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칼럼] 선량한 구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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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마음만으로는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회학자 김지혜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보통의 사람들이 미처 차별을 포착하지 못하고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고 마는 이유에 대해 각자가 처한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평등을 이뤄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익숙함을 넘어서는 상상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진단처럼 다소 선량한 차별의 출발점에 서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을 바라보면 자신의 특별한 위치를 갖기 위한 노력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배경, 행운 등 많은 요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공적인 경험과 신념에만 근거해 사회 현상에 대해 진단하고, 자신의 생각이 곧 상식인 것으로 착각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진정 상식적인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그들은 여전히 잘살고 있는 자신의 내면 한구석에 집중하면서, ‘선량함’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 스포츠 선수들의 결실은 자아실현과 같은 공동선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 승리, 순위, 돈, 유명세 등과 같은 가시적인 성취물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성과들을 통해 자아가 실현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으나, 주변의 인정은 주로 이런 실질적인 내용들로 채워진다. 스포츠에 이런 성과를 가진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성과는 실로 널리 퍼지기 마련이라, 많은 국민들의 관심 속에서 마치 흔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유명 선수들의 언행은 곧 상식적인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새겨들을 만한 명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화려한 이면에 자리한 한국 스포츠의 본모습은 오랜 기간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에 의한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아왔다. 이른바 승리지상주의로 불리는 한국 스포츠의 국가적 지향점은 스포츠로 국위를 선양하겠다는 국가주의적 목표로 경도되면서 ‘모두를 위한 스포츠’라는 보편타당한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말았고, 부수적으로 폭력, 성폭력, 학습권 박탈, 혹사, 사생활 침해 등 무수한 문제를 드러냈다. 이런 일이 거의 반세기 넘게 벌어졌지만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는 스포츠 스타들의 메달 소식 뒤편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묻히기 일쑤였다.

특히 그들의 성장 과정이기도 한 학교운동부의 학생선수는 1972년 체육특기자 제도가 도입된 이후 공부는 차치하고, 운동에만 ‘올인’하는 것을 인정하는 정부의 비교육적 행태의 결과로 ‘운동부=학업결손’이라는 이상한 등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학업을 아예 안하더라도 성과만 나오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이상한(?) 평가체계가 만연하게 되면서 이런 부조리한 관행은 더욱 공고하게 자리잡았다.

물론 우려도 없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학생운동선수들은 수학능력의 상실을 우려했고, 최근에는 학령인구의 급감과 수업결손 등으로 인한 운동부 기피 현상 등으로 한 종목의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극단으로 치달아도 정부 당국은 ‘학업결손을 더 이상 안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해결책은 내놓지 못했고, 이런 문제들을 줄여나갈 최소한의 장치, 즉 최저학력제와 출석인정결석 허용일수와 같은 미봉책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선거철을 맞아 또 수난을 당하고 있다.

최근 각자의 종목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두 메달리스트 정치인들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최고를 위해 극소수를 살리고, 다수를 포기하자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어서 걱정이다. 그들은 “장기간에 이뤄지는 올림픽 선수 선발전에서 학생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서는 최저학력제, 출석일수 인정 등을 더 유연하게 풀어줄 필요가 있다”거나 “학생선수의 직업 관련 현장체험을 실습 및 출석으로 인정하면서 최저학력제로 인한 차별 문제를 해결하면 출석 인정·결석일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서 최저학력제와 출석인정 결석허용일수를 무력화하는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실상 그 기준이 너무도 낮아 잘 걸리지도 않는 최저학력제와 학교에 거의 안 가도 되는 출석인정 결석허용일수지만 이마저도 못마땅한 것이다.

과거 한국 사회의 스포츠가 성과를 내던 방식, 다시 말해 빈약한 저변에서 소수 엘리트 선수를 선발하여 학습권을 박탈하고 혹사를 시키는 비정상적인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에서 성장한 이들이어서일까? 그들의 인식은 만인이 소외되지 않고, 보편적인 문화로 즐겨야 할 스포츠를 마치 자신의 경험과 같이 행해야만 지속될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 달콤한 성과를 위한 대다수의 희생은 나약한 개인의 책임일 뿐 스포츠의 본모습은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운동부라는 섬에 갇혀 지낸 자신들에게만 익숙한 방식을 넘어서는 상상이 아쉬운 대목이다. 누군가를 차별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아닌, 반대로 누군가로부터 우리만 특별하게 봐달라는 그들의 이 선량한 ‘구별주의’는 결코 인권적이지도 않고, 스포츠가 지향하는 본모습도 아니다. 비록 사명감 넘치는 체육인들의 선량한 의도라 하더라도 그 결과가 본인의 선량한 의도에 미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면 주변도 돌아보고, 반성도 해보고, 침묵하는 것도 방법이다.

김현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장