다. ‘보통’사람은 피지배자다. 그들이 ‘특별’하고자 할 때만 그 굴레를 벗어나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어떤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힘인 지배계급이 동시에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힘이라는 말이다…지배계급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무엇보다도 의식, 즉 사상을 갖는다…따라서 사고하는 자로서, 사상의 생산자로서 지배하고 그 시대의 사상의 생산과 분배를 규제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이 지배적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렇다면, 노동자와 민중이 지배자가 되고 싶다면, 사색하고 공부하여 사상을 갖추고 그 사상으로 시민사회에 대한 헤게모니를 획득하여야 할 것이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지금까지 역사의 주요 추동력의 하나로서 보았던 분업은 이제 지배계급 내에서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으로 나타났다. 그에 따라서 이 계급 내부에서 한 부분은 그 계급의 사상가로 등장하고(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에 대한 환상의 형성을 자신들의 주요한 생계 원천으로 삼으면서 적극적으로 구상력을 가진 그 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이다), 또 다른 부분은 이러한 사상과 환상들에 대해서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적으로 이 계급의 능동적인 구성원이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나 사상을 만들어 낼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와 민중은 지배자들의 사상에 포획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노동운동가들, 사회·시민운동가들이 현장만 강조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소위 ‘몸으로 때우는 운동’으로 자기를 특화하고 단순한 사상의 수용자로 전락하여, 항상 지배계급 혹은 준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의 사상에 농락당하여 스스로 동조하게 된다. 노동운동의 경제주의, 시민운동의 개량주의는 모두 다 이런 원인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세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 마치 공기처럼 장악하고 있다. 그 틈을 비집고 변혁사상이 형성된다. 그러나 그 변혁사상은 이내 부르주아 사상에 포획된다. 어설픈 운동권은 실제로는 부르주아 지배에 기여한다. 늑대는 약한 양을 사냥하여 건강한 양들이 번식에 성공하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늑대는 ‘어느 정도’ 양의 편이다.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도 이와 같다. 어설픈 운동권은 부르주아 사회의 ‘건강성’에 기여하는데 그칠 뿐이다. 진정 독하게 마음먹고, 부르주아 사상의 공기를 흡입하지 않겠다는 지속적인 결단 없이는 자기 사상 하나 챙기기도 어려운 것이 자본주의 세상이다. 노동운동하고 사회운동·시민운동하면 ‘혁명가’일 것이라고? 오히려 그런 경우는 ‘희귀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